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리경 / 시간을 담은 상자들

이선영

시간을 담은 상자들

  

이선영(미술평론가)



리경은 최근 몇 년간의 개인전에서 빛을 주제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그것은 초월성을 띄는 주제인 빛을 미술작품이라는 형식에 담는, 즉 초감각적인 것을 감각화 하려는 작업들이다. 빛이라는 소재/주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매우 보편적이기에 작가로서 차이를 제시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우주를 이해하는 단서를 빛에 두었던 오래된 전통이 있다. 막스 야머는 [공간개념-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에서, 선사시대로부터 빛은 초자연적 힘들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신의 모든 형상을 금지하는 성경조차도 빛 원소를 신이 인간에게 보일 수 있는 매체로  사용한다. 막스 야머는 ‘주는 옷을 입음과 같이 빛을 입으신다’(시편), ‘나는 세상의 빛이다’(신약성서) 등의 어록을 인용한다. 막스 야머에 의하면 유대 신비철학의 용어에서 빛은 가장 거룩한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이며, 빛을 신으로 삼는 일은 신플라톤주의와 중세 신비주의의 근본 특징이 되었다. 


중세의 자연철학은 빛을 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빛은 보편적 질서가 유지되는 수단으로 간주된다. 그렇지만 빛은 가장 순수한 현실태로 있을 때만 신이다. 리경의 관심은 그냥 빛이 아니라 순도와 강도를 지닌 빛이다. 그래서 퍼지는 빛 보다는 직선의 빛을 선호한다. 아니면 이 전시의 자개 작품처럼 아예 산란하는 빛이다. 이는 빛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와도 관련된다. 우주창조와 빛은 연동된다. 그렇지만 더 이상 과거의 종교적 도상을 재현할 수 없는 현대의 작가에게 우주, 적어도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념을 빛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리경의 주요 매체이자 주제인 빛 또한 무한하다. 그러나 형식은 유한하다. 때문에 ‘무한과 유한의 통일’(헤겔)이라는 지향은 작가가 줄 곧 감당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내용과 형식간의 이 영원한 긴장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정된 형식만을 재현하거나, 또는 과정을 제시하는 것에 머문다면 쉬울 것이다. 


경직된 필연성과 자의적인 우연성에 대해 문예사조는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같은 고풍스러운 명칭을 붙여줬다. 이 양대 사조의 교차로 문예사조를 통째로 설명하려는 이도 있다. 리경은 너무 큰 내용을 담기 힘들어서 빈 그릇만을 제시하는 형식주의적 해결책, 또는 형식주의를 지양한다고 하면서 우연적 과정으로 와해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내용을 포기하거나 형식을 포기하거나 하는 방식은 불완전하다. 현대의 문예사조사는 이러한 대표적인 해결책에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명칭도 붙여줬다. 그것은 고전/낭만주의의 현대적 버전이다. 물론 문화나 예술이 아닌 현실은 더 가혹해서, 의도나 과정이 아닌 결과만 중시한다.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어떤 초월적 실재, 또는 절대적 타자를 적절한 형식에 담아내려는 리경의 정공법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편집증적인 방식을 야기했다. 자신의 감성에 충실해왔던 작가는 코로나 사태로 전시 준비 기간이 늘어나면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투여된 수많은 시간의 단면인 전시는 긴장감이 서려있다. 희열은 그러한 긴장감의 결과이다. 3개 층에 포진해 있는 작품들은 여기와 저기를 이으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대개 그것은 수직의 방향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초월적인 느낌을 준다. 초월적 주제야 말로 정밀한 형식이 요구된다. 보이지만 닿지 않는 천정 빛 작품이나, 만질 수 있지만 밑이 잘 보이지 않는 황금 빛 상자들은 위와 아래 사이의 물리적 간격을 크게 벌려놓는다. 작품 속 계단도 아래와 위를 연결시켜주지만, 그 계단이 수시로 움직인다면? 저 높은 곳, 아니 적어도 다른 곳에 이르려는 의지와 정념은 곧잘 패닉 상태에 빠지게 한다. 전시/설치된 작품들은 물리적 장치만을 보면 그다지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벽이나 천정, 바닥에 놓인 것들은 광물질적인 기계/ 장치/오브제들이지만, 그것들은 빛과 만나 때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생명이 호흡하듯이 매순간 변모한다. ‘물질을 영혼으로 만들려는’, 거의 영매와도 같은 지향은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어느 순간도 같지 않은 장(場)을 열고자 한다. 


최소한의 물리적 부피를 가진 장치들에 의해 조율된 빛은 작음과 큼 사이를 극적으로 연결하는 매개가 된다. 밀도와 강도, 순도를 중시하는 작가의 지향은 더하기보다 빼기를 야기했다. 그 효과는 제대로 발휘되어, 작품들의 면면은 뺌으로서 더해진 역설의 현장이다. 올해의 개인전 주제인 ‘천개의 바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고민이 담겨있다. ‘천개의 바람’이라지만, 바람을 셀 수 있는가. 아니 잡기라도 할 수 있는가. 담을 수 있는가. 재현될 수 없는 것을 재현하려는 불가능에 가까운 노력은 미를 넘어선 숭고의 영역에 속한다. 장 뤽 낭시는 숭고미를 주제로, 여러 미학자의 논문을 편집한 책 [숭고에 대해서]에서, ‘재현은 적합성과 의미를 매개로 구성되지만, 제시는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과 그 사건의 섬광에 관여한다’는 말로 미와 숭고를 구별한다. 같은 책에 편집된 루이 마랭의 [푸생의 그림 속 바벨탑에 관하여]는 미술작품 속에서 구체화된 숭고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보다 구체적이다. 


이에 의하면 숭고는 ‘재현할 수 없는 것들의 재현, 다시 말해 번개나 벼락, 천둥, 요컨대 폭풍이라는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는’ 문제이다. 이 논문에 인용된 헤겔의 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숭고는 무한을 표현하려는 노력이나, 그 노력은 현상들의 세계에서는 결코 재현에 적합한 대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형태들이 그것들이 표현하는 내용 그 자체에 의해 곧 파괴되고 만다는 점에서, 내용의 표현은 동시에 표현의 소멸을 의미한다. 숭고를 특징짓는 것도 바로 그 점이다’(헤겔) 낭만주의를 비롯한 미술사상의 많은 숭고한 작품들처럼, 리경의 작품에서도 빛은 쉽게 재현될 수 없다. 숭고는 미술의 형식이라는 ‘유한 속에 무한’(셀링)을 담는 문제이다. 셀링에 의하면 ‘숭고에 대한 직관은 감각적 직관이 감각 대상의 크기에 비교하여 부적합한 것으로 판명될 때 발생한다. 숭고를 거치면서 무한은 이중의 얼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것은 위장이나 은폐라기보다는 변모나 관통의 과정’이다. 


헤겔이나 셀링이 언급한, ‘유한 속에 무한을 담는’ 리경의 방식은 다소간 아나로그적이다. 그것은 이 전시의 한 작품처럼, 이론적 계산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일일이 손으로 조정하여 근접한 효과를 내게 했다. 프로젝터나 조명장치 뿐 아니라, 자개나 공업용 도료, 순도 높은 물감 등, 빛을 효과적으로 품어 낼만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그것들은 모두 주변에서 쏟아지는 자연/인공광 뿐 아니라 어둠을 포함한 한줄기 미약한 빛에도 반응하는 민감한 표면을 가졌다. 이런 것들이 만약 예술작품 이외의 것으로 불리워야 한다면 미지의 발광체가 맞을 것이다. 이 발광체들은 살아있는 생명의 눈에서 발견되는 빛에 상응한다. 이러한 빛의 제시에 있어서 시간성은 중요하다. 전 층을 관통하는 수직공간에 설치된 작품은 마치 조명등처럼 무엇인가를 비추는데, 그것은 빛의 장으로 들어선 관객을 순간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안개머신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는 수직에 가까운 빛줄기를 가시화한다. 


일정 간격을 띄워 나란히 배치된 3개의 빛은 순환 주기가 다르다. 3개가 다 켜질 때 가장 환하고 잠시지만 다 꺼질 때도 있다. 그 사이에 어떤 빛은 스러져 가고 어떤 빛은 밝아진다. 그것은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인연의 과정에 나타나는 바를 표현한다. 사방으로 퍼지는 연기는 폭포처럼 떨어지는 빛줄기 속에서 위를 향한 움직임을 가시화한다. 여기와 저기는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웜홀처럼 도약이나 비약을 요구한다. 전 부친이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되어 만든 이 작품은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신비한 통로가 되 줄지 모른다. 1층의 투명 아크릴 좌대 위에 놓인 3개의 황금빛 금속 상자들은 빛의 삼원색을 담았다. 약간의 기포를 포함하는 녹색, 붉은색, 푸른색의 반투명 물질은 조명에 받아도 밑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액체인지 고체인지도 모를 어떤 농밀한 내용물이 뚜껑도 없이 활짝 열려있는 채 이지만, 수수께끼 같은 물질로 다가온다. 


3개의 수직 조명이 빛을 기체처럼 보이게 한다면, 바닥에 놓인 것들은 액체적 느낌의 고체이다. 어떤 조건이 되면 빛줄기로 퍼져 나갈 듯한 원물질을 상징한다. 물론 구별되는 세 개의 상자가 만나야 사건은 벌어진다. 황금빛 용기(容器)는 열린 채 봉인되어 있는 셈이다. 2층 계단을 올라가 들어선 벽면들에는 가상의 계단이 펼쳐진다. 진짜 계단, 금속으로 실루엣을 따서 벽에 붙인 계단 이미지, 그리고 벽에 투사되는 수많은 계단의 환영들이 공존한다. 벽에 투사되어 수시로 바뀌는 이미지는 움직이는 관객의 그림자와 함께 시점도 종점도 알 수 없는 계단 길을 방황하게 한다. 지형을 수시로 바꾸는 사막처럼, 뻥 뚫려 있는 공간도 방황이 가능하다. 리경의 작품은 벽에 펼쳐진 미로다. 벽면에는 계단을 나타내는 기표가 붙어있다. 여러 각도와 모양새, 색채를 가지고 있지만 위를 향한 방향성은 일관된다. 내실을 포함한 벽 여기저기에 다섯 색깔로 칠해졌다. 


벽의 여러 면에서 이런 저런 방향을 향하는 계단 이미지는 스테인레스 스틸에 자동차 도료를 칠해서 색이자 빛인 발광체로 존재한다. 광입자가 살아있는 금속 표면의 색감은 물신과 비물질을 오고간다. 도약이나 비약이 아니라,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야 하는 계단 또한 여기와 저기를 이어주지만, 실제로 내딛을 수 없거나 상황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점이 공포스럽다. 또는 흥미진진하다. 노을처럼 색이 충만하게 펼쳐있는 유화와 그 위에 수직으로 걸쳐있는 네온은 색이 빛이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직의 빛줄기는 공간을 가르며 어떤 시작을 알린다. 자연광도 합세할 수 있는 3층 전시장에는 45x45x15cm 크기의 정방형 오브제들이 붙어있다. 하나의 단위로 작용하는 정방형 오브제는 2mm 너비로 자른 자개를 빼곡하게 붙여 만들었다. 한때 살아 있었던 조개는 다른 형식으로 살아난 듯 시시각각 영묘한 빛을 발하며, 그림자마저도 변화무쌍하다. 


다양한 각도로 벽에 드리워지면서 물빛처럼 어른거리는 그림자 또한 찬란한 빛의 드라마 속에서 한 몫 한다. 살아있는 재료인 자개는 계절에 따라 선명도가 다르다. 자개는 방향을 다르게 배열하여 빛의 반향이 보다 다양하다. 깍은 단면에 의해서 달라지는 표면은 마치 보석과도 같은 방식으로 빛을 발한다. 전체적으로는 빛의 색을 가진 상자들은 빛 속에 빛을 담은 듯하다. 정사각형 상자에 빛의 단편이 가득 쟁여져 있는 듯한 모습은 시간을 공간화 한다. 빛을 수집해서 보여주는 방식이다. 몇 년 전 3면이 유리로 둘러쳐진 일본의 에르메스 전시 공간 바닥 150평을 자개 작품으로 깔아 빛의 방을 연출했다면, 이번 전시의 자개 설치작품은 빛의 공간을 축약한 셈이다. 몰입도가 높은 이 작품들은 화려함과 명상이 함께 할 수 있는 희한한 경험을 자아낸다. 작가는 그자체로도 근사했던 빛의 방에 빛에 완벽하게 반응하는 오브제를 찾다가 자개를 발견했다. 


이번 전시에서 벽에 설치된 작은 정사각형 자개 오브제 또한 충만한 빛의 흐름이 포착된다. 겹을 이루는 조밀한 자개의 층은 접혀진 주름처럼 잠재적 펼쳐짐을 담고 있다. 이 전시에서 정사각형은 크기를 달리하면서 여러 층의 작품을 관통하는 형식이 되어준다. 천정에 붙어있든, 바닥에 놓여있든 벽에 붙어있든 간에 그것들은 빛만큼이나 중요한 장치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물그릇처럼 내용물의 형태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프란츠 칼 엔드레스와 안네마리 쉼멜은 [수의 신비와 마법]에서 4는 세상에서 최초로 인식된 질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4는 다양성에 질서를 부여한다. 빛으로 대표되는 무한한 다양함을 담는 정방형은 상징적인 형식이다. 4를 ‘물질적 기초를 확립한 세계와 관계 한다’고 보는 수비학(數祕學)의 전통에 따르면, 리경의 작품 속에서 차원을 달리하며 반복되는 정방형은 비물질을 담은 물질의 상징으로 적합하다. [수의 신비와 마법]에 의하면, 물질의 대표적인 예는 오랫동안 정방형으로 간주된 지구(땅)과 네발 동물이 전형적인 지상의 피조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로부터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또한 구축되었다. 사각형의 도시 광장은 세속의 무대인 것이다. 위로부터 발원한 초월적인 무엇을 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 반대의 것, 즉 가장 물질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나의 극이 또 다른 극을 요구하며, 양자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같은 맥락에서 이 전시의 3이란 숫자도 각별하다. 우선 합쳐지면 빛이 되는 세 가지 색은 삼위일체를 떠오르게 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세 개의 빛기둥도 비슷한 느낌이다. 무엇인가를 담는 상자는 예술, 특히 그림의 오래된 비유처럼 보이지만, 리경의 경우 좀 더 상징적이다. 빛을 포함해 담기 힘든 것을 담는 이 용기(容器)는 플라톤이 구상한 ‘코라’와 유사하다. 하지만 매우 엄격하게 제시된 사각형은 고대의 철학보다는 근대물리학의 패러다임과 더욱 가까운 듯이 여겨진다. 뉴턴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물리학은 질적인 우주를 양적인 우주로 변화시켰다고 평가받는다.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했던 고대적 공간을 중성적인 물리적 법칙이 작동하는 텅 빈 상자 같은 것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탄식과 경탄을 함께 자아냈다. 


막스 야머는 [공간개념-물리학에 나타난 공간이론의 역사]에서, 근대물리학은 공간을 연속적이고 등방적이며 균질적이고 유한하다고 여긴다고 말한다. 이러한 추상적 공간 관을 연 것은 뉴턴이다. 전기 작가 제임스 글릭은 [아이작 뉴턴]에서 뉴턴이 확립한 절대적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뉴턴의 목소리로 정리한다. ‘절대적이고 진실하고 수학적인 시간은 외부적 요인과 관계없이 자체 내에서 자체적으로 그리고 그 본성에 의해 균일하게 흐른다. 절대 공간은 외부의 그 무엇에 대해 준거하지 않으면서 그 자체의 진실한 본성에 의해 항상 균질하고 부동이다’ 그러나 말년의 뉴턴이 연금술에 몰두했듯이, 깨끗하게 비워진 상자 안은 그 무엇으로도 다시 채워질 수 있었다. 당시에도 동료 학자들에 의해 신비주의라고 비판받은 뉴턴에 대해 후세의 사람들은 그의 광학적 체계가 신학과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만유인력을 물리학적으로 가시화시킨 것도 뉴턴이다. 


뉴턴 이전에는 중력(gravity)이 단지 ‘무거움’을 뜻했지만, 이후에는 만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신비한 힘으로 간주 되었다. 즉 근대를 연 이 걸출한 과학자는 신이라는 오래된 관념 없이, 작용하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했다. 보이는 것만 인정받는 시대에, 이러한 목표는 현대 예술가도 공유할만하다. 빛의 3원색을 물질화한 리경의 작품 또한 근대 물리학에 빚을 지고 있다. 뉴턴은 빛/색도 분석적으로 분해했다. 프리즘을 통해 서로 다른 굴절률을 가진 색을 가시화했던 뉴턴의 실험에 의하면 적색과 보라색은 진동률이 다를 뿐이다. 제임스 글릭은 물리학자 뉴턴이 아닌 철학자 뉴턴을 부각시킨다. 그에 의하면 삶과 죽음의 과정을 조사한 뉴턴은 세계가 끊임없이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 이렇게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세계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은 적극적인 영혼, 즉 자연의 보편적 대리인인 비밀스런 불일 것이라고 추론 한다. 뉴턴은 이 영혼을 빛과 동일시했으며, 나아가 빛을 신과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다. 


빛처럼 오묘하게 만물에 고루 미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확신한 뉴턴은 빛을 ‘빛나는 물질에서 방출되는 아주 작은 물체’라고 정의한다. 뉴턴의 [광학]은 빈 상자 안의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제 1 동자(prime mover)을 가정할 수밖에 없다. 기독교 교부들에게 제1동자는 오로지 신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제임스 글릭은 뉴턴이 신을 의무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이해의 기틀로서 믿었다고 평가한다. 뉴턴에게 살아있는 강력한 신은 만물을 지배하며 모든 곳에 편재하고 사물의 빈 공간을 메운다. 제임스 글릭은 뉴턴의 [광학]이 우주론과 형이상학까지 포괄한다고 본다. 광학과 신학을 오고가는 근대의 사고는 빛을 담은 리경의 ‘상자’들에 내포된 초월적 측면을 드러나게 한다. 리경의 작품에서 빛을 담은 사각형은 한계 지어진 전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영원의 상(相) 하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전체, 즉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 본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라고 서술한다. 


한계를 정하는 것은 미의 영역이지만, 한계가 있음으로서 바깥의 존재가 암시된다. 이번 전시에서 여러 방식으로 나타나는 엄격한 사각형 용기들은 경계짓기를 통해 바깥을 암시한다. 장 뤽 낭시가 말하듯이, 탈경계는 숭고의 영역이다. 탈경계의 움직임 속에서 바깥이 잠시 열린다. 바깥은 ‘자연이 아닌 자유’(칸트)의 영역이다. 숭고는 ‘인간이 열림과 접하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의 양태’(엘리안 에스쿠바, [숭고에 대하여]에 수록된 논문 중에서)이다. 엘리안 에스쿠바에 의하면, 숭고는 벌어진 심연이 아니라, 환한 열림. 뇌우나 대양이 일으키는 폭풍, 바야흐로 도래하는 어떤 것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나타남, 그와 같은 도래에 의한 황홀에 대해서는 인간은 안전하지 못하다. 그렇지만 ‘바깥과 닿는 강렬한 느낌’(장 뤽 낭시)는 남는다. 이 전시에서 빛을 담으려는 불가능한 방식은 빛을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타협책을 낳았다. 작품은 일종의 빛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덫인 셈이다. 빛은 매순간 작품 표면을 스치면서 언뜻언뜻 자신을 보여준다. 그것은 세상의, 생명의 축도로 다가오며, 담을 수 없는 것을 담는 리경의 방식이다.

  


출전; 예화랑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