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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22] CIA와 추상표현주의: 냉전 문화전쟁의 무기로 이용된 ‘전위’

이주헌


뉴욕 현대미술관을 작전세력 끌어들여
은밀 공작…큰손들 구매도 뒤에서 독려
록펠러 부통령은 엄청난 차익 챙기기도
지금까지 미술시장에서 거래된 최고가의 미술작품은 잭슨 폴록의 <넘버 5>다. 2006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4천만달러에 낙찰이 됐다.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2천억 원을 가뿐히 넘긴다.
대중에게 그토록 인기가 있는 반 고흐, 르누아르 등 인상파 대가들조차 따돌리고 폴록이 이렇게 최고의 작품 값을 자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일정 부분 냉전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있다.
폴록은 추상표현주의의 빛나는 스타다. 추상표현주의는 2차 세계대전 말 형성되기 시작해 1950년대에 절정에 이른 미국의 미술 사조다. 이름이 시사하듯 추상의 세계를 추구하되 이를 표현주의적으로 거칠게, 과감하게 표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폴록을 위시해 빌럼 더 코닝,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등이 그 대표주자다. 이 가운데 폴록이 최고의 간판스타가 된 것은,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물감을 흩뿌리는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추상표현주의의 심벌로 안성맞춤이었던데다, 개인주의·자유·순수성 같은, 당시 ‘자유세계’가 공산주의에 맞서 외치던 가치를 풍성히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중앙정보국이 폴록과 추상표현주의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순수성’ 때문이었다.

중앙정보국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은 2차대전 때 나치와 문화를 놓고 정보·전략 싸움을 벌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후의 중앙정보국은 소련과 ‘문화전쟁’을 벌여야 했다. 파시즘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는 유럽에서 공산주의의 인기를 크게 높여 놓았다. 공산주의는 특히 서유럽의 저명 예술가들과 문화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갖고 퍼져나갔다. 피카소 등 유명 인사들이 공산당에 가입했고,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유럽의 흔들림 앞에 중앙정보국은 다급했다. 이념전쟁은 아무래도 공산주의 이론과 생리를 잘 아는 좌파 출신이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미국 공산당 창립멤버인 제이 러브스톤과 노조활동가 어빙 브라운을 협력자로 끌어들였다. 하지만 유럽의 노조들을 분열시키는 자유노조 공작만으로는 한계가 많았다. 무엇보다 문화면에서 소련을 압도하고 유럽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했다. 이는 중앙정보국의 자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문가들의 도움이 절실했던 중앙정보국은 이 ‘문화전쟁’의 핵심 작전세력으로 뉴욕 현대미술관(모마, MoMA)을 끌어들였다.
모마이사회의 존 헤이 휘트니와 윌리엄 버든이 각각 국가안전보장회의에 직보하는 심리전략위원회 위원과 중앙정보국의 비밀 공작기금을 세탁하는 파필드 재단(Farfield Foundation) 이사장으로 위촉됐다. 모마의 실질적인 지배자 넬슨 록펠러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심리전을 위한 핵심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관장을 지낸 톰 브레이든은 중앙정보국 요원이 되어 문화전쟁을 지원하는 실무 총책임을 맡았다.
중앙정보국의 목표는 소련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미국의 미술을 진흥시켜 미국의 사상적·문화적 우위를 유럽을 비롯한 세계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은 정치적 목표와 이념에 충실히 복무하고, 전체와 집단을 중시하며, 양식상으로는 구상적인 미술이었다.

이에 따라중앙정보국은 모마 출신 인사들의 협력을 받아 정치와 이념으로부터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이며, 양식상으로도 추상적인 미술, 곧 추상표현주의를 적극적으로 밀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순수를 표방한 추상표현주의가 그 어느 정치미술보다 더 정치적인 미술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공작은 비밀리에 수행됐다. 중앙정보국이 추상표현주의를 밀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될 경우 이는 대외적으로 미국에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추상표현주의 같은 전위예술을 좋아하지 않는 미국내 보수인사들이 반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선호한 미술가는 전형적인 미국인들의 모습을 구상으로 표현한 노먼 록웰이었다. 그러나 유럽의 지성들에게 그와 같은 ‘철 지난’ 구상화로 미국 문화의 우수성을 과시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었다. 오히려 미국을 문화의 변방 국가로 보이게 할 위험성이 있었다. 반면 추상표현주의는 유럽의 전위미술보다 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인상을 주었을 뿐 아니라, 중앙정보국의 러시아 담당 도널드 제임슨의 말처럼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실제보다 더 양식화되고 완고하고 제한된 미술로 보이게 만드는 미술”이었다. 그런 까닭에 중앙정보국은 은밀히 그러나 강력히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지원했다.
유럽에서의 공작은 ‘문화적 자유를 위한 회의’(Congress for Cultural Freedom)라는 중앙정보국의 전위조직을 통해 주로 전시를 개최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1952년 파리에서 열린 ‘걸작의 향연’전, 1955년 로마에서 열린 ‘젊은 화가들’전이 그 대표적인 전시다.
물론 큰손들이 작품을 많이 구매하도록 독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미국 안에서도 추상표현주의에 우호적인 환경이 만들어지도록 많은 노력이 펼쳐졌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비평가로 꼽히는 클레먼트 그린버그는 모마와의 교감 속에서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는 추상표현주의가 국제적으로 공인받는 데 큰 보탬이 됐다. 그는 순수한 비평의 전개에 만족하지 않고 1950년 중앙정보국의 미국 내 전위조직인 ‘문화적 자유를 위한 미국 위원회’(American committee for Cultural Freedom)에 가입해 미국의 엘리트들이 추상표현주의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선동가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당시 매주 500만 부를 발행하던 <라이프>가 1949년 8월8일치 대형 특집으로 ‘미국 미술의 빛나는 새 현상’을 게재한 것은 이런 시류와 무관하지 않았다.
중앙정보국과 추상표현주의의 이와 같은 만남은 결국 추상표현주의가 미국 미술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전세계적인 미술 사조로 우뚝 서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전쟁 전에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대체로 구상적인 전통을 유지하던 미국 화단에서 이처럼 전위적인 미술이 급부상한 것은, 이후 미국 미술이 세계 미술계를 주도하는 헤게모니를 쥐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일정 부분 이런 전략적 캠페인의 성과와 영향 덕이었다.

당시 이런 노력에 동참했던 중앙정보국의 협력자들은 그 동기를 애국심과 문화지원 등에서 찾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록펠러는 추상표현주의 작품이 쌀 때 많이 사들여 이후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보았다. 국가예산이 비밀공작에 쏟아지는 상황에서 추상표현주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록펠러는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밀어야 하는 이유가, 이 그림들이 “자유 기업 회화”(free enterprise painting)이기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체이스 맨해튼 은행을 장식하기 위해 구입한 것만 2500여점에 이르렀다. 가히 기업적 투자였다.
» 잭슨 폴록, <하나: 넘버 31 1950>, 1950, 혼합 매체, 269.5x530.8cm, 뉴욕 현대미술관. 형상도 주제도 찾을 수 없는 그 이유가 공산주의와의 ‘문화전쟁’에서 가장 유효한 무기가 됐다.
» 1958년 미술관 화재 때 소방관과 이야기하는 넬슨 록펠러(오른쪽)
» 뉴욕 현대미술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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