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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 이미지의 순환

이선영

이미지의 순환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용진의 최근 작업의 소재가 된 인물들의 면면은 대부분 위인전에 나올 법한 위대한 인물들이다. 백범 김구, 파블로 피카소, 스티븐 호킹,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등 동서양의 예술가, 과학자, 애국지사 등이 두루 포진되어 있다. 정보화시대의 중요성을 암시하듯 관련 업계의 거물은 여럿이다. 김용진이 입체에서 평면으로 작업 방향을 바꾼 이래, 액자 안팎에 안치되는 이미지에 대한 집중도는 더욱 커졌다. 360도 방향으로 관람할 수 있는 조각에 비한다면 전면이 중요해졌다. 무엇인가 전면으로 배치될 때 가장 밀도 있게 다가오는 소재 중 하나는 초상이다. 얼굴은 작은 면적 안에도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이 작은 면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변화도 놓치지 않고 포착해왔다. 2000년대 초반에는 시멘트, 나무, 철사, 동선 같은 여러 재료를 사용하여 마치 만다라처럼 중심을 찾아가는 정신적 여정을 표현했다면, 이후 다른 재료들은 점차 사라지고 금속 선을 평면에 꽂아서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변화한다. 조각-설치작품에서 평면으로의 변화이다.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스타일의 작업을 수년 전 보았을 때, 어릴 적 하교길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했던 길가의 뽑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못이 박힌 평면을 기울여 놓고 작은 공을 굴리면 무엇인가 선택되는 게임이다. 단축적이기는 하지만, 미로처럼 어떤 여정을 거친 후 소중한 것을 얻는 과정이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물론 ‘꽝’도 있었다. 중심은 비어있는 경우가 더 많다. 수학자들이 0의 중요성을 말하듯이, 현대의 철학은 중심의 비어있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중심은 그것을 향한 의지를 만들어낸다. 굳이 중심에서 무엇인가를 찾지 않아도 과정 속에서 얻는 것이 더 많다. 인생뿐 아니라 예술 자체가 그렇다. 마르셀 뒤샹처럼 현대미술의 한 장면에 결정적 한방을 날린 대가나 말년을 체스로 보낼 수 있다. 예술가가 추동하는 것은 잡힐 듯 말 듯 자신보다 조금씩 앞서가는 미지의 목표, 즉 끝없는 욕망이다. 예술은 욕망을 초월한 것이 아니라 욕망과 가장 밀접하다. 생물학적 욕구와도 다른 욕망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상수이다. 이러한 욕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단지 끝이 없을 뿐이다. 


김용진의 새로운 ‘만다라’는 이전보다 지름길을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하는 소재들은 이전의 만다라처럼 여러 겹을 가진다. 보이지 않는 중심을 찾아가는 미로와도 같은 긴 여정을 한정된 테두리 안에 접어 넣는 밀도 있는 방식이다. 위인이란 그의 길을 따라가고픈 욕망이 드는 사람을 말하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하나일 수가 없다. 누구도 똑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김용진의 작품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려 하는 경제적 방식이 아니라, 거듭해서 읽어내야 하는 중층적 텍스트에 가깝다. 위인들이란 거듭해서 해석되는 인물이다. 위대한 인물은 후세의 거듭된 해석들의 결과이며, 해석은 시대와 개인에 따라 달라진다. 인물의 위상은 역사적으로 변한다. 그가 붓이나 물감처럼 사용하는 금속 선을 펜촉과 비유하자면 위인전은 방점을 달리하여 다시 쓰여질 것이다. 김용진이 인물과 함께 즐겨 선택하는 도자기도 마찬가지다. 도자기는 일회용 용기를 비교할 수 있다. 만약 그 도자기가 오래된 문화재급이 아닐지라도 흙으로 빚은 것과 플라스틱 일회용품과는 차이가 있다. 


전자가 사물에 가깝다면 후자는 상품이다. 물론 상품도 시간이 지나면 사물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20세기 초기에 생산된 음료수병이나 화장품 용기 같은 것, 한때 대량생산된 것이지만 개별적으로 간직해온 오래된 물건들이 그것이다. 또한 빈티지풍의 물건처럼 처음부터 오래된 사물의 기표를 둘러쓰고 출시되는 상품도 있다. 물론 김용진의 작품은 실제 도자기가 아니라 그 이미지다. 그는 원래의 그 판판한 이미지에 부피를 부여하여 두툼하게 만든다. 3차원적인 조각만큼은 아니지만, 금속 선으로 이미지의 음영을 따라가면서 꽂아 그의 인상을 입체화한다. 인물도 마찬가지지만, 그 이미지의 참조대상이 가졌을 아우라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복구한다. 즉 현재화한다.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개진한 바처럼, 복제를 통해서 사라지는 것은 대상 고유의 분위기, 즉 아우라이다. 옛 사진을 보면 그 시대만의 공기가 채워져 있음을 느끼게 되는데, 기술로 복제하기 힘든 것은 그러한 분위기이다. 아우라는 이전의 종교화에서 성인들의 머리 뒤에 그려졌던 후광이 했던 역할을 수행한다. 


벤야민의 이론에 의하면, 복제를 통해서 실제 제작된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가 후에 강조했듯이, 사진을 비롯한 복제 매체가 사라지게 한 아우라를 최후까지 간직한 것이 바로 초상사진이다. 특히 죽은 이의 얼굴 사진이 그렇다. 김용진의 최근 작품을 보면 빌 게이츠 외에 다 사자(死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의 경우 거의 유물이다. 그러나 국보급 도자기를 실제로 만질 수 있거나 빌 게이츠를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 고로, 보통사람으로서는 그러한 대상이나 인물 또한 이미지로만 존재할 것이다. 작품에 인물이 있건 도자기가 있건, 앞만 있는 납작한 이미지 중에서 아우라를 간직하는 소재를 선택하고 거기에 다시금 공기를 머금을 수 있는 얇은 공간을 조성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이렇게 평면으로부터 벗어남으로서 이미지는 다시 실재감을 부여받는다. 짧게 머리를 깍고 턱수염이 수북한 스티브 잡스 초상의 경우, 캔버스같은 평면에 꽂힌 수많은 금속 선들은 최초의 이미지보다 더 풍부한 질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정보가 넘쳐 나는 시대, 어떤 정보든 도매금으로 처리되는 것이 사실이다. 일순간의 인상으로 파악되고 분류되고 통계화되며 활용되고 폐기된다. 모르긴 몰라도 긴 정보를 요약에서 한 번에 파악할 수 있는 정보로 가공하는 직업도 있을 듯싶다. 글, 영상, 사진, 소리 등등 할 것 없이, 누군가 다루기 쉬운 하나의 차원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그것도 노력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현실로부터 나온 것들을 코드화시키는 작업에는 단순화와 환원이라는 메커니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거의 ‘요약봇’같은 이러한 존재가 미래의 지식을 선도할 것인가. 간단한 방식으로 현실은 2차, 3차 가공물이 현실을 대체하면서 굳이 현실로부터 무엇인가를 건져내는 노고들이 생략될지도 모른다. 정보1에서 정보 N으로의 무분별한 전환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한 작업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부류의 고루한 심신의 상황이 반영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살아있는 단말기 수준으로 축소된 현대인의 상황이 그렇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정보들은 무심하게 대중/소비자의 손끝을 지나치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렇게 떠도는, 즉 공기처럼 편재하는 정보에서 한 가닥을 뽑아내 코드화할 수 없는 무엇을 만들어낸다. 이미지를 다시 물질화하는 과정에서 이미지는 변화한다. 김용진의 작업을 화가의 그것과 비유한다면, 다양한 크기의 붓을 구비해 놓고 그에 맞게 칠하는 과정과 비교될 수 있다. 다양한 크기의 금속 선들은 그가 선택한 이미지를 다시 고정하는데 사용한다. 다만 그 과정이 복잡하고 중층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대상을 관념화할 때와는 차이가 있다. 어떤 이미지를 벽에 고정시키려면 단 한 개의 못으로도 가능하다. 그렇게 단순하게 고정된 것은 고정관념을 만들 것이다. 그것은 본질을 터무니없이 단순화하는 것이기도 하며, 가학적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인상은 여러 상황에서 복합적으로 형성되어야 한지만, 대개 한두 장면으로 그 사람을 고정시키곤 한다. 한번 각인된 인상을 수정할 기회는 잘 돌아오지 않는다. 사회생활 뿐 아니라 사적 취향 또한 마찬가지다. 가령 새도매저키즘(sadomasochism)은 살아있는 대상을 자신의 욕망에 맞춰 고정하는 놀이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김용진이 어떤 이미지를 고정하는 과정은 여러 개의 붓이 필요한 화가의 작업처럼 복잡하고 섬세하다. 최초의 방향성만 있지, 작업 속에서 그때그때의 감흥과 밀접한 열린 작업이다. 사진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분석처럼, 푼크툼(punctum)/스투디움(studium)의 관계가 작동한다. 그가 선택하는 소재들은 대부분 진부해 보일 정도로 흔한 이미지들이다. 즉 문화적 관행에 호소하는 스투디움이다. 문화재나 골동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도자기들이 대표적이다. 피카소는 화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며, 김구는 한국인이 가장 존경할 법한 인물이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로 말하자면, 미디어업계에서 쌍벽을 이루는 존재다. 그러나 선택된 소재가 임의적이지는 않다. 소재의 선택 자체가 자신을 찔러왔던 것(푼크툼)이다. 작업과정은 말 그대로 찌름의 연속이다. 작품을 통해 푼크툼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흑백 사진을 바탕으로 한 김용진의 작업과 이진법으로 이루어진 정보의 세계는 어딘가 유사하다. 그의 작업은 지독히 아나로그적이지만, 이미지를 포함하여 온갖 자료들의 출처가 컴퓨터이며 이러한 매체를 활용하여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다시 컴퓨터를 매개로 소통될 것임을 보여준다.


출전; 월간미술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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