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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Special Knowledge (13) 국보 이야기 (하)

편집부


국보 1호만 상처 입은 게 아닙니다. 송광사 목조삼존불감(42호)이 도난당한 적 있고, 난중일기(76호)는 도난당해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직전에 되찾았습니다. 불국사 석가탑(21호)은 복원 과정에서 3층 탑신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국보 10호인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 도굴꾼의 손에 허물어진 적도 있습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285호)는 사연댐에 갇혀 해마다 7~8개월씩 물에 잠겼다 나오며 눈에 띄게 파손됐지만 최근에야 보존 방안을 논의하는 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손꼽히는 문화재 수난 사례를 소개합니다.
금동불상 도난 사건
1967년 10월 24일 오전 11시. 국립박물관에서 빌려 와 덕수궁미술관 2층에서 전시 중이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119호)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6세기 후반의 대표적 고구려 불상이다. 불상이 있어야 할 유리 전열장 속에는 메모만 한 장 덩그러니 들어 있었다.
“국장님에게 직접 알리시오. 24시간 안에 반환한다고 하고. 세계신기록을 남기기 위해. 타인에게 알리거나 약은 수작을 벌여 죽은 자식 불알 만지는 식으로 되지 말라고. 이따가 11시경 알리시오. 지문을 채취하지 마시오.”
문화재관리국과 경찰이 발칵 뒤집혔다. 경찰은 미술관 2층 경비원과 수위, 미술관 직원 등 4명을 붙들고 신문했지만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경찰은 미술관 직원 18명 전원의 지문을 채취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하고, 골동품 거래처 등지에 도난 국보 사진을 뿌려 수배하는 등 소동을 벌였다. 불상이 사라진지 12시간째인 밤 11시 무렵, 문화재관리국장의 집 전화벨이 울렸다. “국장님, 불상은 한강 철교 제3교각 16, 17번 침목 받침대 사이 모래밭에 있으니 찾아가십시오.” 박물관 관계자들이 비상 출동해 모래밭에서 불상을 찾았다. 국보는 도난 13시간37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불상을 훔쳐간 이유도 알아내지 못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미술품 도난 사건 중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은 일이다.

비운의 경천사 십층석탑
서울 용산 국립중앙방물관 전시동 내 역사의 길 중앙에 있는 경천사 십층석탑(86호). 우리나라 최초의 대리석탑으로 국보 제2호인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모델이다.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이 탑은 110t이란 육중한 몸으로 수차례 이전됐다. 수난이 시작된 건 조선시대. 탑의 기단부는 물론 1층부터 3층까지 각 면에 이어진 불교 관련 도상이 심하게 훼손됐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밀반출된 채 표류하던 탑은 영국 언론인 E 베델과 미국 선교사 호머 베잘렐 헐버트에 의해 침탈 12년 만에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해체된 채 방치되다 59년 시멘트로 땜질되고, 62년 국보로 지정됐다. 비바람에 깎이고 쓸리던 탑은 95년부터 해체·복원 과정을 거친 뒤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자리 잡았다.
국내 최대 문화재 밀매단
2001년 4월 24일 서울지검 형사 7부는 사찰 주지, 전 고미술협회장, 현직 경찰관 등이 개입된 문화재 밀매단 24명을 문화재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검찰이 압수한 문화재만 용비어천가 진본(조선중기 간행본), 해인사 판당고(팔만대장경 보관) 중수발원문, 능엄경언해본, 묘법연화경(천태종 근본경전), 대반야바라밀경(보물급 불경), 익안대군(태조의 셋째 아들) 영정 등 국보 및 보물급 1000여 점에 달했다. 문화재 전문 털이범들은 전국 사찰의 불상 안에 놓인 문화재 등을 닥치는 대로 훔치거나 빼돌렸다. 이들은 국내에선 거래될 수 없는 도난 문화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한 뒤 일본에서 정상적으로 구입한 것으로 속여 국내로 들여오는 ‘문화재 세탁’도 했다. 사찰 주지와 고미술협회 관계자 등은 장물을 사들인 혐의로 붙잡혔다.
국립박물관의 국보도 털렸다
2003년 5월 15일 밤, 국립공주박물관에 30대 초반 남성 2명이 침입했다. 이들은 당직 직원을 묶은 채 국보 1점을 비롯해 총 4점의 유물을 훔쳐 달아났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가 털리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11일 뒤인 2003년 5월 26일 오전 1시20분. 국보 247호 공주 의당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경기도 용인시 명지대 인근 한 우유 대리점 출입문 앞 빈 화분 속에서 수건에 싸인 채로 발견됐다. 일행 중 한 명이 장물취득 혐의로 먼저 검거돼 범행을 자백한 뒤 공범을 설득해 국보를 돌려주게 한 것이다.
Q. 왜 국보 274호는 없나
A. 통영 발굴 ‘거북선 대포’
가짜로 밝혀져 국보 해제
어떤 것이 국보가 되나
유형문화재 중 역사·학술·예술·기술적 가치가 큰 것을 ‘보물’로 지정하는데, 거기서 특별히 뛰어난 것을 골라 지정한 문화재가 국보다. 즉 ‘보물 중의 보물’로 보면 된다. 국보는 건축물·책·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 등 다양하다. 국보를 정할 때는 ‘그 유례가 희귀한 것, 제작연대가 오래되고 시대를 대표하는 것, 우수하며 예술성이 높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 국보와 보물의 차이는 조선시대 남쪽 문이었던 숭례문과 동쪽 문이었던 흥인지문을 비교하면 뚜렷이 드러난다. 두 문은 모양과 용도가 비슷하나 숭례문은 조선 초기(1398년) 건립돼 현존 도성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됐으며 절제미와 균형미가 있다. 이에 비해 흥인지문은 조선 말기(1869년)에 새로 지은 것으로 장식과 기교가 과도해 우리 고유의 전통 건축미를 숭례문만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해외에 있는 문화재도 국보가 될 수 있나
국내법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 소재 문화재는 국보나 보물로 지정할 수 없다. 즉, 문화재보호법 자체가 국내에서만 해당되는 법이다.
국보로 지정되면 뭐가 달라지나
국보가 훼손돼 수리할 필요가 있다거나, 보존 처리를 해야 할 경우 국고와 지자체 예산의 보조를 받을 수 있다. 국립박물관 등에 관리를 위탁할 수도 있다. 문화재보호법 제44조에는 국가지정문화재를 소유하거나 관리하는 자는 그 문화재를 공개하는 경우 관람자로부터 관람료를 징수할 수 있도록 했다. 위헌 논란이 불거진 사찰의 ‘문화재관람료’ 징수는 그 조항에 근거를 둔 것이다.
어떤 경우에 국보에서 해제되나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거나 그 밖에 특별한 사유가 있으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그 지정을 해제할 수 있다.
국보에서 해제된 것이 있나
딱 한 건이다. 1992년 국보 274호로 지정된 ‘귀함(龜艦)별황자총통’은 4년 뒤인 96년 위작으로 밝혀져 국보에서 해제됐다. 해군 대령과 골동품상이 손잡고 가짜 유물을 거북선에서 사용한 대포로 둔갑시킨 사건이었다. 골동품상이 자신의 주물공장에서 대포를 정교하게 제작한 뒤 부식작업을 하고, 이를 경남 통영시 앞바다에 빠뜨린 뒤 해군 충무공해저유물발굴단이 이를 바다에서 건져 올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그래서 국보 총 목록에는 274호가 비어 있다.
해제된 번호는 다시 사용하지 않는가
해제되면 영구 결번이 된다. 국보 목록 중 결번은 딱 하나지만 보물에는 결번이 많다. 일단 보물로 지정된 것 중에서 좋은 것을 국보로 승격시키기 때문에 국보가 되는 순간 보물에서 해제되며, 그 보물 번호는 결번으로 남는다. 가령 가장 최근에 지정된 국보 309호와 310호 백자대호는 각각 보물 1424호와 1440호였다. 즉, 보물 1424호와 1440호는 결번이다.
숭례문은 왜 국보에서 해제되지 않았나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면 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는 경우가 있다.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이 2005년 화재로 완전히 녹아 버려 보물에서 해제된 게 대표적이다. 숭례문은 불에 타기는 했으나 석축 등의 뼈대가 남아 있었다. 그런 건축의 골조까지도 보물로 인정했던 것이기에 문화재위원회의 심의에서 국보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숭례문 복구의 한 과정으로 현장 발굴이 이뤄지고 있다. 숭례문 화재 1주년이던 2월, 일반에 공개된 복구 현장에는 아스팔트에 묻혔던 옛 도로와 하수도 시설 등이 드러나 있었다.
국보 중 제일 오래된 건
국보 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로 추정된다. 높이 3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 암반에 여러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암각화)이다.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람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는 호랑이·멧돼지 등을 사냥하는 장면 총 75종 2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 기법으로 볼 때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산문화재 중에선 0.03㎜ 간격의 선 1만3000여 가닥을 새겨 태양을 형상화한 청동거울 다뉴세문경(141호)과 의식을 행할 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방울일괄(146호) 등이 오래됐다.
국보 중 가장 큰 것은
여수진남관(304호)으로 추정된다. 1598년(선조31) 전라좌수영 객사로 건립한 이 건물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수군의 중심 기지였다.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건물 면적만 총 240평에 달한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신위를 모신 종묘정전(227호)은 19칸(101m)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단일 건물로는 가장 길다. 경복궁 근정전(223호)은 높이 34m의 2층 건물로, 그 높이로 따지자면 가장 큰 국보라 할 수 있다.
국보 중 제일 작은 건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126호) 등 각종 사리장치에 들어 있는 구슬들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작으리라 추정된다. 직경 5㎜ 안팎의 구슬이다. 사리장치에 있는 다른 유물들과 함께 국보로 일괄 지정되기에 이 작은 것들도 국보는 국보다.
국보 목록에 서민이 쓰던 것도 있나
왕실의 자료나 역사가 오래된 불교의 유물이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문헌 자료든 유물이든 지배계층의 것이 많이 남아 있고,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도 높게 매겨지는 게 사실이다. 서민들의 유물은 민속자료로 지정해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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