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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0] 사냥감 그림: 벽에 걸어 과시한 특권과 자부심

이주헌


귀족 계급 따라 사냥동물 달라
곰·멧돼지 머리는 식탁에 장식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한다. 불교의 영향이 큰 우리나라에서 사냥감 그림이나 사냥 그림을 보기는 쉽지 않다. 고구려 벽화 수렵도가 유명하지만, 이는 매우 드문 사례다. 사냥감 그림이 발달한 서양과 대비되는 이런 전통에서 우리는 다시금 미술에 나타난 문화의 차이를 생각해 보게 된다.
서양에서 사냥감 그림(game still lifes)은 17세기 정물화의 발달과 더불어 발달했다. 그전에도 부엌 그림이나 푸줏간 그림, 사냥 그림을 통해 사냥감의 모습이 빈번히 화포에 오르기는 했지만, 사냥감 자체가 핵심적인 주제로, 또 독립된 장르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부터다.
이 시기 사냥감 그림이 중요한 정물화의 하나로 부상한 것은, 간단히 말해 귀족들의 특권을 미학적으로 인증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우리가 보기에 그저 죽은 동물을 쌓아놓은 그림이 뭐 그리 보기 좋다고 벽에 걸었을까 싶지만, 그림의 주인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여봐란듯이 과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사냥감 그림을 벽에 내걸었다. 1774년 시인 괴테가 벤스베르크 성을 방문했을 때 접견실과 대기실 벽에 걸린 얀 베이닉스의 사냥감 그림들을 보고 기뻐했던 것은,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지위와 품격을 만족시켜 주는 그 스타일에 매혹되어서였다고 하겠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 사냥은 누구에게나 허락됐다. 중세 독일의 법은 모든 자유인에게 사냥을 허용했다. 그러나 제후들이 땅에 대한 주권을 틀어쥐게 되고 주인이 없는 땅이나 공유지에 대한 권리를 한층 강력하게 주장하게 되면서 사냥은 배타적인 권리로 제후들에게 귀속되어 버렸다. 제후들은 이 특권을 오로지 귀족들에 한해 개방했다. 이런 제한에 대한 법적 완성이 이뤄진 것은 독일의 경우 1500년 무렵이었다.
자연히, 이는 농민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숲에서 단백질 공급원을 찾던 농민들은 그 권리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일 년에도 몇 번씩 대규모 사냥을 나온 제후 일행을 위해 갖가지 뒷바라지를 해야 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거나 개도 빌려줘야 했다. 사냥 나온 일행이 동물을 잡는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밭을 망가뜨려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그런 농민이 남몰래 숲에 들어가 사냥을 하다 들키면 갤리선으로 보내져 강제 노역에 처해지는 등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이런 억압과 불평등에 얼마나 한이 맺혔는지 독일 농민전쟁 당시 농민들의 주요 요구사항 가운데 하나가 “사냥과 고기잡이의 자유”였다.
빌럼판 알스트의 <사냥 장비와 죽은 새>는 작은 사냥감을 소재로 한 그림이지만, 사냥이라는 행위가 갖는 이런 귀족적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화가는 배경을 어둡게 칠해 회갈색 새와 푸른색 사냥 가방이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사냥가방은, 금실로 수가 놓여 있어 값비싼 제품임을 알 수 있다. 벽에는 술로 장식된 사냥나팔과 화약통이 매달려 있다. 매우 섬세하면서도 사실적인 표현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데, 그렇게 물질의 존재감을 부각시킴으로써 귀족적 권리에 대한 뜨거운 선망을 불러일으킨다.
사냥의 권리가 주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귀족들 사이에서도 차별이 존재했다. 제후·영주들은 큰 사냥감을 사냥할 수 있었지만, 일반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작은 사냥감만을 잡아야 했다. 그런 점에서 단출하게 새 한 마리를 잡은 그림의 사냥꾼은 제후보다는 일반 귀족 계급에 속한 이였을 것이다.
프란스스니더르스의 <가금류와 사냥한 고기>는 풍성함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여러 종류의 새와 멧돼지 머리가 함께 놓여 있다. 이렇게 많이 잡은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이 무리를 이루어 사냥에 나섰음이 분명하다. 그로 인해 그림의 동물들은 일종의 전리품처럼 보이고, 화가의 꼼꼼하고 화려한 표현은 그 승리의 영광을 찬미하는 듯하다.
가축을 잡아 만든 요리에만 익숙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런 야생동물은 그다지 매력적인 먹거리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 가장 훌륭한 먹거리는 야생에서 사냥한 짐승들이었다. 식문화 저술가 하이드룬 메르클레는 <식탁 위의 쾌락>에서 이렇게 썼다.
“사냥한 동물을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숲을 소유한 사람들뿐이었다. 결국 멧돼지 구이나 노루의 넓적다리 고기는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음식이었다. … 야생동물의 고기는 지금도 여전히 희귀하고 특별한 음식이다. 그래서 계절에 따라 노루, 사슴, 꿩, 메추라기 그리고 야생 오리가 최고 레스토랑의 메뉴에서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에서 우리가 야생동물 요리를 접할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이런 귀족의 허영을 체험해 볼 좋은 기회라 하겠다. 물론 당시 모든 야생동물이 먹거리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희귀한 것이라 하더라도 도저히 사람이 먹기에는 한계가 있는 게 있었다. 그림에서 목을 밑으로 축 늘어뜨리고 있는 백조가 그런 짐승이었다.

백조는 기름기가 많아 식재료로 삼기에는 부적합했다. 물론 그럼에도 바로크 시대의 사람들은 곧잘 이 희귀한 짐승을 구워 식탁에 내놓았다. 그때는 통구이로 만든 뒤 다시 가죽을 씌우거나 깃털을 입혀 식탁의 멋진 장식물로 삼았다. 멧돼지 머리나 곰의 머리도 요리 장식물로 삼기도 했다. 이런 장식물은 사냥의 추억을 되살려주는 기념물로서 귀족들의 식탁에 무용담이나 화제의 성찬이 넘치게 했다.
스니더르스의 그림에 좀더 시선을 두어 보자. 찬찬히 살피노라면 그림 오른쪽 아래에 살아 있는 닭 두 마리가 보인다. 서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 이채로운데, 일종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이미지가 아닐 수 없다. 야생에서 자유를 구가하던 것들은 다 죽어 선반에 쌓여 있고, 자유를 포기하는 대신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것들은 저렇듯 살아 있다. 저들이 지금 대화를 나누는 거라면, 자유를 잃더라도 목숨 부지하는 게 최고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 역시 곧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이다.
인간이 최고의 사냥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도구의 발달과 도우미 동물 덕분이었다. 활이 발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만8000년 전쯤이다. 인류가 개를 기르기 시작한 것은 1만5000년 전부터다. 개의 집짐승화 이래 사람들은 맹금류나 족제비도 길들여 사냥에 활용했다. 하지만 사냥 도우미로서 개만큼 유용한 동물은 없었다. 사냥을 뜻하는 그리스어 ‘키네기아’(kynegia)의 어원 ‘키노스’(kynos)가 개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사냥과 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샤르댕은 <사냥감과 사냥개>에서 이 최고의 사냥 도우미가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 개의 날렵한 몸매와 총명한 눈초리, 위엄 있는 자세는 사냥꾼이 그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얻었을지 짐작하게 한다. 오른쪽에는 희생물이 된 토끼와 새가 보인다. 마치 과거 귀족과 평민의 대비되는 운명을 보는 듯하다. ‘이긴 자’의 자부심 같은 것이 은연중 느껴지는 그림이라고나 할까.
» 스니더르스, <가금류와 사냥한 고기>, 1614, 유화, 156x218㎝, 쾰른 발라프 리하르츠 미술관
» 알스트, <사냥 장비와 죽은 새>, 1668, 유화, 68x54㎝, 카를스루에 국립 미술관
» 샤르댕, <사냥감과 사냥개>, 1730년께, 유화 172x139㎝, 패서디나 노턴 사이먼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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