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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건진 역사] <14·끝> 인류 역사의 창, 수중문화재

편집부

“수중문화재 약탈은 ‘인류의 과거’를 약탈하는 것”
우리 나라에선 한 해 1000여건에 달하는 크고 작은 발굴이 이뤄지고 있지만, 유독 바다에서 유물이 발굴되면 더욱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어릴 적 읽었던 ‘보물섬’이라는 모험소설 때문일까. 무언가 사연을 지닌 듯한 난파선에 대한 낭만적 신비감 때문일까. 난파선을 대하는 시각은 여러 가지다. 난파선을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려는 고고학자·역사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난파선 다이빙을 즐기는 레포츠 다이버들도 있고 일확천금을 꿈꾸며 재물만을 쫓는 보물 사냥꾼들도 있다. 육지와 비교했을 때 바다는 비교적 개발과 파괴로부터 멀리 비켜나 있어서 그 속에 잠긴 유물 또한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졌다. 스쿠바(SCUBA) 등 해중기술(海中技術)은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발달돼 수중으로의 접근을 가능케 해 주었다.

◇충남 태안 마도 인근해역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침몰선 마도2호선의 수중 발굴 조사 모습. 연구진들이 직접 잠수해 침몰선의 모습을 그리거나 촬영하고 있다.
해수면 변동으로 수몰된 선사인류의 정착지나 교역, 어로, 해전 등의 활발한 해상활동에서 기인한 수중유물 등 인류 역사에 관한 많은 물적 증거들이 바다 속에 간직돼 있다.
우리가 수중유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늦은 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한 어부의 그물에 몇 점의 청자그릇이 올라왔다.
700년 가까이 바다 밑에 머물던 유물이 그제야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게 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긴 잠에서 깨어난 이 난파선에 ‘신안 보물선’이라는 동화 같은 친근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엄청난 양의 유물을 토해내서 붙여진 별명이긴 하지만, 비로소 바다를 역사의 장(場)으로 인식하게 해 준 보물과도 같은 수중고고학 유물임에는 틀림없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육로 못지않게 바닷길을 통해서도 타지역과 활발한 문화적 접촉을 이뤄왔으며, 활발한 해상활동은 바다 속에 많은 증거와 흔적을 남겨놓았다. 우리 바다는 유럽의 지중해 못지않은 수중유물의 보고(寶庫)라 할 만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수중고고학과 같은 학문적 활동 외에 난파선 약탈과 같은 부적절한 활동도 초래하게 돼 있다. 국제적으로 수중문화유산은 심각한 위험에 놓여 있다. 유물을 노리는 ‘보물사냥꾼’들이 점차 바다로 눈을 돌리고 있고, 보상금이나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수중유물에 접근하거나 인양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시샤 군도의 수중 발굴 조사 모습. 갯벌이 없는 이곳에서는 수중 유물의 모습이 매우 잘 보여 발굴 조사에 유리하다. 그만큼 도굴의 위험도 높아 항상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1900년대 중반에는 난파선에서 인양한 귀금속과 암포라(amphora·그리스 도기)들이 암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거래되곤 했다. 이를 둘러싼 보물 사냥꾼들의 경쟁과 폭력이 심해져서 20여명의 잠수사가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프랑스에서는 이를 가리켜 ‘암포라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런 부정적인 일들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어서 수중문화유산은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는 1912년 처녀항해 중 떠다니던 유빙에 부딪혀 침몰했다. 수많은 생명과 사연을 담고 있는 전설의 난파선에서는 1987년 한 구난회사에 의해 1800여점의 유물이 인양되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호사가들에게 판매됨으로써 역사의 기록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현재는 캐나다, 미국, 영국 등 관련국들이 침몰선의 보호를 강화하고 있다. 1986년 영국의 한 구난회사는 인도네시아 해역에서 1751년 침몰한 네덜란드 상선 겔더말슨(Geldermalsen)호로부터 많은 금괴와 16만점 이상의 도자기를 인양하였다. 고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이 난파선은 인양의 대상이 아니어서 모두 파괴되어 버렸고, 인양된 물건들은 암스테르담에서 경매를 통해 판매되었다. 1999년에는 한 보물인양회사가 남중국해에 침몰한 옛 중국 상선 택싱(Tek Sing)호에서 30만점에 이르는 도자기를 건져냈으나, 1500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60여m에 이르는 난파선은 파괴되어 버렸다. 인양된 도자기들은 독일에서 경매되었으며,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러한 약탈과 상업적 발굴에 의한 훼손 사례는 셀 수 없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바다 속 난파선과 그 보물을 인양하려는 시도가 마치 미국 서부개척시대의 골드러시를 방불케 한다고 해서 ‘신(新) 골드러시’로까지 비유한다.
인류 공동자산인 수중문화유산을 약탈과 훼손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과 움직임도 활발하다. 비정부간기구인 세계기념물유적위원회(ICOMOS)는 1996년 수중문화재 조사의 표준을 설정한 ‘수중문화유산 보호와 관리에 관한 국제 헌장’을 채택했다. 또 수중문화유산 보호의 중요성을 인식한 유네스코(UNESCO)는 2001년 ‘수중문화유산보호협약’을 제정했다. 이 협약은 전문과 본문 35조 그리고 부속 규칙서로 구성되어 있다. 협약은 육상의 문화유산과 더불어 인류 공익자산으로서의 가치 및 보호를 위해 새로운 국제적 규범을 세우고 국가 간 협력을 강조한다. 또한 수중문화재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의 적절한 기준과 지침을 제시하면서 상업적인 발굴을 금하고 있다. 우리 나라는 아직 가입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북한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우리 주변 연안국들이 협약 제정에는 동의함에 따라 향후 이 협약은 동북아 해역에서 수중문화유산 보호의 기본 틀을 형성할 것으로 전망된다.
넓고 깊은 바다의 포용력은 인류의 과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재난으로 순식간에 수몰되어 버린 도시유적이 있는가 하면 사연을 안고 침몰한 무수한 난파선들이 있다. 이처럼 당시의 생활 한복판에서 그대로 역사 속으로 침잠해 버린, 마치 얼어붙은 듯한 유적과 유물을 땅에서는 만나기는 어렵다. 실로 바다는 생생한 박물관이며, 과거로 연결해 주는 창(窓)이라 할 수 있다. 훌륭한 자산을 물려받은 만큼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과제도 많다.

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수중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보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에는 수중문화재 보호 방안 등이 구체적으로 규정돼 있지 않다. 수중문화재의 실효적 보존을 위해서는 수중문화재의 개념, 적용 범위, 보호 방안, 발굴 제한과 조사자격, 국가 관할권, 담당 기구 및 기능, 타 법규와의 관계 등을 규정하고 수중고고학적 연구의 적절한 기준과 명백한 지침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수중문화재 전담 연구기관의 확충, 수중고고학 및 보존 전문가 양성, 첨단장비의 투입과 기술개발 등 국가 차원의 정책적 배려와 함께 정부 관련기관 간의 협의채널 구축, 민간 수중인력과의 협조망 구축, 민간인 교육프로그램 운영 등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수중문화유산은 어느 한 개인 또는 단체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 국민, 나아가 인류 전체의 공동 유산’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도록 해야 하고, 그 보존을 위해 모두의 지혜와 관심을 모아야 겠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이들과 학계 그리고 정부 당국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으고 관심을 기울인다면 수중문화유산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역사의 빈 공백도 훌륭히 메워갈 수 있을 것이다.


김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재보존과학센터장
-세계일보 2010.11.3
http://www.segye.com/Articles/NEWS/CULTURE/Article.asp?aid=20101102003719&subctg1=&subctg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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