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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의 국보순례] [1~10] 2009.4.2~6.4

유홍준

[1] 숭례문 현판 글씨
지난해 2월 숭례문 화재의 책임을 지고 문화재청장 직에서 사임한 이후 나는 참회하는 마음에서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지 1년이 지난 지금, 아무래도 나의 본업은 문화유산에 대한 글쓰기에 있다는 생각에서 이제 국보 순례 길에 나서게 됐고,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당연히 숭례문이 되었다.
숭례문 화재 와중에 현판(懸板)을 구해낸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불길이 마침내 문루(門樓)로 번지기 시작하자 한 소방관이 현판의 대못을 뽑아내고 바닥으로 떨어뜨려 내려놓음으로써 살려낸 것이었다. 당시 어떤 사람은 현판을 마구 다루었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현판의 크기는 길이 3.5m, 폭 1.5m에 무게가 자그마치 150㎏이나 되는 육중한 것으로 내려진 현판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데 전경이 8명이나 동원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실로 옮겨 놓고 보니 숭례문 현판 글씨는 참으로 장대해 보였다. 한 획의 길이가 1m나 되는 것도 있었다. 옛날에 대동강 부벽루 현판을 쓴 평양 명필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1772~1840)이 대자(大字)를 쓸 때면 절굿공이만한 붓대에 큰 새끼를 동여매어 이를 어깨에 걸어 메고는 쟁기를 갈듯 큰 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썼다는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의 얘기가 허투가 아니었음을 알 만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1960년대에 보수할 때 호분(胡粉)과 석간주(石間�{) 등 안료를 칠하면서 글자 획 끝이 뭉개져 버려서 글씨의 묘미를 상실한 것이 큰 흠이었다. 이 숭례문 현판 글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다. 양녕대군(讓寧大君), 신장(申檣), 정난종(鄭蘭宗), 유진동(柳辰仝)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그런 가운데 '글씨의 장려하고 빼어남은 양녕대군의 사람됨을 상상케 한다'는 전설이 생겨 사람들은 숭례문 글씨를 더욱 좋아했고 특히 양녕대군 후손들이 크게 기리는 바가 되어 탁본을 하여 가보로 삼곤 했었다. 150년 전 양녕대군 후손인 이승보(李承輔)가 경복궁 영건도감 제조를 맡았을 때 탁본해 둔 것이 최근 서울 상도동의 양녕대군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서 발견되어 이번 복구 작업 때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하니 이 또한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2] 근정전(勤政殿)
며칠 전 미술사학과 4학년 현장수업으로 경복궁에 다녀왔다. 경복궁에 들어서면 사람들은 보통 품계석(品階石) 따라 난 어도(御道)를 밟고 곧장 근정전(勤政殿) 월대(月臺)로 오르지만, 나는 학생들을 근정문 행각(行閣) 오른쪽 모서리로 모이게 한다.
왜 냐하면 거기가 바로 근정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그 언저리에 '사진 잘 나오는 곳'이라는 푯말이라도 하나 새겨놓고 싶은 지점이다. 듬직하고 가지런한 2단 석축(石築)의 월대, 높이 34m의 장엄한 근정전 중층 건물, 그리고 팔작지붕이 연출해낸 아름다운 지붕 곡선이 멀찍이 비껴 있는 북악산과 인왕산을 향해 빈 하늘로 뻗어나가는 모습은 가히 한국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만하다.
거기에서 나는 학생들에게 근정전의 내력을 설명해 주었다. 1395년(태조 4) 경복궁과 종묘 그리고 서울성곽이 완성되자 태조대왕은 정도전(鄭道傳)에게 궁궐의 모든 전각(殿閣)과 문루(門樓)의 이름을 짓게 했다.
이에 정도전은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등 임금의 상징적 공간인 이곳을 근정전이라 이름짓고는 그 뜻을 풀이한 글을 따로 바쳤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廢)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이렇게 서두를 꺼낸 정도전은 이어 '서경(書經)'의 말을 이끌어 부지런함의 미덕을 강조하고, 또 그 역사적 사례들을 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뼈 있는 충언을 덧붙였다. '그러나 임금으로서 오직 부지런해야 하는 것만 알고 무엇에 부지런해야 하는지를 모르면 그 부지런하다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고 까탈스러움에 흘러 보잘것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정도전은 옛 현인(賢人)의 자세를 이끌어 이렇게 충고했다. '아침엔 정무를 보고[聽政], 낮에는 사람을 만나 보고[訪問], 저녁에는 지시할 사항을 다듬고[修令], 밤에는 몸을 편안히 하여야[安身] 하나니, 이것이 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그리고도 무엇인가 못 미더웠던지 정도전은 한마디를 더했다. '부디 어진 이를 찾는 데 부지런하시고, 어진 이를 쓰는 데는 빨리 하십시오.' 근정전에는 그런 깊은 뜻이 서려 있다.
[3] 경복궁 '천록(天鹿)'
우리는 경복궁의 상징적인 조각으로 해태(獬豸)상은 익히 알고 있으면서 천록(天祿 또는 天鹿)이라는 조각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근정문 앞 금천(禁川)을 가로지르는 영제교(永濟橋) 양옆 호안석축(護岸石築·강변의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돌로 쌓은 축대)에 있는 네 마리의 돌짐승이 바로 천록이다.
이 돌짐승을 혹은 해태, 혹은 산예(狻猊·사자 모습을 한 전설상의 동물)라고 하지만, 해태는 털이 있어야 하고, 산예는 사자 모양이어야 하는데 그런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뿔이 하나인 데다 비늘이 있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천록상이다.
이 돌조각은 경복궁 창건 당시부터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뛰어난 조각 작품의 하나로 손꼽을 만한 명작이다. 다만 그 중 한 마리는 이상하게도 등에 구멍이 나 있고, 또 한 마리는 일찍부터 없어져 2001년 영제교를 복원할 때 새로 조각하여 짝을 맞춰 둔 것이다.
그런데 실학자 유득공(柳得恭·1749~?)이 영조46년(1770) 3월3일 스승인 연암 박지원(朴趾源), 선배 학자인 청장관 이덕무(李德懋)와 함께 서울을 나흘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春城遊記)〉에 이 돌짐승 이야기가 나온다.
' 경복궁 옛 궁궐에 들어가니 궁 남문 안에는 다리가 있고 다리 동쪽에 천록 두 마리, 서쪽에 한 마리가 있다. 비늘과 갈기가 완연하게 잘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남별궁(南別宮) 뒤뜰에 등이 뚫린 천록이 있는데 이와 매우 닮았다. 필시 영제교 서쪽에 있던 하나를 옮겨다 놓은 듯한데 이를 증명할 만한 근거는 없다'고 했다. 남별궁은 지금 조선호텔 자리에 있던 별궁이었으니 이제 와서 그 돌조각을 다시 찾아낼 길은 없다.
〈예문유취(藝文類聚)〉등 옛 문헌을 보면 '천록은 아주 선한 짐승이다. 왕의 밝은 은혜가 아래로 두루 미치면 나타난다'고 하는 전설상의 서수(瑞獸)이다. 옛 궁궐에는 임금의 은혜가 백성에 미치는지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천록이 있었다.
나는 백제 무령왕릉의 서수도 천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다만 같은 천록상이라도 무령왕릉의 천록은 이미 세상에 나타나 당당히 왕릉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지만, 경복궁의 천록은 앞발에 턱을 고이고 넙죽 엎드려 있으면서 나타날까 말까 궁리중인 것 같은 형상이다.
[4] 근정전 월대(月臺)의 석견(石犬)
명작(名作)이라고 불리는 예술작품의 공통점 중 하나는 디테일(detail)이 치밀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위대한 건축가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미즈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는 '신(神)은 디테일 속에 있다'고 갈파한 바 있다.
경 복궁 건축은 과연 명작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섬세하고 다양한 디테일들이 곳곳에 있다. 그중 하나가 근정전 월대(月臺·궁전이나 누각 앞에 세워놓은 섬돌)의 돌짐승 조각이다. 상하 2단으로 되어 있는 근정전 월대에는 사방으로 돌계단이 나 있고 그 난간 기둥머리에는 모두 세 종류의 석상(石像)이 배치되어 있다. 하나는 사방을 지키는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신상(四神像)이고, 또 하나는 방위(方位)와 시각을 상징하는 십이지(十二支)상이며, 나머지 하나는 서수(瑞獸)상이다.
이 돌조각들로 인하여 기하학적 선과 면으로 구성된 차가운 월대에 자못 생기가 감돌고, 사신상의 공간 관념과 십이지상의 시간 관념이 이 공간의 치세적(治世的) 의미를 강조해 준다.
그런데 월대 남쪽 아래위 모서리의 돌출된 멍엣돌(모서리의 돌판을 받치는 쐐기돌) 네 곳에는 또 다른 한 쌍의 짐승이 아주 재미있게 조각되어 있다. 암수 한 쌍이 분명한데 몸은 밀착해 있으면서 딴청을 부리듯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어미에게 바짝 매달려 있는 새끼까지 표현되어 있어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한다.
이 석상에 대하여는 아직 정확히 고증된 바 없지만 유득공(柳得恭)은 〈춘성유기(春城遊記)〉에서 '석견(石犬)'이라고 하며 전해지는 전설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근정전 월대 모서리에는 암수 석견이 있는데 암컷은 새끼 한 마리를 안고 있다. 무학대사는 이 석견은 남쪽 왜구를 향해 짖고 있는 것이고, 개가 늙으면 대를 이어가라고 새끼를 표현해 넣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유 득공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럼에도 임진왜란의 화(禍)를 면치 못했으니 그렇다면 이 석견의 죄란 말이냐'며, '다만 재미있는 이야기일 뿐 모름지기 믿을 것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석견에 주목하는 것은 근정전이라는 엄숙한 공간에 이처럼 해학적인 조각상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경복궁 건축의 디테일은 치밀하고 여유롭다는 점 때문이다.
[5] 종묘 제례(宗廟 祭禮)
'외국에서 온 손님이 우리나라 전통건축 하나를 보고 싶다는데 어디가 좋을까요?' 종종 듣는 이런 문의에 대해 나는 무조건 종묘(宗廟)를 보여주라고 권한다. 조선왕조 역대 제왕의 신위(神位)를 모신 종묘는 건축사가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가들로부터 무한한 찬사를 받고 있다.
오직 기둥과 지붕이라는 최소한의 건축 요소만으로 구성되었을 뿐 어떤 건축적 치장이 가해진 바 없음에도 이와 같이 장엄하고 적막감마저 감도는 고요의 공간을 창출해낸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입 모아 말하고 있다.
서양미술사의 아버지인 빈켈만(Winkelmann)은 그리스 고전미술의 본질은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에 있다고 설파한 바 있는데 이 정의는 우리의 종묘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굵고 듬직한 기둥들이 동어반복(同語反復)하듯 열 지어 뻗어 나가는데 묵직이 내려앉은 맞배지붕이 수직의 상승감을 지그시 눌러주며 절제와 경건의 감정을 자아낸다. 그 단순함이 보여주는 고귀함이 이 건축의 본질이다.
그리고 종묘 건물을 떠받쳐주고 있는 넓디넓은 월대(月臺)는 이 제의적(祭儀的) 공간에 긴장과 고요의 감정을 더해준다. 종묘의 월대는 눈높이가 여느 건축과는 달리 우리의 가슴 높이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공간적 위압감이 일어나 더욱 장엄하고 위대하다는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낸 신전(神殿)으로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엔 종묘가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건축가도 있다. 그것은 종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에서 보증받을 수 있다.
게다가 종묘에서는 해마다 종묘제례(祭禮)가 열리고 있다. 500명의 제관들이 행하는 의식에 보태평(保太平·문치[文治]를 찬양한 음악)과 정대업(定大業·무업[武業]을 기린 음악)이 연주되고, 64명이 열 지어 춤추는 팔일무(八佾舞)가 어우러지는 복합예술이다.
세계에는 많은 신전이 남아 있지만 그 제례가 600년 이상 이어온 예는 극히 드물다. 그래서 유네스코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세계무형유산으로 종묘제례를 등재시켰다. 올해도 5월 첫째 일요일(3일) 종묘에서는 저 장중하고 위대한 종묘제례가 열린다.
[6] 입하(立夏)의 개화(改火)
엊그제(5일)가 입하(立夏)였다. 현대사회에서 이날의 의미란 그저 달력상 여름으로 들어섰구나 하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긴밀히 호흡을 맞추며 살았던 조선왕조 시대에는 절기가 바뀌는 입춘·입하·입추·입동마다 개화(改火)라는 의식이 있었다.
옛 가정에서 부엌의 불씨는 절대로 꺼뜨려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이것을 그냥 오래 두고 바꾸지 않으면 불꽃에 양기(陽氣)가 지나쳐 거세게 이글거려 돌림병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절기마다 바꾸어 주었다. 이를 개화라 하며 새 불씨는 나라에서 직접 지핀 국화(國火)를 각 가정으로 내려 보냈다.
태종 6년(1406)에 시행된 이 개화령(改火令)은 성종 2년(1471)에 더욱 강화되어 궁궐의 병조(兵曹)에서 새 불씨를 만들어 한성부로 내려 보내고, 고을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집집마다 나누어주되 이를 어기는 자는 벌을 주게 했다. 새 불씨를 만드는 방법은 찬수(鑽燧)라 하여 나무를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이때 어떤 나무를 쓰는가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맞추어 계절마다 달리했다.
봄의 빛깔은 청(靑)색이므로 푸른빛을 띠는 버드나무[柳]판에 구멍을 내고 느릅나무[楡] 막대기로 비벼 불씨를 일으켰다. 여름은 적(赤)색이므로 붉은 살구나무[杏]와 대추나무[棗]를, 가을은 백(白)색이므로 하얀 참나무[�k]와 산유자나무[楢]를, 겨울은 흑(黑)색이므로 검은 박달나무[檀]와 느티나무[槐]를 사용했다. 그리고 땅의 기운이 왕성한 늦여름 토왕일(土旺日·입추 전 18일간)에는 중앙을 상징하는 황(黃)색에 맞추어 노란빛을 띠는 구지뽕나무와 뽕나무[桑]를 이용했다.
어찌 보면 형식에 치우친 번거로운 일로 비칠지 모르나 자연의 섭리를 국가가 앞장서서 받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야 하는 삶의 조건을 그때마다 확인시켜 주면서 이제 절기가 바뀌고 있음을 생활 속에서 실감케 하는 치국(治國)과 위민(爲民)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돈화문으로 들어서면서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찬수개화를 했던 내병조(內兵曹)이다. 궁궐 답사 때는 모름지기 건물 자체보다도 거기에서 행해졌던 의미 있는 일들을 떠올릴 때 더욱 느낌이 커지는 법이다.

[7] 태안 해저유물
태안(泰安) 앞바다에서 또 다량의 도자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재작년 낚시에 걸린 주꾸미가 청자대접 하나를 붙잡고 올라오는 바람에 2만3000점의 고려청자를 인양했는데 이번에는 고려·조선은 물론 송나라·청나라 도자기까지 발견되어 더욱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태안반도 만리포와 연포해수욕장 사이의 안흥항(安興港)은 삼남조운(三南漕運)의 중요 경유지인데 그 앞바다인 안흥량(梁·조류가 험한 바다에 붙이는 이름)은 예로부터 선박 침몰이 잦았다. 난행량(難行梁)이라고도 불린 이 안흥량은 진도 명량(鳴梁·울돌목), 강화도 손돌목, 황해도 인당수와 함께 4대 조난처로 손꼽히던 곳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청 이남의 세곡(稅穀)을 서울로 운반하려면 안흥량을 경유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해난사고가 빈번히 일어난다'고 특기할 정도였고, 〈조선왕조실록〉에 기초한 통계에 의하면 태조부터 세조까지 60년간 침몰한 배가 200척, 인명피해가 1200명, 손실 미곡이 1만6000석이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고려 인종12년(1134)에는 태안반도 길목을 가로지르는 7㎞의 대운하를 시도하였으나 암반에 막혀 중도에 포기했다. 이 굴포(堀浦)운하는 이후 고려 의종, 조선 태조 때 재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태종13년(1413)에 민력(民力) 5000명을 동원하여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완성한 굴포운하로는 작은 배만 다닐 수 있을 뿐이어서 태종은 '공연히 인력만 낭비했다'고 후회했고 이내 폐허가 되어 지금도 1㎞의 자취가 남아 있다.
이렇게 안흥량에서 침몰한 세곡선·조운선(漕運船)·무역선(貿易船)의 물품 중 잘 변질되지 않는 도자기들이 오늘날 귀중한 문화재로 인양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태안에서 근래에 갑자기 해저유물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 것은 안흥항 앞에 있는 신진도(新津島)에 새 항구를 건설하는 등 숱한 간척사업으로 조류가 뒤바뀌어 천리포 해수욕장의 고운 모래가 쓸려나가고 반대로 갯벌 양식장에 모래가 밀려오는 현상이 해저에서도 똑같이 일어나 벌흙들이 서서히 벗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연발굴인 셈이니 이것이 전화위복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세월의 아이러니인가.
[8] 수중문화재
1976년 봄부터 9년간 이어진 신안해저유물 발굴은 우리나라 수중고고학(水中考古學)을 동양의 선두주자로 나서게 한 문화사적 대사건이었다. 500t급 선박의 3분의 1 선체를 인양하고, 도자기 3만점, 금속공예품 700여 점, 고급목재인 자단목(紫檀木) 1000여 자루, 그리고 중국 옛 동전을 800만 닢(28t)이나 발굴하여 세계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유물들을 보관하던 목포 해양유물보존처리소는 1994년에 국립해양유물전시관으로 확대 개편되어 목포 갓바위 바닷가 풍광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전시관이 지난달 27일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다시 개편되었다고 한다.
비밀일 것도 없으면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수중문화재의 현황은 놀라운 것이다. 지난 20년간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수중문화재가 발견되어 신고 접수된 곳이 현재 234곳이고 수습된 유물은 5000점이 넘는다.
이 에 반하여 그동안 국립해양유물전시관 발굴팀이 주어진 장비, 주어진 인력, 주어진 예산으로 발굴 작업을 마친 곳은 불과 15곳이다. 그중에서 완도·달리도·십이동파도·안좌도·대부도·태안 등에서 한선(韓船·고려시대 배) 5척, 진도에서 외국 배(중국 또는 일본 배) 1척을 인양했다. 배 한 척을 인양하는 데 보통 3년씩 걸렸으니 신고된 234곳을 지금처럼 발굴하면 600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절박감에서 문화재청은 재작년에 비로소 18t급 자체 탐사선을 출범시켰고, 그 첫 번째 작업으로 발굴한 것이 주꾸미가 물어 올린 태안의 고려청자였다. 인양작업도 해군과 해경의 잠수부를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잠수 훈련을 마친 학예연구원이 직접 발굴 수습했다. 이 발굴 팀을 수중문화재 상주조사단으로 운용하겠다는 것이 국립해양유물연구소의 구상이다. 늦었지만 고맙고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원활한 수중문화재 발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체 인양선이 있어야 한다. 차제에 연구소에서 추진하는 200t급 인양선 건조에 필요한 예산(52억원)과 인력(5명)을 관계 부처가 합의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정부도 좋지만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9]景福宮의 殯殿
궁궐에는 많은 전각(殿閣)이 있어 흔히 구중(九重) 궁궐이라며 복잡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몇 개의 권역으로 간명히 나뉘어 있다.
하 나는 나라의 정사(政事)를 돌보는 치조(治朝) 공간으로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과 여러 편전(便殿)들이 이에 해당된다. 둘째는 왕과 왕비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왕이 기거하는 강녕전(康寧殿),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交泰殿) 등 이른바 연조(燕朝) 공간이다. 이외에 경회루와 같은 연회(宴會) 공간이 있고, 경복궁의 녹원(鹿苑), 창덕궁의 금원(禁苑) 같은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까지는 오늘날 대통령이 기거하며 근무하는 청와대의 공간구성과 크게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조선시대 궁궐에는 현대사회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공간이 있었으니 이는 죽은 이를 위한 빈전(殯殿)이다.
삶 과 죽음을 자연스러운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여 왕이나 왕비가 세상을 떠나면 그 시신을 모신 관이 능으로 옮겨질 때까지 머무는 곳을 그때마다 마련하는 임시 공간이 아니라 궁궐 구성의 당당한 한 권역으로 삼았던 것이다. 망자(亡者)란 이승에서 보면 세상을 떠난 자이지만 저승의 입장에서 보면 새 손님이기 때문에 주검 시(??)변에 손 빈(賓)자를 써서 빈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경복궁 서북쪽 한편에 있는 태원전(泰元殿)이 바로 빈전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한 뒤 세상을 떠난 조대비(趙大妃)와 명성황후의 국장(國葬) 때 그 시신이 태원전에 모셔졌음이〈실록〉과 〈의궤〉에 나와 있다.
그 런데 태원전 뒤쪽에는 작지만 절집의 선방(禪房) 같은 아담한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우리 한옥은 세 칸 집이 가장 예쁘다고 하는데 이 건물은 같은 세 칸이지만 기둥이 높고 지붕이 묵직하여 아담한 가운데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이 건물은 돌아가신 이의 위패를 모시는 혼전(魂殿)으로 숙문당(肅聞堂)이라고 한다. 망자의 혼백이 남긴 말씀을 엄숙한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이다.
내일(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이 경복궁 앞뜰에서 열린다고 하니 태원전 숙문당의 뜻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10] 儉而不陋
우리 궁궐 건축에 나타난 특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검이불루(儉而不陋)'이다. '검이불루'란 검소하지만 누추하지는 않다는 뜻으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처음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 온조왕 15년(BC 4년)조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았다'(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고 했다.
백제가 아마도 지금 풍납토성 자리일 위례성에 새로 궁궐을 지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그 궁궐의 자태를 말한 이 여덟 글자의 평문(評文)은 백제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미감(美感)을 대표할 만한 명구(名句)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불국사의 석가탑은 '검이불루'하고 다보탑은 '화이불치'하다는 평에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김 부식이 평한 이 여덟 글자의 명구가 고전의 어디에서 따온 것인지, 그의 독창적인 평문인지, 나로서는 아직 확언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 정신만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고종황제가 경복궁 북쪽 끝에 건청궁(乾淸宮)을 짓고 명성황후와 살면서 그 곁에 자신의 서재로 지은 집옥재(集玉齋)는 당시로서는 현대풍을 가미한 화려한 건물이지만 결코 사치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 건축이 추구한 미학은 〈집옥재 상량문〉 첫머리에 명확히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예의 여덟 글자를 약간 바꾸어 '검소하지만 누추한 데 이르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았다'(儉不至陋 華不至奢)고 했다.
언어의 표현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일 것이다. 조선왕조 헌종은 21살(1847) 때 후궁 경빈(慶嬪)김씨를 맞이하면서 새 생활공간으로 지금의 낙선재(樂善齋)를 지으며 자신이 직접 쓴 〈낙선재 상량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곱고 붉은 흙을 바르지 않은 것은 과도한 규모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채색한 서까래를 놓지 않은 것은 소박함을 앞세우는 뜻을 보인 것이라네.'
그래서 창덕궁 낙선재는 궁궐의 전각이지만 단청을 입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낙선재가 누추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과연 '검이불루'의 미학이 오늘날 현대건축에서는 얼마만큼 계승되고 있는지 다 함께 생각해 볼 일이다.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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