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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형의 ‘큐레이터 따라하기’] ① 노라 리고라노·마셜 리즈의 얼음조각

이대형


어떤 작품이 보물인지 찾고 이 작품이 왜 저 작품보다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작품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그 작품이 가장 빛나도록 하는 사람, 우리는 그를 큐레이터라고 부른다. 큐레이터는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열정과 꿈을 지켜내고 이를 새롭게 진열하는 사람이다. ‘First-Class 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는 오늘부터 2008년 상반기 ‘블루닷 아시아’ 기획으로 큰 주목을 받은 큐레이터 이대형씨의 ‘큐레이터 따라하기’를 연재한다. 그는 온라인 쇼핑몰에서부터 백화점 상품 진열대, 자동차 홍보 매장, 패션쇼에 이르기까지 콘텐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갈 것이다. 미술과 기업, 미술과 패션, 미술과 정치, 큐레이터와 아트페어, 새로운 젊은 아티스티들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세상을 좀더 재미 있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지면에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주>
■ ‘돈에 대한 욕심’ 통쾌하게 조롱
▲ 얼음 조각 'ECONOMY'가 시간이 흐르면서 녹아내리고 있다. E와 C가 사라진 자리는 뒤늦게 후회하는 'O NO'라는 짧은 외마디 탄식이 남았다.
번 영의 영광은 한 세기를 가지 못했다. 2008년 10월 29일은 1929년 경제 대공황의 불씨가 되었던, 미국 주식 시장을 어둠 속으로 몰고간 ‘검은 화요일(Black Tuesday)’이 있은 지 79년째 되는 날이었다. 미연방정부는 이날의 징크스를 피하기 위해 이자를 대폭 낮추었지만 어떤 예술가들은 그런 뒷북치는 행정을 조롱하며 재기발랄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날 오전 9시 월가 중심부에 있는 폴리광장에 등장한 조각가 노라 리고라노(Nora Ligorano)와 마셜 리즈(Marshall Reese)가 그 주인공이다. 이미 여러 차례 호흡을 맞춘 작가들답게 능숙한 손놀림으로 얼음을 잘라 ‘E.C.O.N.O.M.Y.(경제)’를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24시간에 불과했다. 뉴욕 대법원 건물을 배경으로 바람과 추위와 싸워가며 이 두 괴짜 예술가는 왜 ‘ECONOMY’를 설치했을까.
1.5m 높이에 4.5m 길이의 투명한 얼음 조각은 다이아몬드 결정체처럼 화려해 보였다. 반 세기 동안 이룩한 미국의 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위용이었다. 하룻밤 만에 갑자기 생겨난 얼음 조각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작품 ‘ECONOMY’ 앞에 환하게 포즈를 취하고 웃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암울한 경제상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수록, 그리고 그들의 ECONOMY에 대한 열기가 뜨거울수록 얼음조각이 녹는 속도는 그에 비례해 더 빨라졌다.
얼 음 표면이 녹기 시작해 글씨가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어떤 글씨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흉물스러워졌다. 화려함은 일장춘몽이었던 것일까. E와 C가 사라진 자리는 뒤늦게 후회하는 ‘O NO’라는 짧은 외마디 탄식만이 남겨졌다. 얼음 조각을 다시 복원하기에는 질퍽하게 녹아버린 물의 행방이 모연했다. 이 녹아 버린 얼음조각을 보고 누구를 원망해야 할까.
ECONOMY! 즉 돈은 있다가도 얼음처럼 한 순간에 녹아 없어진다. 한 낮에 신기한듯 만지작 거렸던 여고생들의 소행일수도, 아니면 너무 취약하고 작게 만든 조각가의 잘못일수도, 아니면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얼음조각 ECONOMY는 녹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ECONOMY가 완성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 화려함에 취했다. 그래서 날씨로부터, 사람들의 지나친 접근이 가져오는 온기로부터 그토록 취약할 수밖에 없는 ECONOMY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시장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행정부를 고발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우리는 그토록 돈에 열광했는가’고.
돈에 대한 맹목적 열광은 절벽을 향해 집단자살을 감행하는 노르웨이 레밍 쥐를 연상시킨다. 보다 더 큰 집을 사기 위해 무리해서 은행 대출을 받았고 또 그것이 돈을 버는 방법인줄 알았다. 투자전문가들은 오늘날 같은 저금리 시대에 아직도 투자 포트폴리오가 없냐며 핀잔을 주고 경쟁적으로 고객유치에 나섰다. 위험은 1%만 노출시키고 수익은 200% 뻥튀기는 방법은 순서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 괴짜 예술가 노라 리고라노와 마셜 리즈가 하룻밤 만에 완성한 얼음조각 'ECONOMY'. 1.5m 높이에 4.5m 길이의 이 투명한 얼음조각은 처음엔 다이아몬드 결정체처럼 화려했지만 경제위기가 갑자기 닥쳐왔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 문, 텔레비전, 잡지에는 온통 ‘부자되세요’가 돌림노래로 흘러나왔다. 어두운 동굴을 맨발로 걸어가면서도 고도의 감각을 집중해 위험을 감지하고 피할 수 있었던 인간의 생존본능이,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이 들이대는 매혹적인 수치 앞에서 여지 없이 무너져 내린 지난 3년이었다.
숫자는 분명 수학이고 과학이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수치를 근거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고 투자할 타이밍과 뒤로 물러날 타이밍을 읽어낸다. 그런데 많은 경우 직관, 도덕, 인문학, 철학적인 요인이 빠진다. 비물질적인 요인들의 효과를 수치로 계량화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인간이 하는 일이고 인간을 위한 일인데 인간에 대한 이해를 외면하고 숫자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실수를 반복하는 현실이다. 전 세계에 불어닥친 금융 위기와 실물 경제 위기의 이유가 어쩌면 지나치게 수치에만 맹목적으로 의존한 탓은 아닐지 묻고 싶다. 이번 경제 위기는 전 세계가 똑같은 출처의 정보를 똑같은 성능의 컴퓨터에 입력하고 똑같은 회사의 연산 프로그램으로 솔루션을 구하고 있어 생겨난 위기다. 돈에 대한 욕심이 그려낸 장밋빛 미래를 좇는 맹인들의 행렬이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제국의 완성 뒤엔 여지없이 제국의 몰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로마가 그랬고 중국이 그랬다. 그러나 인간의 건망증은 자주 이 명백한 진리를 간과한다. 돈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다양한 가치를 더욱 빛내주는 역할을 할 때 비로소 경제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한때의 부귀영화다. 얼음 조각 ECONOMY를 관찰하며 매우 짧은 시간 동안 제국의 완성과 몰락을 지켜봤다. 한 순간이었다. 비록 찰나였지만 이것이 주는 교훈을 느끼고 배워야 한다.
리고나노와 리즈. 이 두 예술가의 얼음조각은 허무하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올 것이다. 우리에겐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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