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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16] 지적 호기심의 아카이브 : 쿤스트카머

이주헌


진귀품 모아둔 경이로운 방 18세기 박물관 뜨면서 퇴조
“아이아스는 저 아킬레우스의 방패에 새겨진 참으로 의미심장한 부조, 가령 바다와 땅, 땅에 산재하는 도시, 별 박힌 하늘, 플레이아데스 성단, 히아데스 성단, 바다에 들 수 없는 곰자리, 그리고 오리온의 저 빛나는 칼날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영웅 아킬레우스의 유품을 놓고 아이아스 장군과 다툼을 벌인 오디세우스가 그리스 군대 앞에서 펼친 주장이다. 아이아스가 제아무리 무공이 대단해도 자신이 아킬레우스의 유품 상속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방패 하나를 보더라도 단순히 무기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서 우주의 법칙과 역사, 문화를 읽어내는 지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문명이 동터오던 시절부터 지식은 인간의 가장 강력한 힘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사람들은 호기심을 자아내거나 지성을 자극하는 사물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고대 로마의 전기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그의 집을 “조각상과 회화뿐 아니라 오래됐거나 진기한 사물들, 이를테면 카프리 섬에서 발견된 기괴한 야수들의 거대한 유해로 장식했다”고 기록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컬렉션 또한 지배자로서 세계를 한층 폭넓게 이해하고자 했던 열망의 발로였다.
지적 욕구를 동반한 이런 종류의 수집열이 유럽 역사에서 열정적으로 나타났던 최초의 시기는 성기 르네상스 무렵부터 바로크 시기까지다. 당시 제후들은 이상하고 특별한 사물들, 그러니까 원래의 형태보다 아주 크거나 작은 것, 이국적인 것, 생소한 것, 기괴한 것, 드문 것, 그리고 아름답거나 우수한 것 등을 적극적으로 수집했다. 이런 진귀한 사물들을 모아놓은 곳을 독일어로 쿤스트카머(Kunstkammer) 혹은 분더카머(Wunderkammer)라고 불렀는데, 우리말로 하면 각각 ‘예술의 방’, ‘경이의 방’ 정도가 되겠다.
오늘날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조상쯤으로 볼 수 있는 이 공간들에는 보통 갖가지 자연의 산물과 인공 사물들, 예술품이 뒤섞여 있었다. 예를 들면 불가사리, 원숭이 이빨, 상어 지느러미, 악어가죽, 인도의 배, 인광성 광물, 이집트 조각상, 동전, 메달, 회화, 조각 등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이야기하면 ‘쿤스트’나 ‘분더’ 어느 하나로 부르기 어려운, ‘쿤스트’와 ‘분더’의 의미가 결합되어 있는 공간이 쿤스트카머였다. 르네상스가 전인(全人)의 개념을 꽃피운 시대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왜 이처럼 한 공간에 온갖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 몰려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있다.
프란츠 프랑켄의 <쿤스트카머 컬렉션>은 그런 쿤스트카머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특이한 조가비들과 메달, 보석, 로마시대의 도기, 명나라 도자기, 조각과 그림 등이다. 벽에 걸린 그림들 사이에도 보존 처리된 열대어류와 호박구슬 끈이 걸려 있다. 오늘날의 관객으로서는 문화인류학이나 생물학 같은 학문의 범주에 따라 대상을 분류해 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을 것이다. 특히 개별 학문의 대상이 미술품과 함께 놓여 있는 게 영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앎의 대상과 감상의 대상은 구별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지만 당시의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좀 다르다. 그들에게 그림은 오늘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한 감상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공간과 사물, 종교에 대한 중요한 정보와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실물로 가져올 수 없는 먼 곳의 풍경이나 성경상의 사건들을 ‘수집’ 가능하게 해주는 게 그림이다. 오래 보존하기 어려운 사물의 경우에는 그림이 그 이미지를 포착해 영구히 보존해주기도 한다. 테이블 위의 겹쳐져 있는 그림 두 개 가운데 뒤에 있는 게 꽃그림인데, 거기에는 사시사철의 꽃이 함께 그려져 있다. 금세 피었다 지는 꽃, 그것도 모든 계절의 꽃이 함께 제 모습을 잃지 않고 보존될 수 있는 방법은 이처럼 그림으로 그려 놓는 것밖에 없었다. 그림은 이처럼 실체의 대체물이었다. 거기다 아름다음으로 감동까지 더해주니 진귀한 물건들 사이에 모셔 놓기에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실체를 대체하는 그림의 이런 능력 덕분에 때로는 그림 자체가 일종의 ‘버추얼(가상) 쿤스트카머’가 되기도 했다. 프랑켄의 그림처럼 쿤스트카머 자체를 그린 그림이 바로 그런 그림이다. 판 케설이 그린 <대륙의 알레고리>도 ‘버추얼 쿤스트카머’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다 모아놓기 힘든 것들을 불러 모아 지극히 진귀한 쿤스트카머를 만들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 네 대륙의 사람들과 특산품, 풍경, 동물들을 백과사전적으로 모아 놓았다. 오로지 그림이기에 가능한 쿤스트카머다.
이 4부작은 대륙별로 한 개의 큰 화포가 해당 대륙의 인종과 문화, 특산품들을 보여주고, 이를 프레임처럼 둘러싼 16개의 작은 그림이 주요 도시의 풍경과 동물, 곤충 등을 보여주는 형식이다.
쿤스트카머의 형식을 띠었으므로 화가는 갖가지 사물들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빽빽이 그려 넣었는데, 그럼에도 아메리카 대륙에 동남아시아의 징이 그려져 있다든지, 아프리카 대륙에 일본산 바구니가 그려져 있는 등 사실의 오류가 여기저기서 보인다. 혼란스럽게 구성되어 있던 쿤스트카머의 수집물처럼 당대인들의 사실 인식은 아직 과학적인 엄밀성을 지니고 있지 못했다.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일각수의 꼬리를 수집물로 자랑하는 쿤스트카머도 있었으니 화가들의 그림에서 이런 잘못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지식의 역사 측면에서 볼 때 쿤스트카머의 탄생은, 중세 말까지 유럽의 과학 인식을 뒷받침해온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퇴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은 물질론, 체계론, 우주론이 정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랜드 시스템’인데다 목적론적 성격을 띠어서 신앙의 시대였던 중세 내내 공고하게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들어 장인들의 관찰과 경험이 지식인들의 이론과 결합해 조작과 실험, 경험을 중시하는 지적 풍토를 낳게 되고, 비록 오늘의 시각에서는 비과학적이라 할지라도 실험에 매달리는 연금술이 성행하게 되면서 경험적인 탐구의 가치가 크게 높아지게 되었다. 또 지리상의 발견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아시아로부터 흘러드는 다양하고 낯선 산물들을 빈번히 접하게 된 것도 이런 경험적 탐구의 충동을 크게 북돋웠다. 유럽의 왕과 제후들은 그 변화에 부응해 그들의 실내를 진귀한 컬렉션으로 가득 채움으로써 시대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이렇듯 강렬하고도 인상적인 이미지로 보여주게 된 것이다. 진귀함에 기초한 것인 만큼 쿤스트카머는 제후들의 지위와 특권을 표상해 주는 훌륭한 수단이기도 했다.
쿤스트카머가 처음 생겨난 역사 공간은 16세기 중반 독일이다. 쿤스트카머와 분더카머라는 용어는 1564~66년 프로벤 크리스토프 폰 치머른 백작이 쓴 <치머른 가계 연대기>에 최초로 기록됐다. 이탈리아에서는 쿤스트카머를 스탄치노(stanzino), 스투디올로(studiolo)로 불렀고, 영국에서는 ‘진품실’(cabinet of curiosities), 원더체임버(wonder chamber) 등으로 불렀다. 계몽의 시대인 18세기 들어 박물관이 부상하면서 쿤스트카머의 시대는 저물게 된다.
» 프랑켄, <쿤스트카머 컬렉션>, 1636년 이후, 나무에 유채, 74x78㎝, 빈 미술사 박물관
» 판 케설, <대륙의 알레고리> 중 ‘아메리카’, 1666, 동판에 유채,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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