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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국보순례] [31~40] 2009.10.29~12.31

유홍준

[31]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
박물관에 가면 '원(原)삼국시대'라는 표기가 있다. 이것이 한때는 국회 문방위에서 문제로 된 적이 있다. 왜 우리나라 박물관에는 삼한시대라는 표기는 없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바도 없는 '원삼국시대'라는 말이 나와 학생과 일반인들을 혼동시키느냐는 것이었다. 당연한 문제제기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고고학, 미술사학의 고민이다.
원삼국시대란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 한반도는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이 태동하여 바야흐로 고대국가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북쪽에는 부여·동예·옥저가, 남쪽에는 마한·진한·변한의 삼한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또 낙동강 지역에서는 가야가 성장한 까닭에 삼한시대도, 삼국시대 초기도 아닌 셈이다. 그래서 고 김원용 선생은 삼국 정립의 기원(起原·proto-type) 단계라는 의미로 '원(原)삼국'이라는 시대개념을 제시하였다.
원삼국시대의 특징을 보면 청동기시대의 상징이던 고인돌이 사라지고 다양한 묘제(墓制)가 공존하였다. 인간의 생활 습관 중 가장 보수적인 장묘제도가 바뀌었다는 것은 사실상 생활문화가 다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격적인 철기시대답게 무쇠로 만든 무기, 농기구, 마구(馬具)가 사용되었다. 철을 화폐로 사용한 듯 판상철부(板狀鐵斧)라는 도끼모양의 철괴도 있다. 생활문화도 풍부해져 창원 다호리(茶戶里) 유적에서는 각종 칠기와 붓이 나왔고, 전라도 광주 신창동 유적과 경산 임당동 유적에서는 현악기도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문화의 체질적인 변화는 무엇보다도 토기에 뚜렷이 나타났다. 야철술의 에너지 활용 기술을 토기 제작에 적용시킨 굴가마[登窯]는 1000도까지 올릴 수 있어 토기는 견고해졌다. 이것이 원삼국시대 와질(瓦質)토기라는 회색 연질(軟質)토기이며 나중에는 더 발전하여 경질(硬質)의 가야토기, 신라토기에로 나아가게 된다. 이런 변화는 AD 300년 무렵까지 지속되다가 삼국이 명실 공히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면서 문화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 과정을 원삼국시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32] 오리형 토기
오랜만에 박물관에 가본 사람들은 원삼국실에서 아주 특이한 토기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저런 그릇이 있었던가 의아해하곤 한다. 목이 긴 항아리에 한 쌍 또는 서너 개의 쇠뿔 모양 손잡이를 붙인 이른바 '쇠뿔손잡이항아리'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멕시코나 잉카의 그릇처럼 생겼다. 이것을 한때는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組合式牛角形把手附壺)'라고 어렵게 부르기도 했는데 실제로 쇠뿔 모양 손잡이를 항아리에 붙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손잡이의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항아리의 쇠뿔 같은 힘을 보여주기 위하여 쇠뿔을 위로 치켜세운 디자인적 과장이 들어 있다. 그래서 낯설어 보이는 것이다.
앞 시기인 청동기시대만 해도 제관(祭官·shaman)은 몸치장과 주술만으로도 위엄이 넘쳤다. 그러나 원삼국시대에 이르면 지배층은 제기 자체에서도 권위의 형식을 만들어 갔다. 그만큼 사회가 커지고 성숙한 것이다. 이런 원삼국시대 제기(祭器) 중에는 '오리형 토기'라는 아주 이색적인 그릇도 있다. 맵시 있는 오리 모양 그릇인데 높직한 굽이 있어 듬직한 느낌을 주며 등과 꼬리에 구멍이 있다. 이 토기는 제의(祭儀)에서 술 주전자 또는 퇴주 그릇으로 사용된 그릇이다.
토기의 몸체를 보면 분명 오리의 형상이지만 머리에 볏이 있어 한때는 닭 모양[鷄形] 토기라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경주 사라리 유적에서 오리의 물갈퀴가 표현된 것이 출토되어 오리형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리형 토기에서 아주 특이한 점은 오리의 눈을 사람의 귀처럼 옆으로 돌출시킨 것이다. 이런 추상적 변형으로 오리는 오리로되 신비로운 오리라는 느낌을 주면서 제의의 권위를 효과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때만 되면 날아왔다, 때만 되면 날아가는 청둥오리 같은 철새는 하늘나라의 메신저라는 생각에서 솟대 등으로 표현됐던 청동기시대의 전통이 원삼국시대에는 오리형 토기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토기는 1984년 영남대학교 바로 앞에 있는 압량동 고분에서 처음 출토된 이후 지금까지 김해, 창원, 울산 등 영남지방에서만 40여점이 발굴되었고, 출토지를 알 수 없는 것도 수십 점이 있다. 근래에 많이 발굴되어 이 오리형 토기는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33] 신라 금관
신라 금관은 현재까지 모두 6점이 출토되었다. 그중 5점은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155호분), 쌍분인 황남대총(98호분)의 북분(北墳)에서 발굴된 것이고 1점은 경주 교동에서 도굴된 것이다. 그중 교동에서 도굴된 금관은 둥근 테에 단순히 나뭇가지를 추상화시킨 출(出)자 모양의 세움장식[立飾] 세 개만이 붙어 있고, 나머지는 여기에 지그재그로 뻗은 사슴뿔 모양 세움장식이 한 쌍씩 덧붙어 있다. 이것이 신라 금관의 기본형으로 금판에는 수십 개의 순금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과 파란 굽은 옥[曲玉]의 달개장식이 달려 있다. 그리고 관테 양옆에는 귀걸이 모양의 드림이 두서너 가닥씩 곁들여져 있어 세계 역사상 나타난 어느 왕관(crown)보다도 화려하고 장엄한 구성미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신라 금관은 왕관이 아니다. 이 여섯 개의 금관은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반의 이른바 마립간 시대 유물로 이 시기 신라의 왕은 눌지·자비·소지·지증 등 김씨 4명에 불과하다. 또 서봉총은 여자의 무덤이고, 금관총은 15살 전후의 아이 무덤이다. 더욱이 부부합장의 황남대총을 보면 남자무덤(남분)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는데, 여자무덤(북분)에서는 오히려 금관이 출토되었다. 어느 모로 보나 신라금관은 왕관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또 금관은 피장자가 생전에 머리에 쓰던 것을 부장한 것도 아니다. 금관이 고분에서 출토되는 상황을 보면, 지금 박물관에 있는 것처럼 세움장식들이 활짝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 꼭짓점에서 세모뿔 모양으로 뭉쳐져 있었다. 게다가 금관의 테두리는 머리에 얹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골의 턱 아래쪽까지 내려와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근래에 신라금관이 시조(始祖)와 하늘에 제사지낼 때 제관(祭官)이 쓰던 것이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 경우도 왕관은 아니다.
본래 신라의 관모(冠帽)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비단이나 가죽 또는 자작나무로 만든 삼각형 고깔모자에 금·은·동의 새 날개 또는 쇠뿔 모양 장식을 달았다. 이런 점에서 신라 금관은 지배층의 위세품(威勢品)이었으며, 왕권이 강화되어 더 이상 거대한 무덤을 만들거나 금관으로 위세를 부릴 필요가 없어지고 불교가 공인되는 6세기 법흥왕 이후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34] 신라의 황금
신라는 황금의 나라였다. 신라는 금이 풍부했고, 가공기술이 뛰어나 일본 기록에 '눈부신 금과 은의 나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또 9세기 중엽의 이슬람 기행문인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dhibah)의 '도로와 왕국 총람'에서는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들은 이 나라의 이런 이점 때문에 영구 정착하고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신라의 황금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로 들어오고부터였다. 일제는 1918년 창녕 교동에서 9기의 고분을 2년에 걸쳐 발굴한 뒤 마차 20대와 화차(貨車) 두 대에 유물을 싣고 갔다고 한다. 그때 출토된 금동관, 금귀걸이, 금목걸이 등이 지금 도쿄박물관 오구라[小倉]기증실에 전시되어 있다.
일제는 장대한 신라 고분 하나를 왕릉으로 추정하고 발굴했다. 그러나 검 몇 자루만 나오자 실망하고 검총(劍塚)이라고 이름만 붙여놓고 끝내 버렸다. 사실 이들은 고분의 내부까지 파내려 갔던 것이 아니라 무덤 완성 후 제사지내고 묻은 겉 유물들만 발굴하고 그쳤던 것이다.
그러다 1921년 9월, 경주 시내 한복판인 노서동(路西洞)의 한 민가에서 증축공사를 하던 중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발견되어 긴급히 발굴에 들어갔다. 이 고분이 바로 금관총(金冠塚)이다. 금관총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순금팔찌 12점 한 세트, 금제 허리띠, 유리그릇, 굽은 옥[曲玉] 등 각종 금은 장식품과 토기가 1만 점이나 나왔다. 구슬만 별도로 3만 점이 있었다. 금제품의 총량은 7.5kg이었다. 신라의 황금 문화가 세상에 드러나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금관총이 있는 노서동은 본래 길 건너 있는 노동동(路東洞)과 한데 붙어 있던 신라고분 지역인데 한가운데로 길을 내면서 다른 동네로 갈라놓은 것이다. 금관총을 계기로 이 노서동과 노동동 일대의 신라고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후 서봉총(瑞鳳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의 발굴로 이어졌다. 그리고 발굴 때마다 수많은 순금 장신구들이 출토되어 신라의 황금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35] 서봉총
금관총에서 금관이 출토되자 신라고분에 대한 일제의 관심이 높아졌다. 그리하여 3년 뒤인 1924년에는 금관총 옆 고분 두 기를 발굴하였는데 한 곳에서 또 금관이 나왔다. 이 무덤에서는 유명한 기마인물형토기와 특이한 금방울[金鈴]이 출토되어 금령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하나의 고분에서는 많은 금속 장신구와 함께 아름다운 금신발[飾履]이 출토되어 식리총이라고 불렀다.
금관총·금령총·식리총에서 재미를 본 일제는 2년 뒤 또 하나의 고분을 발굴하기로 하였다. 직접적인 동기는 경주역에 새로 기관차고(機關車庫)를 지어야 하는데 대지 매립에 많은 흙과 자갈이 필요하자 고분 하나를 파서 충당할 목적이었다. 이 고분에서도 금관이 나왔다. 이번 금관은 머리띠에 세 마리의 봉황이 조각된 아주 특별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이 무덤에 서봉총(瑞鳳塚)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상서로운 봉황'이라는 뜻이긴 하지만 내력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에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신혼여행차 한국에 와서 금강산을 둘러보고 이 발굴 현장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에겐 금제 허리띠를 직접 꺼내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주어졌고 이를 기념한다고 스웨덴의 한자 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결합하여 서봉총이라고 이름 붙였던 것이다.
발굴 책임자였던 고이즈미(小泉顯夫)는 훗날 평양박물관 관장이 되었는데 그는 1935년에 자신이 발굴한 서봉총의 금관과 장신구들을 빌려 평양박물관에서 한 차례 특별전을 가졌다. 신라 금관이 처음으로 고구려 지역에서 전시된 것이었다. 성공리에 전시회를 마치고 뒤풀이가 있었는데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이 금관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만찬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만 술에 취해 혼미해지자 금관을 꺼내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금제 허리띠까지 둘러주었다. 이건 박물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당시는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금관을 쓴 평양기생 사진이 시중에 나돌다 한 신문에 실리는 바람에 비난이 쏟아지면서 결국 그는 관장 직에서 물러나고 말았고, 이 평양기생은 신라 금관을 직접 머리에 써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진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36] '미스 백제' 금동보살입상
문화재에 이름을 붙이는 데는 일정한 원칙이 있다. '재료+내용+형태' 순이 기본이다. 예를 들어 〈석조 여래 입상〉, 〈금동 보살 입상〉 식이다. 그러다 보니 똑같은 이름의 유물이 수없이 나오게 되어 학생들은 애칭을 붙여 그 유물의 고유한 성격을 기억하곤 한다. '삼화령 애기부처', '신라 짱구 불상', '미스터 통일신라'…. 그런 중 '미스 백제'라는 보살상이 있다.
이 〈금동보살입상〉(국보 293호)은 부여에서 출토된 것이다. 1907년 어느 날 백마강 건너편 규암리에 사는 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옛날 쇠솥이 하나 파묻혀 있어 이를 꺼내 뚜껑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높이 22㎝와 28㎝의 금동보살상 둘이 마치 자매처럼 나란히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얘기해 주었는데 당시 조선통감부에서 나온 일본 헌병이 나타나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유실물로 보관한다고 가져갔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 '임자 없는 물건'이라 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입찰에 부쳤다. 이구열 선생은 〈한국문화재 수난사〉(돌베개)에서 당시 낙찰자는 니와세라는 일본인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둘 중 큰 보살상은 많은 우리 문화재를 일본으로 반출해 간, 대구에 살던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에게 팔았다.
그리고 작은 보살상은 다행히 8·15 해방 후 압수되어 지금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로 이 보살상이 '미스 백제'이다. 늘씬한 몸매에다 복스러운 얼굴에는 가느다란 미소가 흐르고 있다. 머리엔 화사한 보관(寶冠)을 쓰고 있고, 몸에는 아름다운 영락(瓔珞) 장식을 'X'자로 무릎까지 길게 걸치고 어깨에서 발아래까지 드리워진 천의 자락을 왼손 끝으로 살포시 잡고 있다. 가히 학생들이 '미스 백제'라고 부를 만하다.
그러나 결코 '미스 백제'에 뒤지지 않을 큰 보살상의 행방을 우리는 아직껏 모른다. 어쩌다 국립부여박물관에 가서 이 불상을 볼 때면 나는 그가 언니와 헤어져 홀로 있는 것처럼 안쓰러워하는데 그는 〈금동보살입상〉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여전히 천의 자락을 매만지며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

[37] 안압지(雁鴨池)
경주 안압지(雁鴨池)에 가면 나는 은근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어난다. 내가 교과서에서 안압지에 대해 배운 것이라곤 신라 왕실이 여기서 파티 하다 망했다는 얘기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압지를 특별히 가 볼 생각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미술사를 전공하면서 안압지는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신라시대 궁궐 건축으로 조선시대에 창덕궁의 비원이 있다면 신라에는 안압지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궁중정원임을 알게 됐다.
안압지는 이름부터 잘못되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통일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궁 안에 못을 파서 산을 만들고 온갖 화초와 진귀한 새, 짐승을 길렀다'고 했다. 또 효소왕 6년(696년)과 혜공왕 5년(769년)에는 '군신들을 임해전(臨海殿)으로 모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1980년 안압지를 발굴해 보니 토기 쪽에서 월지(月池)라는 명문(銘文)이 여러 점 나왔다. 최치원이 쓴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는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월지궁(月池宮)에 당도하니 '달그림자가 연못 복판에 단정히 임(臨)하였다'고 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월지궁 임해전이 분명하다. 안압지라는 이름은 신라가 망하고 폐허가 된 뒤 연못가로 기러기가 날아드는 정경을 보면서 시인 묵객들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마치 고려 궁궐터를 훗날 만월대라고 한 것과 같다.
월지궁 임해전은 사방 190m, 약 4500평으로 한쪽은 반듯한 석축에 전각을 세우고 다른쪽은 자연석으로 절묘한 곡선을 이루었다. 그 직선과 곡선의 환상적인 어울림이 이 정원의 기본 미학이다. 가운데는 크고 작은 3개의 섬이 있어 이 연못 주위를 산책하면 계곡과 호수와 누정(樓亭)의 멋을 모두 즐길 수 있다.
벌써 오래전부터 월지궁 임해전은 두루 산보할 수 있게 개방되어 있다. 아름다운 조명이 밝혀지는 야간에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여기를 찾는 내국인 탐방객은 아주 드물고 외국인 관광객들만이 여기저기서 '판타스틱'을 연발하며 사진 찍느라 분주하다. 그들은 이국의 아름다운 궁궐 정원을 그렇게 즐기는데 우리는 이 자랑스러운 월지궁 임해전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오면 나는 괜스레 씁쓸한 마음이 일어난다.
[38] 목조반가사유상
요즘 일본에서는 문화재에 번호를 매기지 않지만, 오랫동안 일본 국보 제1호로 불렸던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木造半跏思惟像)'은 우리나라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너무나 닮은 것으로 유명하다. 1951년 교토대학 식물학과에 다니는 한 학생은 관리인에게 부탁하여 이쑤시개의 5분의 1 정도 되는 눈곱만큼의 나무 부스러기를 떼어내어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분석 결과 그 재질은 놀랍게도 소나무였다. 당시 아스카(飛鳥)시대의 목불들은 대개 녹나무였는데 이 불상만이 유일하게 소나무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보낸 것인지, 나무만 가져간 것인지, 또는 일본의 소나무로 만든 것인지 단정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서기〉 623년 조에 신라 사신이 불상을 가져와 고류지 당시 '진사(秦寺)'에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고류지는 진하승(秦河勝)이라는 신라인이 세운 절이기 때문에 그때 보내준 것이라는 학설이 큰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최소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의 미술사가들도 이와 같은 불상은 도래(渡來) 양식이라고 해서 일본화된 불상과 분리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교토에 가면 우리 국보를 만나러 가듯 반드시 고류지에 들르곤 한다.
이 불상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무수한 찬사가 있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것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1945년, 일본에 와서 이 불상을 보고 쓴 〈패전(敗戰)의 피안(彼岸)에 남긴 것들〉에 실려 있는 글이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 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습을 표현한 여러 형태의 신상(神像)들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들에는 어딘지 인간적인 감정의 자취가 남아 있어 절대자만이 보여 주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이 미륵상에서 인간 존재의 가장 정화되고, 가장 원만하고, 가장 영원한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철학자로 살아오면서 이 불상만큼 인간실존의 진실로 평화로운 모습을 본 적은 없었습니다.'
한동안 고류지에 가서 이 불상 앞에 서면 장내 안내 방송으로 이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39] 사천왕사(四天王寺)
얼마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낭산(狼山) 아랫자락 사천왕사(四天王寺) 터에서 또 조그만 금동불상을 발견하였다. 사천왕사는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적인 사찰로 그 역사적, 미술사적 의의는 가히 기념비적인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창건 과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통일전쟁이 끝났는데도 당나라는 물러가지 않고 공주에 웅진도호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눌러앉으려 하자 신라는 고구려·백제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당 고종은 신라를 치기 위해 외교사절로 가 있던 김인문(金仁問)을 옥에 가두고 50만 군사를 조련시켰다.
이때 당에 있던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찾아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귀국해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조정에서 긴급 대책을 논의하던 중 명랑(明朗)법사는 낭산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지으라고 권했다. 대대적인 호국불사를 일으키며 당나라와 일전불사의 의지를 다지라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사천왕사는 문무왕 11년(671)에 짓기 시작했고, 결국 676년에 당나라 군대를 한강 유역에서 격파하며 완전히 몰아냈다. 사천왕사는 착공 8년 뒤인 679년에 완공됐다.
이렇게 세워진 사천왕사의 가람 배치는 전에 없던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이었다. 왜 이때 갑자기 쌍탑이 등장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똑같은 탑 두 기를 나란히 배치하면서 건축적 리듬감을 얻어낸다는 아이디어는 탁월한 구상이었다. 현대 건축에서 쌍둥이 빌딩이 추구하는 그런 건축 미학이었다. 사천왕사에서 시작된 쌍탑 가람 배치는 이후 감은사·불국사를 비롯한 통일신라 사찰의 기본 틀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으로 전해져 8세기 하쿠오(白鳳)시대에 야쿠시지(藥師寺) 같은 쌍탑 가람으로 나타났다. 동양미술사가인 페놀로사는 이 쌍탑의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얼어붙은 소나타(sonata)' 같다고 했다.
이렇게 중요한 절터이건만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불국사역으로 가는 철길을 바로 이 사천왕사 터를 질러 내는 바람에 제대로 발굴조차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철길은 3년 뒤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 사천왕사 터에 가서 쌍탑을 상상해보면 이번엔 '얼어붙은 심포니(symphony)'를 연상하게 되리라고 기대해본다.
[40] 에밀레종
오늘, 섣달 그믐밤 '제야(除夜)의 종'이 울린다. 서울의 보신각에서도 울리고,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도 울린다. 제야의 종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것은 훌륭한 범종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종은 서양 종과 달리 육중한 나무 봉으로 몸체를 두드려 울리게 하여 '땔랑땔랑' 하는 것이 아니라 '두웅' 하고 울린다. 그중 유독 우리 종은 맥놀이 현상의 긴 여운이 아름다워 음향학에서는 한국 종(Korean bell)이라는 별도의 학명을 부여하고 있다.
우리 범종 중 최고의 명작은 통일신라 때(771년) 주조한 높이 3.7m, 무게 20t의 '성덕대왕 신종(神鐘)'(국보 29호), 일명 에밀레종이다. 태산이 무너지는 듯한 장중한 소리이면서도 옥처럼 맑은 소리를 울려내어 많은 공학자들이 그 음향 구조의 신비를 밝히는 여러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이장무 교수(서울대)는 종의 키와 폭의 비율이 √2=1.414의 값에 가깝고, 당좌(撞座·봉이 닿는 자리)는 스위트 스팟이라고 해서 야구에서 홈런 칠 때 공이 방망이에 맞는 점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이병호 박사(한국과학기술원)는 종소리의 톤 스펙트럼을 분석한 다음 음색과 음질을 채점해 보니 다른 종들은 100점 만점에 50점대에 머무는데 에밀레종만은 86.6점으로 나왔다고 했다.
에밀레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1037자의 긴 명문(銘文)의 첫머리를 보면 '종소리란 진리의 원음(圓音)인 부처님의 목소리'라고 했다. 한마디로 에밀레종은 통일신라의 종교와 과학기술과 예술이 하나 되어 만들어낸 위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몇 해 전부터 이 종은 영구보존을 위해 더 이상 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다는 반론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래서 제야의 종소리가 울릴 때면 에밀레종 소리가 더욱 그리워진다.
반세기 전에 주한미군 라디오방송은 전국 사찰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범종소리를 녹음, 임택근 아나운서의 멘트와 함께 테이프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에밀레종을 비롯하여 이미 깨져 칠 수 없는 오대산 상원사종 등 수십 개의 종소리가 들어 있는데 그 해설 마지막엔 이런 말이 나온다. '서양의 종은 귀에 들리고 한국의 종은 가슴 깊은 곳에 울린다.'
▲12월 31일자 A30면 '유홍준의 국보순례' 중 '오늘 제야의 종이…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도 울린다'고 했으나, 매년 개최되던 석굴암 제야의 종 행사가 이번에는 열리지 않았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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