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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②트롱플뢰유 Tromp-l’œil

이주헌


원근법 묘사 순간적 착시 유도
워싱턴도 벽 그림에 속아 헛절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화가 찰스 윌슨 필의 아틀리에를 방문했을 때의 일화다. 아틀리에 내의 한 방으로 들어가려고 문을 열자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예의 바르기로 소문난 워싱턴은 그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상대의 반응이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아뿔싸, 그건 벽에 그려진 그림이었다.
워싱턴의 초상화만 60점 가까이 그려 ‘워싱턴의 화가’로 불리는 필은 트롱플뢰유(Tromp-l’œil) 스타일을 선호했다. 트롱플뢰유는 ‘눈속임’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로, 그림을 실제 사물로 혼동하게 만드는 매우 사실적인 표현 기법과 그 그림을 일컫는 말이다. 서양화라는 게 애당초 이차원 평면을 삼차원 공간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데 주력한 미술이었던 까닭에 태생적으로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서양 그림을 보고 우리가 사실적이라고 감탄은 해도 그걸 실물로 혼동하지는 않는다. 트롱플뢰유는 다르다. 서양미술 특유의 사실성을 고도로 부각시켜 의도적으로 착각을 유도한다. 자연히 캔버스보다는 실제 벽이나 가구 위에 그려지는 경우가 많고, 캔버스에 그려져도 프레임 밖으로 이미지가 나와 있는 등 순간적인 착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워싱턴이 본 필의 그림도 캔버스가 아니라 벽에 그려진 것이었다. 화가가 자신의 아들 둘을 모델로 트롱플뢰유를 그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 ‘헛것’에 절을 한 워싱턴이 그리 억울해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그 아들들의 이름이 라파엘로, 렘브란트이기 때문이다.(아들이 하나 더 있는데 그 아들의 이름은 루벤스다) 모두 미술사의 쟁쟁한 대가들에게서 따온 것이니, 위대한 예술적 천재에게 머리를 조아린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트롱플뢰유라는 말은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생겨났다. 하지만 그 특질은 서양미술사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우스의 에피소드가 이를 잘 말해준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따르면, 제욱시스가 포도를 얼마나 실물과 똑같이 그렸는지 새들이 날아와 이를 쫄 정도였다고 한다.(우리나라의 솔거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는 기록이다) 이 소문을 들은 파라시우스가 “나도 그에 못지않은 묘사 능력이 있다”며 제욱시스를 자신의 아틀리에로 초대했다.

파라시우스의 아틀리에를 방문한 제욱시스는 먼저 그의 그림을 보고자 했다. 그런데 아직 손님 맞을 채비가 채 안 된 것인지, 아니면 뜸을 들였다가 보여주겠다는 건지 그림이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화가들끼리 체면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제욱시스는 그림 앞으로 다가가 다짜고짜 커튼을 잡아 젖히려 했다. 그런데 커튼이 아예 손에 잡히지 않는 게 아닌가! 놀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니 커튼 자체가 그림이었다. 제욱시스가 파라시우스의 솜씨에 그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 일화 외에도 그리스 미술가들의 사실적인 묘사력을 찬양하는 고대의 기록은 여럿 있다. 하지만 그들의 그림이 지금껏 전해져오지 않으니 그 실체를 알 방법이 없다. 다만 로마의 경우 폼페이 벽화가 잘 남아 있어 당시 화가들이 적극적으로 트롱플뢰유를 시도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폼페이 벽화 중에는 벽에 문을 그려 넣거나 복도를 그려 넣어 방이 더 있거나 공간이 더 큰 것처럼 착각을 하게 하려는 그림들이 있다. 그러나 그 솜씨가 그리 완벽하지는 않아 완전히 속아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그런 초사실성의 경지는 근세 이후에나 가능해진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이후 과학적인 원근법이 발달하면서 웅장한 교회와 궁성의 천장이나 벽에 전혀 다른 공간이 있는 듯 생생한 환영을 창조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밋밋한 돔 천장이 복잡하게 깎고 다듬은 인테리어 장식으로 꾸며져 있거나 벽에 화려하고 멋진 공간이 이어져 있는 듯한 환영을 보는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 매우 경이로운 체험이었다. 이처럼 건물(특히 천장)에 공간적·건축적 환영을 창조하는 트롱플뢰유 그림을 콰드라투라(Quadratura)라고 부른다.
이런 ‘거시적’인 트롱플뢰유는 그러나 벽이나 가구 등에 트럼프·리본·생활용품 등의 사물을 그려 그게 실물인 것처럼 혼동하게 하는 ‘미시적’인 트롱플뢰유에 비해 착시의 힘이 덜하다. 후자를 쿼드리벳(Quodlibet)이라고 하는데, ‘큰 거짓말’보다는 ‘작은 거짓말’이 아무래도 속이기 더 쉬운 법이다. 이런 미시적인 트롱플뢰유의 대표적인 그림이 영국 더비셔의 채츠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에 있는 얀 판 데르 파르트의 작품이다.
영화 <오만과 편견>의 촬영지로 유명한 채츠워스 하우스는 데븐셔 공작의 저택이다.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소유한 건물의 하나로, 영국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전원주택이기도 하다. 대대로 내려온 회화와 조각·장서·가구 컬렉션 또한 성가가 높은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판 데르 파르트가 그린 바이올린 그림이다.
바이올린은 방 한 곳의 문에 그려져 있다. 문이 두 겹으로, 문 하나를 열면 또 하나의 문이 보이고 거기에 바이올린과 활이 걸려 있다. 이 두 번째 문에 걸린 바이올린과 활이 그림이다. 웬만큼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도저히 그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다. 1723년 혹은 그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그만큼 핍진한 사실 묘사로 우리의 눈을 한순간에 ‘바보’로 만든다.
이 그림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작은 음악회가 열리던 어느 날 밤, 연주가 끝나자 주인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청한다. “우리 집에 명품 바이올린이 있으니 그걸로 한 번 연주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인이 문 하나를 열자 또 다른 문에 걸린 바이올린이 고풍스런 자태를 드러낸다. 그 모습에 손님들이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문 앞으로 다가간 연주자는 그러나 갑자기 당황해한다. 손을 뻗었음에도 바이올린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이 신기한 그림을 보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즐거워했을까. 트롱플뢰유는 이처럼 사람들에게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데 창작의 주된 목적이 있다.
트롱플뢰유는 요즘도 일부 미술가들에게 중요한 조형 테크닉으로 활용된다. 지난해 파주 한향림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미국 현대도예의 거장 실비아 하이먼의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하이먼은 흙으로 책과 가방, 나무상자 등 온갖 사물을 빚는다. 그 위에 페인팅을 하는데, 얇은 악보나 도면뿐 아니라, 나무와 나무에 박힌 못, 천 가방의 재질과 색상까지 그대로 살려내는 것을 보면 혀를 내두르게 된다. 처음 본 사람은 그 모든 게 실물이 아니라 도자기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지 못한다.
속임을 당하고 좋아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림으로 눈속임을 당하는 일은 다르다. 미술이든 마술이든 눈속임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쉽게 착각하고 혼동을 잘하는지 깨닫는 일은 유쾌하다. 트롱플뢰유는 이렇듯 우리가 가진 한계를 새삼 되돌아보게 하고 그 한계를 새로운 상상과 가능성의 세계로 이어주는 아주 특별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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