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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⑥누드미술의 기원(상)

이주헌

첨부파일 : 6000122532_20081111.JPG


누드 미술 하면 사람들은 여성 누드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누드 회화나 조각의 대부분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미술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누드 미술의 기원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은 주로 남성을 누드로 표현했다.
헬레니즘기(기원전 4세기 중반~2세기 중반)에 들어서면 좀 달라지지만, 그보다 이른 아르카익기(기원전 7~6세기)와 고전기(기원전 5세기~4세기 중반)의 그리스에서는 남성을 표현할 때는 누드로, 여성을 표현할 때는 코스튬(옷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했다. 남자를 옷 입은 상태로 표현하거나 여자를 옷 벗은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둘 다 매우 낯설고 부적절한 것으로 보았다.
“벌거벗은 남자들을 보는 것을 그리스 사람들이 추잡하고 우습게 생각한 것은 그다지 오래된 일이 아니라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시대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때까지 그리스 남성들이 일상에서도 벌거벗고 지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남성 누드는 예술 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이처럼 일상의 관습으로도 빈번히 나타났다.
물론 그리스 남성들이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벌거벗고 돌아다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을 할 때 그들은 공중 앞에서 거리낌 없이 옷을 벗었고, 향연과 같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곧잘 알몸이 되곤 했다.
그리스 남성들이 운동을 할 때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체육장(김나시온, gymnasion, 영어·라틴어로는 gymnasium)이라는 말이 ‘벌거벗은’이라는 의미를 지닌 김노스(gymnos)로부터 왔다는 데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김나시온에서 그리스 남성들은 알몸으로 체력을 연마하며 그들의 육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뽐내고 감상했다. 올림픽 경기에서도 선수들은 나체로 경기에 임했다.

» <벨베데레의 아폴론> 기원전 330~320년께의 청동 조각을 로마 시대에 모각. 대리석, 바티칸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리스인들의 이런 풍습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원반에 모든 정신을 집중한 남자는 그 정신과 육체의 하나 됨으로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의 절정을 보여준다. 격렬한 찰나의 동작이 수정같이 투명한 영원으로 얼어붙었다고나 할까. 원반을 던지는 이도 그를 바라보는 우리도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져든다.
아름다운 작품을 보고 깊이 감탄하는 한편으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가슴에 품게 된다. 왜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남성 누드만을 고집했을까? 왜 여성을 누드로 표현하기를 꺼렸을까? 여성 누드가 지닌 지고의 아름다움은 꼭 가르쳐주어야만 알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리스에서 누드 미술이 남성 중심으로 펼쳐진 것은 기본적으로 그리스 특유의 인간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가 맞물려 생겨난 독특한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다.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고 소크라테스는 학문의 본질적인 대상은 인간, 나아가 인간의 선(善)이라고 했다. 이렇게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한 까닭에 그리스인들은 모든 자연 대상 가운데 인간, 특히 벌거벗음으로써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인체를 조형의 백미로 추구했다.
문제는 그리스가 남성만을 그 ‘인간’의 범주에 넣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원천적으로 그 기본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가 철저한 남성 중심 사회였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시민 자격이 성인 남성에 게만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테네의 가옥은 남자의 방과 여자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소녀는 공적인 교육 대상에서 제외됐다. 장을 보는 것도 남자 일이어서 여성이 외출을 하려면 남자 노예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홀로 다니는 것은 흉이 됐다. 여성에게는 공공생활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이런 위상이 시사하듯 여성은 ‘남성이 되다가 만 사람’, 곧 완전함에 이르지 못한 인간으로 취급됐다. 여성이 미술에서 누드로 표현되지 않은 것은 완전하지 않은 그들의 벗은 몸을 드러내 그 불완전성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아이처럼 여성들은 그렇게 미숙한 존재였고, 주체로 설 능력이 없는 존재였다. 더구나 남성들의 입장에서 벌거벗은 여성의 몸은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자연의 무질서’를 환기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공공장소에서 여성 누드는 문명의 빛을 흐리게 하고 야만의 기운을 불러올 촉매로 기능할 우려가 있었다.

» ▲ 기원전 6세기의 도자기 그림 두 점. 달리기 경주에서 여성은 코스튬으로, 남성은 누드로 뛰고 있다.

여성도 가끔은 누드의 형태로 표현되곤 했는데, 그 대상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창부나 무희,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자가 그들이다. 모두 남성과 문명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소외된 여성들이다. 여성 누드는 이처럼 여성의 객체성, 수동성을 강조할 때 표현됐다. 그마저 워낙 적었으므로 남성 누드와는 결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런 사실에 비춰 보면 그리스의 남성 누드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그 위에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남성’이라는 관념이 더해져 탄생한,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미학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미술사학자 빙켈만, 헤겔 등 18~19세기의 인문학자들이 그리스의 누드를 가리켜 “인간을 시간과 공간, 특수성, 사멸 위로 고양시키려는 시도”라고 평했을 때 그 인간은 이렇듯 오로지 남성이었다. 서양 미술 속의 누드는 시작부터 철저히 성차별적인 미의식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 기원이 어떠하든, 이런 그리스 누드의 남성 중심주의를 높은 미학적 완성도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이 <벨베데레의 아폴론>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남성상,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남성상을 만나 볼 수 있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조각을 로마 시대에 모각한 이 작품은, 아폴론이 적(아마도 뱀처럼 생긴 괴물인 퓌톤)에게 화살을 쏜 뒤 쓰러진 과녁을 보며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수영선수처럼 매끈하게 잘 다져진 몸매에 고양된 의식과 자부심이 담긴 얼굴은 아폴론을 해같이 빛나게 한다. 이 누드 어디에서도 부끄러움과 주저,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세계의 중심으로부터 세상을 지배하러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빙켈만이 이 작품에 대해 “자연과 예술,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성취”라고 칭송한 이유를 알 만하다.
만약 이 조각이 누드가 아니라 코스튬이었다면 이 정도로 완전하고 고귀한 존재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 미술에서 남성들이 벌거벗은 것은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는 완벽한 육체를 통해 이렇듯 인간 존재의 위대성, 남성 존재의 완전성을 만천하에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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