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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19] 게르니카: 학살의 비극…인류의 양심이 그린 걸작

이주헌


가자 공습과 겹쳐지는 무차별 살상극
피카소 작품은 20세기 미술 ‘아이콘’
팔레스타인 인권센터의 발표에 따르면, 최근의 가자 지구 전쟁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사람은 모두 1284명이라고 한다. 이 가운데 민간인 사망자 수가 894명으로, 다수가 여성과 어린이라고 하니 가자 지구 전쟁은 전쟁이라기보다 학살극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마스 병사들이 민간인 복장으로 싸우는 등 하마스가 민간인을 ‘인질화’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는 게 이스라엘의 변명이지만, 사망자 분류가 말해주듯 이는 분명히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무력행사였다. 이스라엘은 언젠가 인류와 역사 앞에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가자 공습은 가장 유사한 사례로 게르니카 공습을 떠올리게 한다. 1937년 4월 26일 발생한 스페인 파시스트 반란군의 게르니카 마을 공습은 전쟁사전에 ‘공포 폭격’(terror bombing)의 대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올라가 있다. 당시 스페인은 한창 내전중이었는데, 공화주의 정부의 전복을 꾀한 프랑코의 반란군은 스페인 북부의 공화주의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주요 근거지인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하기로 결정한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은 이 공습은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대령의 지휘 아래 독일 콘도르 군단 주도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건물 4분의 3이 완파됐고 나머지도 큰 피해를 입었다. 정확한 사망자 통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적게는 250여명, 많게는 1600여명의 민간인이 이 무차별 공습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게르니카는 바스크족 공화주의자들의 주요 근거지이기는 했으나, 결코 공습의 타깃이 될 만한 마을은 아니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주변의 다리와 도로를 타격해 공화주의자들의 병력 이동과 보급에 지장을 줄 필요는 있었지만(그래서 애초에 작전은 여기에 목표를 두고 수립됐다), 민간시설밖에 없는 마을 중심부를 폭격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일이었다. 더구나 마을의 장정 대부분이 전선에 나간 상태여서 폭격을 가할 경우 재난은 고스란히 여성과 아이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 왜 파시스트들이 마을 중심부를 공습했는가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이고 잔인한 폭격을 통해 공화주의자들에게 위협과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히틀러는 극우주의자들 사이의 연대를 과시하는 한편 독일 공군력에 대한 기술적 시험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이 공습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알려지자 유럽은 큰 충격에 빠졌다. 공습으로 무고한 민간인, 그것도 여성과 어린이가 대량으로 살육되었다는 사실은 문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5월 1일, 파리는 그때까지 있었던 노동절 시위로는 최대 인파인, 100만명이 넘는 항의시위대로 도시가 거의 마비되어 버렸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 역시 파리에서 신문을 통해 소식을 보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마침 그해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출품할 작품 주제를 놓고 고민하던 그는 이 비극을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석 달을 매달린 끝에 마침내 저 유명한 <게르니카>를 완성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아이콘이 되는 그림이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바로 그런 그림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대표 아이콘이 다빈치의 <모나리자>라고 한다면, 20세기 미술의 대표 아이콘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다. <게르니카>가 이런 지위에 오른 것은 그 조형적 성취가 탁월한 까닭도 있지만, 작품의 수용 과정에서 이 그림이 인류의 양심을 대변하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버린 탓이 크다.
물론게르니카의 비극은 다른 화가들에 의해서도 그려졌다. 미국 화가 필립 거스턴의 <폭격>도 그런 그림의 하나다. 동그란 톤도 형식으로 그려진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강렬한 폭발과 그로 인해 사방팔방으로 튕겨나가는 가엾은 몸뚱어리들을 본다. 당시 공화국 정부를 지키려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가 죽은 미국 젊은이가 1천여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얼마나 많은 지성이 이 사건에 공분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게르니카 이후에도 민간인 밀집 지역에 대한 공습은 스페인 내전과 2차 대전 내내 이어졌는데, 그 참상은 호라시오 페레르, 록웰 켄트 등의 화가들에 의해 잇따라 그려졌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이 화가들의 그림과 형식적인 측면에서 크게 구별되는 부분은 사실적인 묘사를 채택하지 않았다는 점과 흑백 단색조로 그려졌다는 점이다. 관념적으로 전쟁의 비극을 전달하는 데는 생생한 사실 표현이 제일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비사실적인 피카소의 <게르니카>만큼 전쟁의 비극과 공포를 강렬하게 전해주는 그림도 드물다. 그 과격한 해체로부터 비극의 외피가 아니라 본질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죽은 아이를 팔에 안은 어머니, 황소, 창에 찔린 채 요동치는 말, 주검, 절규하는 여인 등이 보인다. 공간은 실내처럼 보이나 벽이 무너지고 한쪽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그림의 해석과 관련해 피카소는 도상 하나하나가 특별한 상징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황소는 황소고, 말은 말”이라며, 느껴지는 대로 해석할 것을 관객에게 요청했다.
그럼에도 미술비평가와 미술사가들 사이에서는 큰 틀에서 해석의 일치를 보이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등장인물의 형상과 제스처가 저항을 나타낸다는 것과, 흑백 단색조는 음울함과 고통, 혼란을, 무너지는 벽과 타오르는 건물은 내전의 파괴성을 드러낸다는 해석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장의 등은 태양을, 부러진 칼은 민중의 패배를 상징하는 것이 된다.
만국박람회에 걸렸을 당시 이 그림은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박람회 직후부터 50년대까지 세계 각국에 빈번히 초대되어 전시되면서 20세기 반전사상과 양심의 대표적인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일화에 따르면,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나?”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피카소의 답은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였다. <게르니카>의 힘은 다른 무엇보다 인류의 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화가는 그런 식으로 강조했던 것이다.
프랑코 독재 체제가 막을 내리고 스페인이 민주화되어 1981년 스페인에 반환될 때까지 이 그림은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수장됐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는 그림 앞에서 반전 시위가 벌어지는 등 반전의 상징으로서 제 몫을 톡톡히 했다.
이렇게 피카소의 그림을 통해 인류가 게르니카를 잊지 않는 동안 역사는 최근까지 게르니카의 한을 하나씩 풀어왔다. 1997년 공습 60년을 맞아 당시 독일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일이 한 역할에 대해 사죄하는 편지를 게르니카의 생존자들에게 써 보냈다. 이듬해 독일 의회는 독일 군사기지에서 콘도르 군단 소속 군인들의 이름을 제거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07년 공습 70년에는 바스크 의회가 히로시마, 아우슈비츠 등지의 대표들과 만나 ‘평화를 위한 게르니카 선언문’을 발표하고 게르니카를 ‘세계 평화의 수도’로 삼자고 호소했다.
» 피카소, <게르니카>, 1937, 유화, 350×780,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 페레르, <마드리드>, 1937, 유화, 148×128.5㎝, 개인 소장, 프랑코의 반란군은 게르니카 외에도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세비야 등을 공습했다. 아이를 안고 패닉 상태에 빠진 어머니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 거스턴, <폭격>, 1937~38, 유화, 뉴욕 매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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