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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서화협회회보書畵協會會報 원본 입수

편집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2010년 8월 23일부로 우리나라 미술분야 최초의 정기간행물로 서화협회가 1921년 10월 25일 간행한 <서화협회회보> 제1호인 창간호와 제2호의 원본을 입수하여 소장하게 되었다. 제2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간행되지 않았던 <서화협회회보>는 과거 고(故) 안춘근(安春根 1926~1993)선생이 198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한국근대미술자료전』에 출품한 이후로 원본이 공개된 바가 없는 자료이다. 그동안 관련 박물관이나 한국근대미술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원본이 아닌 복사본만을 참고자료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까지 희귀자료로 회자되어 왔다.
입수 당시 <서화협회회보>제1호 및 제2호는 원본 2권이 합본되어 있었으며 자료의 상태는 발행연도를 감안할 때 양호한 편이다. 본 박물관은 한 전문경매회사의 경매를 통해 자료를 입수하였다. 현재 이 원본은, 고 안춘근선생이 1984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출품했던 <서화협회회보>와 동일한 자료로 추정되어 의미가 더욱 깊다. 이러한 추정이 가능한 2가지 이유는 이구열의 『한국근대미술산고』(을유문화사, 1972년 초판 발행)의 내용, 그리고 1984년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이 전시 후 자료로 남긴 <서화협회회보>복사본에 근거한다.
(1) 미술사학자 이구열의『한국근대미술산고』中 ‘서화협회회보의 발행’에 대한 서술
: 이구열은 서화협회가 두 번째 협회전과 회보 발행을 전후하여 제3차 정기총회를 가졌으며 당시 협회 규칙이 대폭 개정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쓰고 있으며 그 근거로 서지 연구가이며 수장가인 안춘근의 장서 속의 <서화협회회보> 제2호에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종전처럼 인쇄된 협회규칙 전문 곳곳에 연필로 개정된 부분이 체크되어 있고, 저자는 정기총회에 참석한 어떤 회원이 개정이 통과될 때마다 연필로 수정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이구열,『한국근대미술산고』, 을유문화사, 1972, 128쪽 인용)
(2) 국립현대미술관이 복사본으로 남긴 안춘근의 <서화협회회보>의 본문 22쪽과 동일
: 본 박물관은 그동안 국립현대미술관이 1984년 자료로 남긴 복사본의 사본을 소장해 왔다. 이번에 입수한 제2호<서화협회회보>의 본문 22쪽에 실린 서화협회규칙 내용에는 직접 연필로 일부 조항에 수정이 가해져 있으며, 이 연필 수정 표시 또한 이구열 책에 명시된 규칙 개정 내용과 일치한다.

□ 書 畵 協 會 會 報
우리나라의 최초의 미술잡지 즉, 미술분야만을 내용으로 한 정기간행물은 일반적으로 1921년에 발행된 『서화협회회보』 로 규정하고 있다.
『서화협회회보』 창간호는 대정 10년(1921년) 10월 25일 경성 서화협회 발행, 홍방현을 발행인으로 하여 창간됐는데, 당시 가격은 40전이었다. 19.8X27.5㎝(4·6배판) 크기의 판형으로 제작된 이 책은 본문이 21쪽으로 되어 있으며 표지, 목차, 판권을 갖춘 정규 잡지이다. 판권이 있는 21쪽 바로 다음 페이지에 수록한 ‘회고(會告)’ 에는 6가지 항목을 나열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1년에 4회씩 발행하고자 한다는 내용과 편집의 경험이 없고 재료의 수집이 홀망(忽忙)하다는 표현으로 솔직한 고백을 밝히고 있다.
창간호 목차 바로 다음 페이지에는 창립 이래 회장을 역임했던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와 현 협회회장인 김돈희 4명의 초상사진을 게재했다. 본문 1쪽에는 회장 김돈희의 ‘창간의 사(辭)’와 각 명사들의 축사를 실었으며, 동경미술학교 교장을 비롯하여 김윤식, 이완용, 정대유, 김용진, 안종원 등 명사들의 축하 휘호 서화작품을 게재했다. 목차를 살펴보면, ‘창간사-김돈희’, ‘축사-정대현 외’, ‘서의 연원-김돈희’, ‘동양화의 연원-이도영’, ‘서양화의 연원-고희동’, ‘서가열전’, ‘화가열전’, ‘서도연구의 요점-김돈희’, ‘동양화의 강구1-이도영’, ‘서양화를 연구하는 길1-고희동’, ‘협회 제1회 전람회의 경과’, ‘협회의 기념 휘호회’, ‘예원휘보’, ‘협회의 연혁과 상황’, ‘회원 방명과 주소’, ‘회원의 동정’, ‘협회규칙’ 등을 본문 내용으로 실었다.
2호는 1922년 3월 15일에 본문 23쪽으로 발행되었으며 발행 예정일자가 1월 하순이었으나 “다소의 사정으로 인하야 이제야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짧은 ‘회고’란을 통해 밝히고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창간호의 연재물이 많았으며 김홍도(김용진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 정학수, 오세창, 이도영, 오창석, 고희동, 김은호 등 14명의 서화작품이 실려 있다.
서화협회보가 제2호로 중단되고 더 이상 간행되지 않은 이유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없으나『미술美術』창간호(1964년 6월)에는 “...재정난이었다고 한다”라는 글이 있다.
                                                                                                                                                                                   □ 書 畵 協 會
서화협회는 1918년 5월 19일 민족서화가 13인에 의해 서울에서 창립되었다. 이에 주도적인 인물은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었으며, 이 협회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이고 본격적인 민간 미술단체로서, 유럽의 Salon식 전시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미술잡지의 간행을 시도하게 된다.
고희동 외의 12인의 발기인들은 대부분 당시 화단의 중심단체였던 ‘書畵美術會(서화미술회)’와 ‘書畵硏究會(서화연구회)’의 교수들로서, 이 두 단체가 ‘서화협회’의 모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화협회는 창립을 기념하기 위해, 창립 1개월 뒤인 1918년 7월 21일 제1회 휘호회를 요정 태화관(太華館)에서 설행하였다. 모든 회원들과 서예에 뛰어났던 친일 귀족들이 참여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회원은 정회원·특별회원·명예회원으로 구분하고 일본인 회원은 배격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간섭과 후원금을 생각해 김윤식을 명예부총재, 이완용·민병석·김가진·박기양 등을 고문으로 선출하는 등 친일 고관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운동에 참가한 회원들이 투옥, 숙환 등으로 인한 회원의 사망과 회장 선출 문제 등으로 인한 내부 다툼으로 서화협회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게 된다.
1921년 2월 26일에 임시 총회를 열고 회장 선출과 회원들을 영입하여 협회의 재출발을 다짐했다. 서화협회는 같은 해 4월 1일부터 3일 까지 중앙학교 강당에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전인 제1회 ‘서화협회전’을 개최하였으며, 10월 25일에 협회의 기관지인 『서화협회 회보』 제1호가 발간되었다. 해외의 프랑스 소식뿐만 아니라 당시 회원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1호에 이어 2호에도 회원들의 동정을 알 수 있도록 게재되었다. 그러나 이 회보는 1922년 3월 제2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고, 서화협회전(약칭 협전)은 50여명을 넘지 못한 작가들을 주축으로 회원 및 비회원의 출품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36년 제15회전을 끝으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중단되었다. 서화협회의 창작활동에 주목하고 있던 조선총독부는 협전보다 1년 뒤인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제1회를 개최하였는데 이 선전은 1944년 23회를 마지막으로 폐지된다.
▪ 자료명 : <서화협회회보(書畵協會會報)> 제1호(창간호) 및 제2호
▪ 발행일 : 제 1 호 (창간호) _ 1921년(대정10년) 10월 25일
제 2 호 _ 1922년(대정11년) 3월 15일
▪ 발행처 : 경성(京城) 서화협회
▪ 발행인 : 홍방현(洪邦鉉)
▪ 창간주요인물 : 고희동(高羲東, 서화협회 총무)
이도영(李道榮, 서화협회 도서발행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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