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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강 / 빛이 칠한 색깔

이선영

빛이 칠한 색깔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성강의 작품은 언뜻 그림 같은, 때로는 판화 같은, 특히 조립자로 처리한 작품들은 유화 같은 느낌까지 준다. 대상이 모호한 경우에는 추상화, 최근 인기 있는 단색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전시되는 60여 점의 작품들은 붓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다. 50-80호 크기로 출력된 사진이다. 현대미술에도 큰 빛을 던져준 철학자 질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코드에 기반을 주는 손가락적인 것과 돌발흔적이 생성되는 손적인 것을 구별함으로서 회화, 특히 추상적이지 않은 회화를 옹호한 바 있는데, 작가의 직관을 보다 용이하게 구현하는 기계의 등장은 이러한 구분을 차츰 무색하게 한다. 서성강이 사용하는 카메라나 컴퓨터 같은 기계는 육체의 조건에 보다 근접해 가고, 가상현실에 포위된 몸은 오히려 둔화되는 추세이다 보니, 어떤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예술의 주요 과업은 코드로부터 탈주하는 것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코드화의 속도와 범위가 넓어짐으로 인해, 그와 연동되는 탈 코드화 또한 순발력이 요구될 따름이다. 





 서성강의 작품은 ‘이게 뭐지?’하는 궁금증으로 몰래 작품 표면을 만져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형식적으로 너무 절묘한 작품들은 관객들에게 진입장벽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진을 흉내내는 극사실주의 회화 앞에서 관객들은 화가의 기술력과 노동에 감탄하는 것에 머물곤 한다. 그렇다면 그림을 닮은 사진작품은? 이에 대한 대중의 욕구에 답하기라도 하듯 직접 찍은 사진을 그림 풍의 이미지로 자동으로 바꿔주는 스마트폰 프로그램도 있을 정도이다. 이전에 예술이었던 것은 기술의 매개를 통해 오락이 된다. 기계를 활용하는 기술도 심화 되면 통상적으로 활용되는 기법을 넘어설 수 있다. 붓과 마우스는 모두 작가의 손이 연장된 기구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자연의 정확한 재현은 물론이고, 작가의 심상에 있던 색감이 자유롭게 입혀진 자연물들은 최소한 어떤 부류의 화가들에게는 ‘내가 힘들게 왜 그리고 있지?’ 하는 자괴감을 줄만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스펙터클의 홍수 속에서 그림의 정체성을 찾느라 힘든데 말이다. 


 그러나 섬세한 레이스나 비단결 같은 피부를 그대로 재현한 이전 시대의 대가들의 작품 또한 새로운 세대의 화가로 하여금 위대한 회화적 전통에 무엇을 더 첨가할 수 있을지 회의하게 할 것이다. 경이로움과 자괴감을 동시에 주는 그러한 명화는 대개 가까이 볼 수 없다. 명화의 사진적 재현을 통해 대가들의 놀라운 회화술을 보다 분석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사진술은 기존의 그림을 보는 방식도 변화시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원작이 있는 그곳까지 가야 할 필요가 없는 가상 현실화된 전시장은 이전 시대 물질적 육체적 존재의 산물들을 코드화할 것이다. 그러나 원작은 다양한 형태의 파생실재(Hyperreality)의 든든한 참조 점으로 인정되고 관리될 것이다. 서성강의 작품이 동시에 걸쳐 있는 듯한 사진과 회화의 관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시각의 역사에서 카메라가 등장한 근대부터의 문제였다. 그러나 시각성이라는 맥락에서 본다면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의 원리가 이미 알려진 수 천 년전 까지도 소급될 수 있다. 





 그러나 양자는 동일 시 되기보다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한 채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화가에게도 사진은 작업을 진행하는데 중요한 보조기구가 되고, 사진가에게 회화, 특히 대상이나 의미를 지시하는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나는 현대회화의 자율성은 참고가 되어준다. 때로 사진은 개념미술같이 텍스트와 결합 된 관념적 유희의 도구로 활용되곤 한다. 사진이 흔해진 시대, 사진 역시 자동화된 이미지의 생산으로부터 자신의 자율성을 주장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특히 자율성의 문제는 서성강에게 매우 중요했다. 작품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인 인간이 등장하는 사회적 풍경을 찍어오던 그가 추상회화를 떠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변신한 결정적 이유는 피사체로서의 자연은 인간보다는 자유롭게 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인간은 자연도 자기화 시키려는 온갖 노력을 하지만 말이다. 인간이 이름 없는 자연을 명명하고 분류하고, 때로는 유전자 차원의 정보까지 털어서 특허권을 통해 사유화하고 독점하는 등의 일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자연은 인간 중심의 생산력을 위한 자원으로 착취되어 왔던 것이다. 소재주의 차원에 머무는 예술 또한 특정 자연적 대상을 어떤 작가만의 사유물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이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은 우회로와 지름길을 포함하여 수많은 방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길을 정해놓고 가야 하는 경쟁적 과정을 벗어나는 그 길은 자유롭다고 여겨진다. 사진을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 또한 예술에 허락된 수많은 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여정에서 사진인가 그림인가, 진짜인가 가짜인가를 물을 필요는 없다. 서성강은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온 기술과 감각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담을 수 있었지만,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저 회화의 흉내, 회화적 효과를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회화가 아닌 사진으로서의 그의 작품은 사진의 특징, 또는 강점을 살린다. 특히 정확한 형태의 재현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이 그렇다. 





 변형이 가능한 조건은 정확한 반영의 확보이다. 정확함이 확보되지 못한 변형은 피상적이고 지엽적이 되기 쉽다. 오늘날의 화가 또한 사진을 기본적 참조물로 여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록 그 사진의 정보를 시시콜콜 재현하지는 않아도 기억과 지각의 자료로 활용하는 것이다. 서성강도 정확하게 찍은 사진으로부터 출발한다. 대개 그의 원본사진은 초라하다. 작가는 그자체로 아름다운 형태와 색감으로 가득한 대상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위한 밑그림이 될 만한 소재에 주목한다. 자연이 모노톤으로 조율되기 시작하는 계절은 색채의 유희를 위한 이상적인 출발점이 되어준다. 그의 작품은 빛이 칠한 색깔이라는 점에서 자연과 예술을 수렴한다. 그가 찍은 자연에는 오래된 사물 같은 모습을 띄는 것들도 있다. 방치된 금속판에 죽은 채 붙어있는 어패류 껍질 등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조율하고 색감의 변환 등을 통해서, 최초의 대상은 급격하게 변화한다.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소재도 많다. 하지만 대상의 형태를 만드는 선적 요소는 살려진다. 


 거리와 각도의 다양한 변주 또한 사진이 가지는 장점이다. 자연의 형태를 이루는 선적 요소는 많은 후처리 과정에도 살아남아 자연의 오묘한 형태와 질감을 재현한다. 서성강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게 그리는 화가도 그 부분만은 그대로 남겨두고 싶은 자연의 형태에 집중한다. 가령 양분과 수분과 빛이 만나는 통로인 식물의 줄기나 나뭇가지들은 에너지가 분배되는 과정을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물감을 붓에 묻혀 손을 포함한 자신의 육체를 움직이는 그리기의 과정과 조응한다. 재현이면서도 자연의 과정이 중첩되는 몇몇 안 되는 소재를 ‘사진가’인 서성강도 주목한다. 숲은 위아래로 자유롭게 그어진 선들로 나타나며, 바람이 지나가는 보리밭을 푸른색으로 처리하여 마치 작품 속 섬유질이 바닷속의 물고기 떼의 움직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말라 죽은 채 서 있던 들판의 풀들은 해초가 되고 물고기 떼가 되어 추상적 공간 속에 물결친다. 지나가는 바람에 머리를 숙이는 식물은 자연의 내재율을 보여준다.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 자연의 선적 흐름은 색감의 변환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같은 대상이 여러 색감으로 변화함으로서 시리즈 작업으로 진행되기도 하고, 한 피사체를 여러 장면으로 나누기도 하며, 한 부분을 확대하여 다른 작품으로 완성하기도 한다. 작가는 자유로운 구성적 실험을 통해 자연의 절묘한 구석을 발견한다. 찍은 사진은 찍혀진 사진이 될 정도로 전면에 다시 배치할 만한 세부들이 존재한다. 작업이란 잠재력이 풍부한 세부를 현실화하는 과정이다. 컴퓨터 화면에 이미 선택지로 배열된 색채를 입히는 과정은 뭔가 반칙 같은 느낌도 든다. 작가라 함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색을 창조해야 하는 것 아닌가. 팔레트에서 색을 섞는, 아니면 화면에서 직접 물감들을 비벼서 만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색은 그만의 색이 되곤 한다.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다면, 더 나아가 자신의 작품에 최적화된 프로그램이 있다면 창조와 선택은 큰 차이가 없어진다. 


 서성강의 작품에서 회화적 느낌을 주는 색채변환 또한 자연에 이미 있는 과정이다. 요즘 한국은 봄가을이 짧아져서 어느 날 갑자기 푸른색 잎들이 울긋불긋하게 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자연의 극적인 색채 변화는 연금술적인 변화가 아니라, 이미 잎 내부에 있는 색소의 배열이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물론 이때 빛의 작용은 중요하다. ‘빛으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의미가 있는 사진 역시 빛은 중요하다. 다이앤 애커먼은 [감각의 박물관]에서 색채와 빛의 관계를 말한다. 그는 햇볕이 그 황금빛 칙령으로 살아있는 것들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식물의 잎 색을 예로 든다. 색이 변하는 나뭇잎은 처음에는 녹색을 유지하다가 엽록소가 점차 파괴되면서 노랑과 빨강의 반점을 드러낸다. 서성강의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보색 대비를 비롯한 강한 색감의 대조이다. 그가 이번 전시 작품에서 보여주는 야광 빛이 입혀진 자연조차도 자연에 없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비해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조형적 선택 또한 발명되기보다는 발견되는 것이다. 카메라나 포토샵 같은 기계를 활용하는 것은 예술적 ‘창조’보다는 발견과 선택의 과정을 강조한다. 그러한 기술적 편의성은 예술가에게 전에 없던 자유를 부여하기도 한다. 서성강은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의 빛 아래에 있는 자연을 선호한다. 단풍으로 절정을 이룬 후 모노톤으로 변화하는 자연은 이후의 작업을 더욱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기계는 자연적 과정을 구조적으로 모사한다. 색채 변환 또한 그렇다. [감각의 박물관]에 의하면 여름의 엽록소는 열과 빛에 파괴되지만 꾸준히 대체된다. 가을에는 새로운 엽록소가 생산되지 않는다. 대신에 잎새 속에 있었으면서도 엽록소의 강한 녹색에 가려 보이지 않던 다른 색이 드러나게 된다.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나거나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들이 가려진 채 있다가 비로소 가을빛에 반응하여 선명한 색깔이 나오는 것이다. 


 다이앤 애커먼에 의하면 지구상은 모든 것이 고유의 깊고 풍부한 색채를 띤다고 생각하지만 폭죽처럼 아무리 요란한 색깔로 보인다 해도 그 위를 덮고 있는 것은 아주 얇은 껍질, 즉 색소의 층에 불과하다. 색소를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교묘한 속임수로 풍부한 색깔을 자랑하는 것들도 많다. 다이앤 애커먼은 다양한 동물의 위장 색이나 대양과 하늘이 빛의 산란으로 푸르게 보이는 것 등의 예를 든다. 작가는 이러한 진화와 계절의 변화로 나타나는 자연의 과정을 단축하여 몇 초 만에 수행한다. 물론 오랜 숙고의 과정이 먼저 있는 것이지만, 이제는 피사체를 찍는 과정부터 어떤 색채로 변화시킬지에 대한 직관이 작동한다. 사진이든 컴퓨터든 인간의 발명품은 자연의 모사인 것이다. 자연의 피상적 모사가 아니라 법칙의 발견을 통한 구조적 모사에서 카메라나 컴퓨터 같은 기계는 인간의 직관을 실현하는데 있어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한다. 





 색감의 극적인 전환 외에 작가는 입체감도 변화시킨다. 최초에 찍힌 사진의 입체감을 약화시켜 추상회화같이 만들거나, 평면적인 장면에 입체감을 다시 부여해서 낯선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갈색인 갈대가 녹색이 되거나 붉은 기운을 입고 불이 붙은 듯 또는 꽃으로 피어나는 듯 한 변주가 가능하다. 무기물에 가까운 유기물, 가령 조개나 굴 같은 어패류의 흔적들은 화사한 색을 입고 다시 태어난다. 굴의 내용물처럼 뭉글뭉글한 형태들은 앙포르멜 추상같은 방식으로 변주되며, 조개같이 형태가 보존되어있는 단단한 피사체는 그 칙칙한 색을 벗고 오색 보석 같은 결정체로 변모하곤 한다. 자연은 오래된 사물처럼 시간의 흔적을 스크래치 된 회화 같은 효과로 표현된다. 녹슨 철판에 다닥다닥 붙은 죽은 조개껍질이라는 최초의 대상은 화려한 색감으로 재탄생한다. 평범한 갈대밭이나 보리밭, 꽃과 나무 등은 인상파나 점묘파, 표현주의 등등의 어법으로 다시 만들어진다. 강약이 분명한 서양 회화뿐 아니라, 수묵화같이 잔잔한 분위기의 작품들도 있다. 


  완만한 구릉과 산, 구름과 해가 있는 작품에서 바람 부는 갈대밭 풍경은 여백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다. 공원의 나무들에서 출발한 작품들은 환상적인 면모도 있다. 자연의 형태나 배치는 거의 그대로 남겨두는 사진적 과정에서 실제에 숨겨진 환상적 부분이 스르르 풀려나온다. 그는 원래 대상의 배치는 그대로 남겨두기 때문에 이후의 조형적 선택은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실제보다 그림자를 더 크게 포착한 나무를 표현한 작품에서 자유로운 유희가 가능한 허상의 몫은 더 크다. 사진이 그림에 비해 사실에 더 충실하다는 생각은 사진과 지시대상과의 밀접한 관련성 때문이었다. 서성강이 찍은 다양한 종류의 자연은 사진이 세계를 발견해왔던 위대한 매체였음을 알려준다. 시뮬라크르의 시대에도 그러한 믿음은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보이는 대상은 보는 주체를 전제하며, 양자 간의 상호작용이 중시될 때, 사진 또한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졌던 현대미술이 했던 고민을 공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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