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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국보순례] [21~30]2009.8.20~10.22

유홍준

[21] 은해사(銀海寺) 현판
팔공산(八公山)의 명찰인 영천 은해사(銀海寺)는 조계종 25교구 본사 중 하나로, 거느린 암자만도 8개나 된다. 이 암자들은 웬만한 절집보다 규모가 크고, 선방으로서 명성도 높으며 연륜이 깊어 백흥암(百興庵)의 수미단(須彌壇), 운부암(雲浮庵)의 청동관음보살상, 거조암(居祖庵)의 영산전(靈山殿)과 오백나한상 등은 오래전부터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은해사 큰 절 자체에는 이렇다 할 불교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1847년 대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1000여 칸이 모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당시 주지였던 혼허(混虛)스님이 3년여의 불사(佛事)를 일으켜 오늘날까지 그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은해사에는 뜻밖의 문화재가 생겼으니 그것은 추사의 현판 글씨이다.
혼허 스님은 새 법당에 걸 현판 글씨를 모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추사 김정희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문루의 '은해사' 현판은 물론이고, 불전의 '대웅전(大雄殿)', 종루의 '보화루(寶華樓)', 조실스님의 거처인 '시홀방장(十笏方丈)', 다실인 '일로향각(一爐香閣)', 백흥암에 있는 여섯 폭 주련(柱聯), 그리고 추사 글씨 중 최대작이라 할 '불광(佛光)' 모두가 추사의 작품이다.
특히 은해사의 현판은 추사체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 당시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용산 한강변[江上], 마루도 없는 집에서 간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추사체는 바로 이때 완성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은해사 추사 현판 중 특히 '大雄殿' 글씨는 강철 조각을 오려놓은 듯한 추사체의 전형이다. 박규수의 평대로 '기(氣)가 오는 듯, 신(神)이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드는 듯'한 감동이 일어난다. 눈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반가워했다.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시절 제자인 이학래(李鶴來)는 영천군수가 되자 은해사를 찾아와 한차례 이 현판들을 보고 놀라웠다고 했다. 또 최완수 선생은 '무르익을 대로 익어 필획의 변화와 공간배분이 그렇게 절묘할 수 없다'고 했다. 은해사는 가히 추사 글씨의 야외전시장이라고 할 만한 곳이다.

[22] 남해 가천 다랑이논
몇해 전, 남해 가천(加川)마을 다랑이논(계단식 논)을 국가 명승 제15호로 지정할 때 가슴속에선 두 개의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하나는 문화재로 되면 형질 변경을 못한다며 강하게 반대한 주민들을 마침내 설득해 지정했다는 안도의 한숨이었다. 지리산 피아골의 그 장대하고 처연한 계단식 논이 논주인들의 반대로 결국 평범한 산밭과 매운탕 집으로 변하고 만 안타까움을 겪고 있던 터였다. 또 하나는 우리의 주식(主食)인 쌀을 생산해내는 논을 문화재로 보존하게 된 씁쓸한 현실이었다.
쌀 80kg의 농협 수매가가 14만원밖에 안 되는 현실에서 논은 날로 버림받게 되어 비닐하우스로, 농공단지로, 과수원으로 변해 버리고 있다.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논이야말로 국토의 원형질이고,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각성이 일어났다. 특히 한 평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다랑이논은 조상의 땀과 슬기로 이루어진 거대한 대지(大地) 미술 같은 것이다. 그 중 가천 다랑이논은 남해 바닷가 가파른 산비탈에 100계단도 넘게 층층이 펼쳐지는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 러나 다랑이논을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만으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었다. 농사꾼이라고는 노인들만 남아 있고, 다랑이논은 기계경작이 불가능하다. 한때는 육지의 인분을 '남해 똥배'로 날라 기름지게 가꾸었던 이 알뜰한 논이 넝쿨풀로 뒤덮이고 있다. 그래서 남해군에서는 전통농법 시범마을로 지정하여 영농후계자들을 투입하는 방안을 내놓으며 어렵사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다랑이논 하나 보존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그러나 가천 다랑이논이 명승으로 지정된 이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아무도 찾는 이 없던 이 궁벽한 섬마을이 이제는 한 해 25만명이 찾아오는 남해의 상징마을로 되었다. 마을 집들은 모두 민박집으로 새 단장을 했고 윗마을 산자락엔 펜션들이 늘어섰다. 마치 일본 규슈(九州)의 유후인(由布院)이 농업과 목축을 살린 친환경 온천 마을로 되었듯이, 가천마을은 다랑이논과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광을 내세운 슬로 타운(slow town)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23] 보길도 부용동
우리나라 5대 정원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경주 안압지(雁鴨池), 창덕궁 비원(秘苑), 서울 성락원(城樂園), 담양 소쇄원(瀟灑園)과 함께 보길도(甫吉島) 부용동(芙蓉洞·사적 368호)을 꼽을 것이다. 그중에서 부용동은 궁원(宮苑)이 아니면서도 2만8000평에 이르는 장대한 스케일로 한번 가본 사람은 절로 감탄을 자아낸다.
1636 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때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왕을 돕기 위해 수백명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으나 도중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세상 볼 면목이 없다며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도중에 윤선도는 섬 하나에 들렀는데 그 풍광에 반하여 여기에 은신처를 잡게 되었으니 그곳이 보길도다.
격자봉(格紫峯·425m)에 올라 지세를 살핀 윤선도는 마치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는 산 아래에 살림집 낙서재(樂書齋)를 짓고 건너편엔 독서처로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지었다. 그리고 동네 아래쪽에 계곡물을 판석[굴뚝다리]으로 막아 연못[洗然池]을 만들고 그 연못 물을 끌어들여 네모난 인공연못[回水澤]을 만든 다음, 그 사이에 섬을 축조하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못 가운데에는 일곱개의 육중한 자연석을 호쾌하게 포치하여 장대한 공간감을 연출하고, 동서 양쪽의 큼직한 너럭바위를 대(臺)로 삼아 자신이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맞추어 악공은 피리불고 무희는 춤추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윤선도는 13년간 부용동을 가꾸어 당시엔 건물이 모두 25채였다고 한다.
혹 자는 부용동을 보면서 윤선도의 호사 취미를 빈정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해남 윤씨의 막대한 재력과 윤선도의 안목이 이런 조선의 명원(名苑)을 남겨준 것인데, 과연 우리 시대엔 어느 집안 어느 누가 300년 뒤 국가 사적이 될 수 있는 정원을 남긴 것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보길도 부용동은 동백꽃 만발하는 3월이 제격이라고 하지만 지금쯤이면 인공 섬의 배롱나무가 마지막 꽃대를 피우는 모습도 가히 환상적일 것이다.

[24] 겸재 정선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라는 한국적 산수화풍을 하나의 장르로 완성해낸 한국화의 화성(畵聖)이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겸재 서거 250주년을 기념하는 '겸재 정선전-붓으로 펼친 천지조화'(11월 22일까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에 소장되었던 '겸재화첩' 등 미공개작을 포함하여 총 142점이 출품되어 있으니 겸재 사후 열린 몇 차례 대규모 기획전 중 하나이다.
겸재의 작품에 대해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거장의 명작에 대해서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명문(名文)의 평론이 있어 그 예술세계의 진수를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키게 되는 법이다.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 ·1686~ 1761)이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붙인 발문(跋文)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관아재는 당대의 문인화가로 겸재와 서울 순화동에서 이웃하며 평생 벗으로 살았기 때문에 겸재를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는 없다고 자부하며 '그가 쓰고 버린 붓을 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동안 우리나라의 산수화가들은 중국 화본(畵本)에 나오는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산세와 계곡이 여러 모습이어도 똑같은 필치로 그리면서도 아직껏 이것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白岳山)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 마주하고 그렸고, 내금강·외금강을 드나들고 영남의 경승을 두루 편력하면서 그 산세와 계곡의 형태를 다 알고 그렸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의 병패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는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고 할 것이다.'(필자 의역)
그리하여 관아재는 평하기를 겸재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던 대가로 중국의 송·원·명의 대가들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겸재의 진경산수가 갖고 있는 미술사적·문화사적 의의이다. 이런 거장의 추모전을 우리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만약 지금 보지 않으면 아마도 50년 뒤 300주기 때나 보게 될 것이다.
[25] 라크마의 한국실
라크마(LACMA)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의 약칭으로 미국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복합 미술관이다. 로스앤젤레스(LA) 시내 한복판, 대지 2만평에 8동의 별도 전시관 건물을 갖고 현대미술·미국미술·유럽미술·라틴미술·일본미술 등을 상설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중 대규모 기획전이 열려 명실공히 미국 서부지역 미술관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라크마에는 아시아미술 전시실도 있어 그동안 한국미술실은 아멘슨 빌딩의 반지하에 약 35평 정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 규모도 초라하고 찾아가기도 쉽지 않아 한국인들은 위축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LA는 한국인 교포가 현재 70만 명이 상주하고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게 해 왔다.
그러나 라크마는 '미술관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한국관의 위상을 높이기로 하여 마침내 지난 9일 성대한 개막식을 가졌다. 새로 개관된 한국실은 175평에 달하는 4개의 전시실을 갖춘 번듯한 규모일 뿐만 아니라 접근성이 좋은 해머빌딩 1층 정중앙인 데다 바로 옆에 매표소와 뮤지엄 숍이 있다. 건물 정면에 '한국미술'이라는 큰 사인판도 걸려 있다. 외국의 유명 미술관에서 이처럼 한국미술이 대접받은 것은 드문 일이다.
개관 기념 강연을 위해 미국에 가면서 내가 속으로 걱정한 것은 라크마가 자체 한국미술 소장품으로 어떻게 175평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국내 미술관 관계자들이 라크마의 한국미술 위상 제고에 적극 호응하여 주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국보 제78호인 금동반가사유상을 특별히 3개월간 대여하여 주었고,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는 여성문화라는 주제로 전시실 하나를 따로 꾸며주었다. 누가 보아도 라크마의 한국미술실은 우리 문화의 독창성이 뚜렷이 읽히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해외에 있는 우리 문화재를 환수하는 데는 열의를 보였지만 해외 미술관을 통하여 우리 문화를 알리는 데는 다소 무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번 라크마의 대대적인 한국실 확장을 계기로 우리는 박물관을 통한 문화교류와 해외홍보의 의미를 다 같이 국제적인 시각에서 깊이 새겨 보았으면 좋겠다.

[26]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지난 6월, 서울 강남의 도산대로에 개관한 호림(湖林) 아트센터는 유흥문화로 가득한 이 지역에 품위 있는 문화의 향기를 심어주는 새로운 명소로 되었다. 테제건축(대표 유태용)에서 설계한 이 호림아트센터는 세 개의 건물이 어우러져 하나의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백자 항아리의 곡선을 살린 5층 건물은 호림박물관 신사분관(分館)이고, 빗살무늬토기의 형태를 빌린 15층 건물은 오피스인데 두 건물을 잇는 서비스 공간은 직선으로 디자인되어 현대적이면서 동시에 전통의 체취가 느껴진다.
서울 신림동에 본관을 두고 있는 호림박물관은 대중에게 다가가는 박물관이 되기 위해 이 신사분관을 마련하고 연중 서너 차례의 기획전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그 첫 기획전으로 열린 〈고려청자전〉은 정말로 근래 보기 드문 전시회이다. 호림박물관은 소장품이 우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지만 고려청자의 컬렉션이 이처럼 훌륭한 줄은 관계자들도 잘 몰랐다. 우선 자체 소장품만으로 3개 층의 전시실을 모두 채웠다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그중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된 것이 6점이나 된다. 전문가 입장에서 이런 전시회를 평가할 때는 대개 처음 공개되는 명품이 몇 점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청자 사자뚜껑 향로' '청자 귀면 장식 네 귀 항아리' 같은 유물은 비록 수리의 흔적은 있지만 종래엔 볼 수 없던 걸작이다. 아름다운 형태미와 다양한 문양의 청자매병이 열 점이나 전시되었다. 이런 비장품(秘藏品)들이 공개되자 그 소문이 일본에까지 퍼져 이미 여러 도자사가(陶磁史家)들이 다녀갔다.
일 반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 해도 이 전시회는 우리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문화에 감각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나라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박물관이라며 안타까워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부족하게 느끼는 것은 박물관의 숫자가 아니라 박물관을 찾아가서 즐기는 관람문화가 약한 것이다. 좋은 전시회가 열리면 열심히 찾아가 구경해주는 문화적 향수가 곧 나라의 민도(民度)를 올리는 길이다.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은 매월 마지막 목요일 하루만은 무조건 무료입장으로 개방한다고 한다. 오늘(24일)이 바로 그날이니 놓치지 말고 박물관 문화에 동참해볼 만한 일이다.

[27]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전을 계기로 우리는 한국미술사 불후의 명작인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또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옛 조선총독부 건물에 재개관할 때 보름간 전시된 것이 국내를 떠난 뒤 처음 공개된 것이고, 1996년 호암미술관의 '조선전기 국보전' 때 두 달간 전시된 것이 두 번째이며, 이번이 세 번째인데 9일간만 전시된다고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남의 유물을 가져가 놓고 빌려주는데 뭐 그렇게 인색하냐고 원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장처인 일본 덴리대(天理大) 도서관은 이 작품 보존에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상설전시는 절대로 하지 않고 대여해 주는 일도 거의 없다.
세종 때 화가 안견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청을 받아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447년이었다. 그러니까 560년이 넘은 작품이다. 무생물도 수명이라는 것이 있어 흔히 '견오백지천년(絹五百紙千年)'이라고 해서, 비단은 500년 가고 종이는 1000년 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몽유도원도'는 신기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마치 어제 그린 그림 같다.
덴리대 도서관은 1980년대에 이 '몽유도원도'의 정밀한 복제본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화승(畵僧) 담징(曇徵)이 그린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가 불타버렸지만 다행히 복제본이 남아 있었던 것을 예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 10년 전 필자는 국제교류재단의 위촉으로 해외문화재를 조사할 때 덴리대 도서관 수장고에서 '몽유도원도'의 진본과 복제본을 한자리에서 배관(拜觀)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도서관장이 두 점을 동시에 펴놓고 보여주는데 어느 것이 진품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귀신 같은 복제술이었다.
다만 시축(詩軸)에서 신숙주(申叔舟)의 시 중 제8행에 '요지로 가는 길(路走瑤池)'이라는 글귀를 보니 원본은 종이를 덧붙이고 땜질한 자국이 남아 있으나 복제본은 땜질을 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덴리대 도서관은 웬만한 전시회에는 이 복제본을 대여해 주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 9일간의 진품 대여가 얼마나 특별한 경우인가 알 만한 일이다. 이 '몽유도원도'는 10월 7일까지만 전시되고 다시 소장처로 돌아간다.

[28]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한 원로 미술사가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회상조로 하신 말씀이 '평생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작품이 한 점만 있어도 그 전시는 훌륭한 전시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는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명화가 여러 점 선보이고 있다. 그중 하나가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이다. 고려불화는 당대부터 유명하여 원(元)나라 문헌에 '화려하고 섬세하기 그지없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고려불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지금 고려불화라고 하는 것은 절집의 대형 벽화가 아니라 높이 2m, 너비 1m도 안 되는 아담한 크기의 채색 탱화(幀畵)들로 고려 귀족들의 원당(願堂)에 장식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대부분 일본에 남아 있는 이 고려탱화들은 오랫동안 원나라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는데 30여 년 전부터 한국과 일본 미술사가들의 고증으로 다시 국적을 찾게 된 것이다.
고려탱화는 현재까지 160점 정도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근래에 호암·호림·아모레퍼시픽·용인대 등 사설박물관들이 외국에서 사들여 온 7점이 모두 국보, 보물로 지정되었고, 미국과 유럽 박물관에 10여 점, 나머지는 일본의 사찰과 박물관에 있다.
고려탱화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당대에 수입해 간 것도 있고, 고려 말에 왜구들이 약탈해 간 것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려하기 그지없다는 고려탱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수월관음도이다. 보타낙가산의 금강대좌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선재동자(善財童子)의 방문을 맞이하는 관세음보살을 그린 것으로 무엇보다도 그 복식의 표현이 압권이다. 아름다운 무늬를 금박으로 수놓은 붉은 법의(法衣)에 흰 사라를 걸친 모습인데 속살까지 다 비치게 그렸다. 곁에서 그림을 보고 있던 한 중학생이 '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것 같다'며 감탄하고 지나간다.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는 전 세계에 35점 있는데 이번에 출품된 것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품으로 그림 아래쪽에 공양하는 인물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29] 반구대 암각화
국보 제285호 반구대 암각화가 여전히 보존문제로 관계자들을 고민 속에 빠트리고 있다. 울산시 언양읍 대곡리에 있는 이 암각화는 1971년 태화강 상류에 식수를 위한 사연댐을 만들게 되자 수몰지구의 문화재를 조사하던 동국대 문명대 교수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높이 4m, 폭 8m의 암벽에 고래·사슴·호랑이·멧돼지 등 동물 모습과 활을 쏘는 사람 등 인간 모습이 무려 231점이나 새겨져 있다. 이는 어로(漁撈)와 수렵(狩獵)으로 삶을 꾸려갔던 선사시대인들이 풍요(豊饒)를 기원하며 새긴 것으로 특히 46점에 달하는 고래 그림은 많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사연댐은 예정대로 만들어져 암각화는 수몰된 지 35년이나 되었고 어쩌다 이른 봄 갈수기에 잠시 모습을 드러내면 그 보존상태가 나빠져 가는 것을 보게 된다. 댐을 다른 곳에 만들고 수몰로부터 구제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게 보통 일이겠는가.
발견 당시 미술사가와 고고학자들은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기원전 4세기 청동기시대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지리학·지질학·식품영양학 등 자연과학자들은 훨씬 시대를 올려보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 논거는 고래 그림이 단지 풍부한 식량감의 상징적 도상이 아니라 이곳이 실제로 고래잡이에 적합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선사시대 울산만의 자연환경은 바닷물이 태화강 중류까지 들어와 300m에 달하는 내만(內灣)이 형성되어 있어 지리학에서는 고울산만(古蔚山灣)으로 불린다. 울산은 예나 지금이나 고래가 자주 나타나는 곳으로 먹이를 따라, 또는 얕은 바다를 찾아 고울산만으로 들어온 고래를 수심이 더 얕은 곳으로 몰아 '좌초'시킴으로써 선사인들은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암각화에 그려진 망보는 사람, 여러 명이 탄 배, 그물, 어책(漁柵), 작살에 찍힌 고래 등은 실제 사냥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는 먹고 버린 고래뼈가 상당수 발견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렇게 고래잡이가 가능했던 지질학적 시기는 6000년 전부터 3000년 전 사이라고 하니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한편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 동물학회에서 고래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연구는 이렇게 점점 깊어지고 있는데 암각화는 날로 병들어 가고 있다. 무슨 대책이 없을까.

[30] 울주 천전리 암각화
1971년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발견할 때 여기서 2km 떨어진 천전리 계곡 가에서 또 다른 암각화가 발견되어 국보 147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m, 폭 10m의 비스듬히 기운 바위 면에 동물·인물·추상무늬·글씨 등이 다양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었다. 이 바위 앞에는 넓은 너럭바위가 있어 제의(祭儀)를 지내거나 쉼터로 안성맞춤인 때문인지 여러 시대 그림과 글씨가 섞여 나오고 있다.
여기 새겨져 있는 글씨들은 '천전리 서석(書石)'이라고 불리는 금석학의 중요한 유적으로 되었다. 그중 하나는 을사(乙巳·525년)로 시작하는 긴 글로 그 내용을 보면 신라 법흥왕의 동생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갈문왕(葛文王)이 예쁜 용모를 갖춘 여동생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郞)을 벗 삼아 이 계곡에 놀러 왔는데 이 아름다운 계곡에 이름이 없다고 하여 글씨를 새겨놓고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짓는다는 내용이다. 지금도 이 골짜기는 서석골이라 불리고 있다.
또 하나는 영랑(永郞), 수품(水品) 등 문헌사에 보이는 신라 화랑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여기가 한때 화랑들의 심신 수양처였고, 그들이 다녀간 기념으로 이름을 새긴 일종의 낙서가 오히려 문화재로 된 셈이었다.
바위 윗면에 있는 암각화 그림은 반구대를 연상케 하는 동물 그림과 신비한 기하학적 추상무늬들로 섞여 있다. 동물 그림으로는 머리를 맞댄 암수 한 쌍의 사슴, 상어 비슷한 물고기 등이 있고, 인물도 여럿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는 가면을 쓴 듯 머리가 유난히 크고 성기가 긴 남자도 있다. 모두가 풍요를 비는 성(性) 신앙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겹으로 표현된 마름모꼴 도안을 비롯하여, 3중의 동심원 무늬, 4중의 나선형 무늬 같은 신비로운 추상 도안들은 분명 청동기시대에 신성함을 상징화시킨 그들만의 부호임에 틀림없지만 아직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이 살던 미국 서부에 이와 비슷한 암각화가 있는데 그곳 학자들은 '뉴스페이퍼 록(newspaper rock)'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시인들의 생활정보가 암각화 속에 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로제타의 돌'을 해석하여 그리스 역사를 복원해낸 그런 천재가 우리 미술사 연구에도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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