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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주 / 한 떨기 꽃송이 속에 축약된 세계

이선영

한 떨기 꽃송이 속에 축약된 세계 

  

이선영(미술평론가)

  

 바탕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 같은 꽃들은 마치 식물을 이루는 미세한 구성요소들, 가령 세포의 단위로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90년대 중반부터 그린 꽃 그림들의 연장선상에서 그려진 2000년대 이후의 꽃 그림들은 털 3개짜리 붓으로 그려진 세필화를 포함하고 있다. 마치 중세의 수도사들이 신의 말씀을 세상에 전달하기 위해서 제작한 정교한 필사본들처럼, 인간의 인내와 한계를 시험해 보는 듯하다. 그는 폴리스티린으로 된 싸구려 분홍색 바구니를 무리 지어 꽃 모양으로 배열해 놓는 식의 오브제 작업을 통해서 재현을 위한 극한적 몸짓들에 대한 유쾌한 반전을 꾀하기도 한다. 가장 화학적인 색채만을 고정시킬 수 있는 플라스틱의 특성을 십분 발휘하면서 모조와 복제의 미학을 입체의 차원에서도 구현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현대의 신화]에서 플라스틱이 단순한 실재의 그림자가 아니라, 실제 자체를 구성해가며 모든 것을 대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더 나아가 세상의 어떤 광맥보다 더 풍요로운 이 인공적 소재가 자연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기능을 대체할 것이고, 형태들의 창조까지도 지배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실체들의 위계는 사라졌고, 오로지 하나만이 모든 실체를 대체한다. 즉 세계 전체는 플라스틱화 될 수 있고 자연 또한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뻔한 외양을 가지는 대중문화에서 유치찬란한 장식성을 찾아낸다. 김홍주의 작품에서 장식성은 또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그의 작품에서 플라스틱 파편들은 단순히 그 자체로 주목되기보다는, 만다라 같은 형태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주면서, 표면에서 발생하는 심연을 느끼게 한다. 똑같은 모양의 바구니를 둥글게 배열함으로서 표면에서 발생하는 소용돌이 같은 환영이 어지럼증을 자아낸다. 그의 플라스틱 오브제 작품은 모든 자연을 점령해가고 있는 시뮬레이션 문화에 닿아있다. 그러나 김홍주는 회화만큼 오브제 작업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다. 


다시 회화로 돌아오자면, 중세의 수도사들이 어떤 상징이나 메시지를 위해서 작업했다면, 김홍주의 작품은 '의미의 공백을 주기 위한 것'(작가)이다. 하기야 한 작품에 몇 달씩 걸려서 작은 붓으로 반복적인 붓질을 하다 보면, 무엇을 왜 그리고 있는가 하는 기본적인 사항조차 사라지게 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마치 도를 닦듯이 모든 것을 비워내는 반복적인 작업들, 그것이 '그리는 행위 자체에 핵심이 있는 회화의 본질'(작가)인지는 모르겠다. 작가는 꽃이 단지 소재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 꽃들은 극한에 이르는 정성을 쏟아 창조한 우주 같은 상징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무 소반을 틀로 삼아 안에 웅크린 여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작품에서는, 억겁의 우주적 인연이 얽혀 잉태된 생명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대체로 그의 작품에서 식물들은 여성의 이미지를 가진다. 노랑 수술이 고개를 내미는 보라색 꽃, 분홍색 꽃잎 하나가 덩그라니 그려져 있는 것, 불꽃 모양의 분홍 꽃무리, 하늘색의 작은 꽃들이 무리지어 이룬 꽃들, 빽빽하게 꽂힌 꽃잎들 등, 꽃은 여러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심부에 모두 작은 심이나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자세한 재현은 오히려 대상의 환상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분명히 어떤 대상에서 출발한다. 종이 위에 검은 잉크 또는 색연필로 그린 작은 스케치들에서 나타나듯이, 실제 대상(꽃)을 종이 옆에 붙여 놓고 모사하기도 했다. 연두색 바탕에 갈색으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는 벌레 먹은 배추 잎의 자세한 묘사는 사생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주의가 어떻게 그토록 환상적일 수 있을까. 손으로 잡으면 연기처럼 푹 꺼져 사라질 것 같은 대상들을 바라보면서, 관객은 새삼 사물과 그것을 재현하는 언어의 마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현대에 와서는 습관적으로 회화의 종말이 회자되곤 했지만, 그리기를 최상의 기술로 가지고 있는 화가에게 아직도 회화는 많은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매체이다. 그의 작품들은 재현의 언어를 고수하지만, 그것이 새로움과 입증 가능한 진리로서의 리얼리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김홍주의 작품에 나타나는 현실성은 '균열이나 이음매 없는 현실과 올가미를 놓지 않고도 현실이 그대로 재현된다고 믿었던 행복한 시대의 기념물'(로브 그리예)을 벗어나 있다. 여기에서 리얼리티와 언어적 미술적 관습을 동등하게 취급된다. 오늘날의 화가들은 현실을 그대로 베껴낼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리기가 일종의 구성임을 인식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추상과 재현도 상반되는 범주라 볼 수 없다. 모든 미술은 추상적임과 동시에 무언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재현적이다. 미술은 외부세계와 나란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메시스와 환상fantasy도 동등한 비중을 지닌다. 캐스린 흄에 의하면 예술은 두 가지 충동의 산물이다. 하나는 미메시스로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사건, 사람, 상황, 대상을 모사하려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으로서 권태로부터의 탈출, 놀이, 환영, 결핍된 것에 대한 갈망, 독자들의 언어 습관을 깨트리고 주어진 것을 변화시키고 리얼리티를 바꾸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여러 매체가 발달한 현재에 회화의 묘사적 기능을 과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지 개블릭은 헤겔의 말을 빌어서, 현실은 인식과 관념의 매개체를 통과해야 한다는 관점을 피력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재현 방법이란 현실과의 유사를 넘어서, 인지법칙을 확립하기 위한 암호체계로 간주된다. 언어는 결국 여러 가지 용도를 지닌 도구이기 때문에 재현방법은 관습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재현이란 대상을 그대로 비추거나 모방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이며,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상징적 연관관계를 가진다. 회화적 언어의 자기반성을 꾀하는 김홍주의 작품에서, 회화는 사물의 단순한 모방이기 보다는, 나름의 질서로 사물을 분류하는 보이지 않는 체계가 내포되어 있다. 물론 현대 화가는 세계를 단순화시키거나 한정된 체계 속에서 재배열함으로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 속의 어떠한 사건도 결코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작품은 미술을 단순한 의사소통의 매개물로 생각하는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가지지 않는다. 언어를 표현의 수단이며, 동시에 작품의 주제로 삼는 경향이 현대예술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회화적 매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삼느냐, 아니면 매체를 그 자체의 목적으로 취급하는가 하는 마니교적인 선택을 피해 가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대상이 묘사를 결정하는 형상의 세계를 고수하면서도, 그림이 결국은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세계와 언어가 완전히 일치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세계와 언어와의 긴장을 외면하고 손쉽게 자의적인 의미체계 속에 갇혀 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작가는 현실과 언어의 간극 사이의 공간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의 수동적 반영도,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자족적인 체계만도 아니다. 현실은 근본적으로 비서술적이고 비재현적이지만,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고서는 접근할 수 없다는 절충적인 결론에 일단 만족할 수밖에 없겠다. 


김홍주는 꽃그림을 통해 세계든 회화적 언어이든 간에 어떤 체계를 벗어나, 어떤 근본적인 야생성을 표출하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소위 말하는 '리얼리즘'에 충실한 것 같지만, 그가 사용하는 재현 언어는 결코 중성적이거나 투명하지 않다. 실제 장미꽃은 그의 그림처럼 미세한 솜털로 덮여있지 않으며, 엽 맥이 그림 바탕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고, 대상과 배경이 그처럼 부드럽게 녹아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마치 꿈과도 같은 그 이미지들은 꿈과 그것의 재현과의 차이를 무마시키는 듯 하지만, 모든 대상은 스스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얼굴이 초상을 이루지 못하는 것'(플로베르)과 같다. 캐서린 벨지에 의하면 현대의 언어철학자들은 언어가 투명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구성된 사물들의 세계에 대한 메시지를 자율적 개인들이 서로 전달하기 위해 이용하는 단순한 매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언어가 개인들과 사물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언어의 투명성은 환상이다. 언어는 사고의 모방이 아니라, 사고의 조건이 된다. 의미의 생산이 가능해 지는 것은 오직 언어 내에서이다. 


더 나아가 언어는 '육체적 물질적 현실'(이글턴)이 된다. 김홍주의 작품에서 똥 모양으로 그려놓은 문자도 같은 것이 그 예가 된다. 그는 잡풀이 붙어 있는 흙덩이들이 띄엄띄엄 배열하여 사람의 형상을 만들기도 했다. 언어는 언제나 하나 안에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와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체계이다. 김홍주의 대상이 가지는 조형적 구조는 현상에 드러나는 의식적인 층을 통해 무의식적인 하부구조를 드러낸다. 그의 대상은 독립된 실체로서가 아니라, 무수한 붓질이라는 관계성을 지니며 전체적인 체계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작품이 언어적 결정주의의 덫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언어이지만, 언어는 고정적이지 않고 부단한 변화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에 작품들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다. 수많은 미세한 짜임새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언어가 가지는 무한한 생산성과 개방성을 보여준다. 


애초에 붓질이라는 행위에는 대상을 절단하고 정돈하는 두 가지 행위를 내포한다. 최초의 사물을 절단하여, 그 사물 속에 동적 단편들을 조직화하는 것,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는 단편들을 어떤 의미를 낳게 되는 단편들로 맥락화 시키는 것이 바로 화가의 작업이다. 그것은 어떤 대상을 신비롭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일이다. 화가는 실재의 것을 택하며 그것을 해체하고 재조직하는 자인 것이다. 결국 화가는 어떤 의미들을 풍족하게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의미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린다는 것은 벌써 세계를 조직화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의 구성요소나 구조 또한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변할 어떤 형태이다. 대상과 언어가 뗄 수 없이 미묘하게 섞인 김홍주의 그림은 그림의 형식이 내용이 흘러가는 상징적인 틀이 아니라, 내용의 형식으로 드러난다. 즉 형식은 끊임없는 자기 생산의 구조로서, 따라서 구조가 아닌 구조화로 파악된다. 


그의 꽃들은 견고한 실체감을 가지기보다는, 엷은 베일처럼 보인다. 대형 꽃도 손으로 그러쥐면 한줌도 되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은 그 너머로 더욱 진실 된 또 다른 세상이 숨겨져 있는 하나의 겉모습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전무결한 형상(본질)의 세계와 이를 모방한 세계, 즉 현상의 세계로 구분되는 플라톤 식의 이원적 세계의 단편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 재현, 또는 기록이라는 이원적 행위가 아니라는 것, 모든 그리기가 결국 사물을 그대로 베껴내기가 아니라, 구성임을 강조한다. 현실이란 인식과 관념의 매개체를 통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수지 개블릭이 주장하듯이 재현방법이 유사성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재현방법은 인지법칙을 확립하기 위한 암호체계라 할 수 있다. 재현이란 오브제를 그대로 비추거나 모방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이며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상징적 연관 관계라는 사실, 회화가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은 대상을 모방하기보다는 이를 분류하는 표현체계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현대의 작가들이 언어에 관심을 쏟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현실을 관찰하고 기호화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한 모사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일수록 역설적으로 현실의 불확정성을 드러내는 듯하다. 우연과 필연이 복합된 김홍주의 미세한 붓질들은 '우연이 우주에서 하나의 기본적인 요인이고, 자연관찰이 정확할수록 그 관찰은 법칙으로부터 불규칙함을 보여줄 것'(피어스)임을 강조한다. 현실이 상호 관련된 복합적인 리얼리티의 그물망으로 나타나는 그의 그림은 세계에 대한 참된 묘사로 자처하지 않는다. 화가들에게 현실은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저만치 앞서가는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예술이란 불가능한 재현의 추구라는 점을 역설한다. 그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무한히 반복하면서 회귀해야 하는 수수께끼 같은 기호에 가깝다. 객관성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인 형식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실로 보여지든 환상으로 보여지든 간에, 모든 것이 잠정적으로 계속 구성되는 것이자 개방적인 것이며 그럼으로서 자유로운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출전미상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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