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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건진 역사] <7> 고려시대 청자는 어떻게 운반했을까

편집부

나무막대·새끼줄 이용해 도자기 고정
짚·마른풀 사이사이 넣어 충격 방지
한 척의 배에 최대한 많은 짐을 실어 옮겨야 한다면, 물건의 포장과 적재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 점은 우리 선조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 바다에서 발굴 조사된 수중유물은 대부분 한 척의 배에 많은 물건들을 싣고 운반하던 도중 좌초된 것들이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유물은 고려청자다.
청자는 흙으로 빚어 유색을 입힌 후 높은 온도의 불에서 구운 것이다. 단단하고 물기가 스며들지 않아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에도 좋고, 색과 모양이 아름다워 장식품으로도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강한 충격을 받으면 깨지기 쉬운 물건이기도 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제법 값이 나가는 이 고려청자를 어떻게 포장하여 운반했을까.
도자기는 선박의 화물칸에 포장을 한 후 가득 쌓아서 옮겼다. 포장 재료는 나무막대와 짚, 갈대 등의 마른 풀, 새끼를 꼬아 만든 줄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포장은 그릇 종류나 값어치, 사용 방법에 따라 달랐다.
먼저 대접이나 접시 등은 대략 1m 정도만큼 포개서 포장했다. 소나무 등을 잘라 만든 긴 나무막대 4개를 준비한 후, 막대의 아랫 부분과 중간 부분을 새끼줄로 묶어 연결해 둔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무막대 틀 안에 도자기를 하나 넣는다. 다음 도자기를 포개기 전에 그 사이에 마른 풀, 특히 짚을 넣어 충격에도 견딜 수 있게 했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 나무막대 틀 끝까지 올라가면 새끼줄을 단단히 묶었다. 운반하기 좋은 수량만큼 묶으면서 깨지는 것도 방지한 포장방법이다. 일정 단위로 묶인 도자기들은 선박에 눕혀서 쌓았는데, 역시 도자기 묶음 사이사이에도 짚이나 풀을 넣어 깨지는 것을 방지했다. 납작한 접시나 대접 등은 포개서 포장할 수 있지만 주둥이가 나와 있는 병을 같은 방법으로 포장하기는 어렵다. 고려시대 사람들이 기름 등의 액체를 담았던 작은 병을 유병이라고 하는데, 둥근 몸체와 목, 주둥이로 이루어져 있다. 유병은 기다란 나무막대에 주렁주렁 매단 형태로 포장됐다. 2개의 유병을 목 부분에서 갈대나 짚을 이용해 한번 묶어주고, 이것을 나무막대에 다시 묶었다. 선박에 적재할 때는 역시 일정 단위 묶음 사이에 완충재를 넣었다.
대부분의 그릇들은 같은 종류, 같은 크기끼리 묶어서 포장했는데 스님들이 사용하는 청자발우는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그릇을 한 세트로 포장을 해 특이하다. 발우는 대략 3∼4개로 이루어져 있고, 가장 큰 발우 안에 그보다 작은 크기의 그릇을 겹쳐 놓았다. 물론 여기에도 깨지지 않도록 사이사이 짚을 넣었다. 고려시대 발우는 항상 세트를 이뤄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포장한 것이다.
도자기들은 종류별로 많게는 70∼80개, 적게는 30∼40개씩 포개서 한 묶음으로 포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매우 중요한 도자기는 개별 포장을 했다. 귀중품으로 다룬 것이다. 2007년 태안 대섬에서 인양한 청자참외모양주자와 사자향로, 두꺼비모양벼루 등은 한 개씩 포장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포장이 끝나면 배의 화물칸에 적재를 하게 되는데 도자기를 적재하기 전에 배의 바닥에 짚을 두툼하게 깔아준다. 이는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완충작용을 주기 위한 것이다. 짚이 깔린 바닥에 한 묶음씩 묶인 도자기들을 차곡차곡 쌓는데 청자대접과 같은 크기가 큰 것을 먼저 놓고 그 옆으로 작은 기형의 접시 등을 끼워 넣었다. 한정된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쌓는 것을 마치고 나면 공간 사이사이에는 배의 흔들림에도 깨지지 않도록 다시 한번 짚을 넣어 준다.
도자기를 운반하던 선박에는 다듬지 않은 원통목들이 함께 발굴되는데, 이것들은 화물들을 고정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한 단이 적재가 끝나면 그 위에 다시 짚을 깔아주고, 이번에는 아랫단과 반대방향으로 적재를 한다. 이는 같은 방향으로 적재를 하면 배가 파도로 인해 움직일 때 아래 위 도자기들이 미끄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방향으로 적재를 하면 아래의 도자기들을 눌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많은 도자기들을 싣기 위해 어느 위치에는 세워서도 적재를 하였고, 중요한 도자기는 개별포장뿐만 아니라 적재공간도 따로 해 안전하게 운반할 수 있게 했다.
비슷한 시기 다른 나라는 어떤 방법으로 포장하였을까. 중국은 우리나라와 거의 동일한 방법도 사용하였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포장했다. 전남 신안군에서 발굴 인양된 신안선은 14세기 중국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국제무역선이었다. 신안선에는 중국의 가장 대표적인 수출품인 도자기 2만여점이 실려 있었다. 먼 바다를 항해하는 무역선이었기에 그만큼 항해 일수도 길고 파도가 높아 포장과 적재에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신안선에 실린 무역품들은 나무상자를 이용해 포장했다. 사각형과 원통형 두 가지 형태 나무상자에 도자기를 넣고, 빈 공간에는 나무를 넣어 고정시켰다. 이렇게 포장한 화물들은 먼저 배의 화물칸 바닥에 무거운 물건들을 싣고 그 위에 나무상자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나무상자를 쌓을 때도 무거운 것은 밑에 두고 가벼운 것을 위에 두었다. 배의 가운데 부분은 물을 담아두는 공간이 있어 많은 화물을 두지는 않았다. 이처럼 무거운 것을 밑으로 두고 가벼운 것을 위로 두어야만 배의 중심을 잡을 수 있고 높은 파도를 헤치며 항해할 수 있었다. 또 다른 방법은 중국 남부 서사군도에서 발굴 인양된 화광초 1호선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영선 국립해양문화재硏 수중발굴과
화광초 1호선에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방법으로 도자기들이 적재돼 있었다. 같은 종류의 그릇별로 포개서 포장한 것이다. 그런데 완충역할을 하는 짚이나 갈대는 보이지 않았고, 도자기가 움직이지 못하게 잡아주는 나무막대도 보이지 않았다. 화광초 1호선도 중국을 출발하여 동남아시아로 교역을 위해 사용한 배였기에 신안선과 같이 상자포장을 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상자포장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동하는 해역이 잔잔하기도 하지만 연안을 따라 항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수중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선박은 대부분 도자기를 운송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2009년 태안 마도에서 발견된 마도1호선은 도자기와 함께 벼·콩 등 곡식류가 주종이었다. 수중 유물 발굴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이제는 고려시대인들이 곡식을 운반할 때 어떻게 포장했는지를 규명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그러나 옛 선박에서 선조들의 숨은 지혜를 찾아내는 일은 항상 그랬듯이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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