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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⑤게슈탈트 전환

이주헌


두 가지 이상 맥락과 상으로 제작
보기에 따라 다른 이미지로 지각

민둥산이 보인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민둥산이다. 민둥산에는 두 개의 길이 나 있다. 서로 다른 길 같기도 하고 아래로부터 위로 난 하나의 길이 산 전체를 에두르다 보니 그렇게 두 개로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경사를 무자비하게 깎아 길을 만든 탓에 길 한쪽으로 거칠게 파인 자국이 보인다. 산은 흉측한 상처를 입었지만, 묵묵히 주어진 고통을 감내한다.
그런데 계속 그림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하다. 아무리 척박한 민둥산이라도 그렇지 어쩌면 저렇게 풀 한 포기 없을까. 이 땅에서는 아예 식물이라는 게 자라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산 오른쪽, 길과 길 사이의 윤곽 중간에 거무튀튀한 바위 같은 게 하나 보인다. 별 표정이 없는 산 풍경에서 그나마 뭔가 변화를 주는 포인트인데, 아뿔싸, 생긴 게 꼭 사람 젖꼭지 같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산 형상이 실제 산이 아니라 사람의 몸뚱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그렇다. 이 그림은 누워 있는 노인을 겨드랑이 아래에서 허리까지 옆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다. 모델이 된 남자는 화가의 장인이다. 화가 김재홍은 고난의 세월을 살아온 장인의 몸을 통해 이 산하와 역사, 민중이 겪어온 아픔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산의 모습이 되었다가 사람의 몸이 되었다가, 수시로 이미지 전환을 하면서 공동체의 수난사와 개인의 수난사를 번갈아 보여주는 독특한 그림이다.
이처럼 이미지나 형태가 그 자체로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음에도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바뀌는 것을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 또는 gestalt shift)이라고 한다. 널리 알려진 도형 이미지 가운데 보기에 따라 소녀의 얼굴이 노파의 얼굴로 변한다든지, 토끼처럼 보이던 이미지가 오리처럼 보인다든지 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더 친근한 예를 들자면,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데 구름이 갑자기 강아지나 나비의 형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이게 게슈탈트 전환이다.
게슈탈트 전환이라는 말은 애초 미술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심리학에서 나온 것이다.
형태심리학(게슈탈트 심리학)에서는, 사람은 무언가를 지각할 때 대상을 요소적인 정보의 집합으로 보지 않고 전체로서의 고유성, 그러니까 큰 하나로서의 구조나 특질에 주목해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얼굴을 보아도 눈, 코, 입 등 부분적인 요소의 기계적인 집합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자아내는 인상과 이미지의 전체 상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기억하는 사람의 얼굴도 부분들의 정확한 형태와 그것들이 모여 이룬 집합 상이 아니라 그 사람 고유의 인상이나 표정 같은 전체 상이다. 이렇게 전체 상은 요소 혹은 요소의 집합에는 존재하지 않는 특질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형태 심리학은 “전체는 부분의 총합과 다르다”, “전체는 부분의 총합 이상의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전체의 상을 게슈탈트라고 한다. 게슈탈트는 ‘형(形)’이나 ‘형태(形態)’를 뜻하는 독일어다. 그런데 게슈탈트 이론의 게슈탈트는 우리말의 ‘형태’나 영어의 ‘form’에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단순히 형태 일반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지각의 대상으로서 전체의 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로 번역할 때도 폼(form)이나 피겨(figure)를 쓰지 않고 그냥 게슈탈트라고 쓴다.
전체의 상으로서 게슈탈트는 요소들이 서로 얼마나 근접해 있고, 유사하며, 연속되어 있느냐 또 폐쇄되어 있느냐에 따라 형성되고, 그렇게 형성된 상에 소속되지 못한 요소들을 배경으로 물리게 된다. 게슈탈트 전환은 이 전체의 상이 지각 차원에서 두 가지 이상의 해석적 의미와 연관을 맺을 때 발생하게 된다. 김재홍의 그림처럼 산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사람의 몸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때 게슈탈트 전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하나의 상에서 전혀 관계가 없는 또다른 상으로 바뀌는 게슈탈트 전환의 이런 ‘과격성’을 <과학 혁명의 구조>의 저자 토머스 쿤은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설명할 때 비유적으로 인용했다. 과학사에서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은 일종의 게슈탈트 전환, 곧 산이 사람 몸으로 바뀌는 것만큼 단절적인 뒤바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패러다임 전환과 게슈탈트 전환은 그 유사성만큼이나 차이도 있다. 과학에서 패러다임이 바뀌면 이전의 패러다임은 ‘그른 것’이 되어 폐지되어 버리지만, 게슈탈트 전환에서는 옳고 그른 것 없이 하나의 상에서 다른 상으로, 또 그 반대로 끊임없이 오갈 수가 있다.
게슈탈트 이론은 20세기 심리학의 돋보이는 업적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이해와는 관계없이 화가들은 오랜 옛날부터 게슈탈트 전환의 흥미로운 현상을 즐겨 그림으로 표현해왔다. 그 대표적인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 밀라노 출신의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쥬세페 아르침볼도다. 그의 걸작 <베르툼누스>를 보자.
그림은 온갖 과일과 곡식, 채소로 충만하다. 그런데 그 모인 형상이 특이하다. 금세 사람의 초상이 떠오른다. 그것도 건장하고 수염이 난 남자의 이미지다. 아르침볼도는 프라하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궁정화가로 일했다. 이 그림은 그가 말년에 그린 황제의 초상인데, 보다시피 온갖 과일과 채소로 풍성하다. 과일이 보였다가 사람이 보였다가 시선이 끝없이 왕복한다.
너무장난스러운 초상이라 황제가 이를 보고 화를 내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화가는 이 그림에 <베르툼누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베르툼누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계절의 신이다. 그가 있기에 가을이 오고 오곡백과가 무르익을 수 있다. 황제에게 베르툼누스를 ‘오버랩’시키고 게슈탈트 전환 기법으로 온갖 먹음직스런 과일과 곡식의 이미지를 생생히 드러냄으로써 황제의 현명한 통치와 보호 덕에 이렇게 농사 잘 짓고 잘 먹고산다고 원색적으로 찬양하는 그림인 것이다. 황제가 흡족해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쩌면 흥미 위주의 장난스런 기법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게슈탈트 전환은 난해하고 지적인 현대미술 분야에서 의미의 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미국 현대조각의 거장 조엘 샤피로는 긴 입방체를 이어 붙여 추상 조각을 제작하는 작가다. 그는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추상적인 형태와 비례, 구성의 표현에 모든 관심을 쏟는다. 그렇게 제작된 작품은 그러나 왠지 사람의 춤동작 같은 특정한 동작을 묘사한 느낌을 준다. 한편으로 보면 추상적인 모뉴멘트요, 다른 한편으로 보면 우아한 인간의 동작을 상기시키는 조각이다. 추상과 구상을 오가는 이런 게슈탈트적 전환은 감상자에게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해 작품으로부터 풍부한 뉘앙스를 느끼도록 만든다.
샤피로뿐 아니라 적지 않은 현대미술가들이 이처럼 한 작품에서 복수의 전체 상, 복수의 맥락을 느낄 수 있도록 작품을 제작한다. 게슈탈트 전환이라는 게 해석의 차원에서 발생하는 현상인 까닭에 그만큼 감상자가 주체적으로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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