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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형의 ‘큐레이터 따라하기’] 21. 한국 미술시장의 현주소

이대형


“ 미술의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과 그것을 소비하는 수용자를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서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큐레이터로 살아 남을 수 없습니다. 큐레이팅은 에디팅과 달라서 주어진 내용을 보기 좋게 잘라내고 편집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합니다. 내용이 주어진 문맥 속에서 확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상상력을 사각의 하얀 큐브 속에 갇히지 않도록 훈련하세요. 이상입니다. 질문 없나요?”
한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 선생님 큐레이터가 되고 싶어 인턴을 시작했는데 한 달에 15만원 받고 있어요. 진짜 큐레이터가 되려면 언제까지 버텨야 하나요?”
지 난 4월 29일 고려대에서 있었던 ‘현대미술의 가치 누가 만드는가’라는 주제의 수업 중 나온 대화다. 큐레이터에 대한 이상적인 정의와 현실과의 거리감을 노골적으로 꼬집어 필자를 순간 당황케 했던 에피소드다. 경쟁력 있는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 현실은 학예연구사 자격증이나 관련 전공 석·박사, 국제적 업무 수행능력, 미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인내심’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어처구니없는 자격 요건이 실제 좋은 큐레이터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미술사적 지식과 실제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주도적으로 큐레이팅을 할 수 있기까지 대략 5년 이상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중도에 포기 의사를 밝히는 기권자들이 많은 것일까? 그 전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이기에 ‘인내심’이 중요한 걸까? 쉽게 말해 에너지와 노력에 비해 경제적·심리적·사회적 보상이 낮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한 해 미술관련 기사를 검색해보자. 90% 이상이 미술시장과 그 속에서 스타로 떠오른 작가에 관한 기사가 주를 이루고 있고, 그러한 결과물을 배출한 화랑과 미술관 이름이 그 뒤를 따른다. 그 뒤에서 묵묵히 일했던 큐레이터에 관한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시 도록을 살펴보아도 작가에 관한 이야기는 100% 있지만 큐레이터를 주목하는 경우는 몇몇 미술관을 제외하고는 흔치 않다.
“큐레이터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큐레이터는 작가와 전시의 그림자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더욱 짙게 만들고 싶으면 더 밝고 좋은 조명으로 작가와 전시에 스포트라이트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작가와 전시가 없다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 큐레이터라고 봐요”라고 답한다. 정말로 그렇다. 성공적인 전시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움직이지만 작가와 전시가 주목받지 못하면 그림자는 곧 희미해져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가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태도와 마음가짐의 문제야지 뒤에서 소극적으로 물러서 있는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한국 미술시장을 확대하고 수출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으로 일하는 일꾼들이 음지에서 양지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남아 있는 겸손함도 중요하지만 멀리서 관객의 손을 잡고 끌고 올 수 있는 완력과 무대를 외국으로 옮겨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낼 수 있는 도전의식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미 술시장이 성숙하고 있지만 아직도 스포츠나 영화산업, 게임, 애니메이션 등 다른 분야에 비하면 가야 할 길이 멀고 험하다. 지난 3년간 미술시장의 호황은 수많은 스타 작가들을 양산했다. 그리고 미술관련 직종, 특히 큐레이터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숫자 역시 많아졌다. 인턴 하나 뽑는데 정말 많은 지원자가 몰려든다. 그래서 뽑으면 1∼2년 버티다 그만두고 또다시 새로운 사람을 어렵지 않게 구하게 되고…. 일할 수 있는 기관의 숫자는 정해져 있고, 그 역할 역시 정해져 있는데, 지원자의 경력사항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다양해지고 있다. 새로운 인력에서 새로운 생각을 보충하는 것은 좋은데, 그들이 지치지 않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왔던 인재들이 다 빠져나갈 수도 있다. ‘인내심’ 하나로 버티라는 주문을 요구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저는 스태프 여러분들이 정성껏 준비해 놓은 밥상을 떠먹었을 뿐입니다.” TV광고로도 활용된 바 있는 영화배우 황정민이 울먹이며 모 영화 시상식에서 했던 수상 소감이다. 명작이 나오기까지 황정민이라는 연기자 못지 않게 스태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가슴 찡한 메시지다. 정보화 시대에 어떤 것이 좋은지 소비자들은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디테일에서 결정된다. 그리고 이 디테일은 시스템과 그것을 운영하는 인력에 의해 좌우된다. 할리우드를 단번에 세계 영화산업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게 만들어 낸 것은 자본이 뒷받침된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있다. 배우와 감독에서부터 시나리오 감독·조명·의상·에디팅·분장·사운드 에디팅·사운드 믹싱·각색에 이르기까지 영화 한 편이 나오기까지 음지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을 각 분야의 사람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영화의 성공에 기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레드카펫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전 세계 우수 인력이 할리우드에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시 더 경쟁력있는 상품으로 완성되어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 할리우드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멋진 시상식을 통해 인적 인프라를 키우고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고 있는 영화산업의 성숙한 마케팅이 탐날 뿐이다.
다시 미술 동네를 들여다보자. 각종 미술대전이 작가 중심에서 출발한다. 전시 중심의 시상식은 생각하기 힘들다. 스타 작가가 있고 그를 대변하는 화랑이 있다. 큐레이터와 평론가들이 설 자리는 월간 잡지나 도록의 몇 페이지 종이 위 그리고 온라인 블로그 정도가 전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칠만도 하다. 많은 외국 전문가는 말한다. 한국은 상품은 많은데 마케터가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좋은 작가는 많은데 이것을 새로운 문맥 속에서 포장하고 다듬어 보다 가치 있는 어떤 걸로 만들어 내는 일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지난 수십년간 세계 미술시장의 맹주임을 자랑했던 뉴욕의 화랑들은 뉴욕과 미국 작가가 좋아서 초일류가 된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초일류이고 그들의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 차별적인 퀄러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술시장의 맹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글로벌 시대에 갤러리의 위치를 한탄하며 제자리걸음에 만족하는 소극적인 자세는 버려야 한다. 좋은 시스템과 철학, 비전이 그 해답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음지에서 그림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레드카펫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스 타 작가는 주목받는 전시를 통해 탄생한다. 한국의 수많은 인재가 좋은 전시를 만들기 위해 지치지 않고 머리를 맞대고 일 할 수 있는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스타 큐레이터 하나가 발휘할 수 있는 마케팅 파워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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