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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품 감정의 딜레마

정준모

미술품 감정의 딜레마
정준모(고양문화문화재단 전시감독)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며
미술동네에 몸을 담은 이래 요즘처럼 곤혹스런 상황은 처음인 것 같다. 삼성 특검은 비자금의 용처를 따지기 위한 특검이라기 보다는 미술품을 향한 특검이 아닌가 할 정도로 비자금으로 미술품 구입한 일만 연일 파헤치면서 정계나 관계는 비자금으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미술품 진위문제는 연일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이어져 미술동네는 모두 의혹과 비리의 종합체인 것처럼 포장되고 있다.
사실 미술품은 모두가 소유하고자 하는 부와 성공의 상징이지만 한편으로 가질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공과 증오의 간극이 크면 클수록 가지고 싶은 욕망이 커지는 것이 미술품이고 보면 정말 아이러니 한 분야의 예술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미술품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좋건 싫건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런 미술품이 요즘 들어 비자금과 진위 감정문제와 얽히면서 상승작용을 거듭하면서 미술품은 이제 ‘동네북’이 되어가고 있다.
미술품 감정을 하다보면 감정을 하고 싶지 않다 또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생각의 배경에는 미술품 감정이 정말 부담스럽다는 것 때문이다. 오진의 확률은 의사들을 위축시키듯이 감정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감정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는 감정인들도 사람이기 때문에 오감정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럴 경우 그는 이삼십년 동안 미술동네에서 공부하고 쌓은 경험과 지식은 “그 사람 볼 줄 모른다.”라는 말로 다시 “실력이 없다.”는 말로 보태지면서 하루아침에 망신을 톡톡히 당한 채 미술동네를 떠나야 한다. 즉 백번 잘 보다가 한번 잘 못 보면 생 매장당하는 이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풍토에서 누가 자신의 명예와 지식을 담보로 매번 시험에 들려 하겠는가 말이다. 따라서 감정은 잘 하면 본전인 셈이며 잘못하면 패가망신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정이나 감정공부를 하겠다고 나서겠는가. 현재 감정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근현대미술품을 주로 다루었던 화상과 미술사가, 평론가 큐레이터 출신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은 감정을 전문으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공부하고 일하면서 많은 작품들을 직접보고 다루면서 쌓은 안목과 자료에 근거해서 감정에 임한다.
사실 미술품의 진위문제가 천박한 호기심과 결합하면서 우리는 ‘감정인이 없다.’는 말과 함께 감정가를 양성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양성하지 않은 ‘감정인’이 지금 당장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그런데 화상이라고 감정에서 배제해야 한다면 누가 감정을 할 것인가. 관심도 두지 않다가 일이 터지면 사람 찾는 풍토는 미술동네뿐만의 일은 아니지만 지금이라도 진득하게 감정가를 양성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감정에 참여하면 거마비 수준의 감정료를 받게 된다. 생계비는커녕 감정공부를 위한 책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고비를 받아 쥐면서 이렇게 ‘외줄을 타는 모험에 나서는 이’들이 현재 한국 미술품 감정인들의 처지이다. 게다가 이해 당사자들의 이익에 반하는 감정결과가 나오면 승복하지 않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금품 수수설이 나돌고, 담합했다는 마타도어를 통해 감정가들의 속내를 긁어 놓는 것이 상례이다. 또 가끔은 감정에 참여해서 의견을 같이 했던 인사 중 한두 사람이 감정회의장을 나와 결과에 반하는 의견을 내 놓으면 그 사람은 정의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뒤가 구릴’일을 한 사람들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미술품 감정을 주관하는 곳은 민간단체이다. 어떤 법적 구속력도 없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미술품 감정을 해주는 영리와 거리가 있는 단체이자 연구소 일 뿐이다. 따라서 감정인들에게 그에 걸 맞는 대우를 해 주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만약 미술품 감정이 돈이 된다면 감정결과와 상관없이 지금의 경매회사처럼 우후죽순으로 생길 것이며 감정을 배우겠다는 사람도 줄을 이을 것이다. 비영리를 전제로 하는 감정에 국민과 고객들은 그들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사법적 판단처럼 준엄한 결과처럼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결과를 내 놓아야 한다는 요구하는 이율배반이 상존한다. 이것이 한국미술품 감정의 딜레마 이다.
결국 경제적 실익조차 없는 일에 자신들의 명예를 걸고 감정에 임하는 사람들은 미술동네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 때문에 전문가로서 명예를 걸고 모험을 행하는 셈이다. 물론 무언가 대가가 없이 이런 부담스러운 일을 하겠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분야건 궂은일을 운명처럼 해 내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한가지 감정의 어려움은 미술품 감정에 이해부족과 오해에서 비롯된다. 감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술품을 문화적 학문적 관점으로 볼 것인가 상품으로 볼 것 인가 하는 전제이다. 전자의 관점으로 본다면 미술품 감정은 작품의 질 즉 예술성과 미학적 진정성 그리고 작품의 보존상태, 크기, 제작연대, 재료, 제작방법 등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대상을 분석하고 접근하는 객관적 상태 그리고 진위문제이다.
그러나 우리 미술동네의 감정은 진위문제에만 국한 되어 있고 이런 풍토 때문에 학문적인 관점에서 다루어져야 할 작품 감정이 오직 진위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이 어려움의 원인이다.
과학적 감정에 대한 오해
최근 미술품의 과학적 감정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는 미술품의 진위와 관련해서 연이어 계속되는 위작파동과 진위 시비 등으로 미술에 별 관심을 지니지 않았던 이들까지 답답하고 지리한 진위 공방에 지친 나머지 속 시원하게 한방(?)에 진위여부를 판가름할 방법은 없을 까 하는 생각 끝에 과학으로 해결해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과학적 감정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과학적 감정이란 어의처럼 수학공식처럼 공식에 대입만 하면 답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또 위폐감식기처럼 돈을 넣으면 위폐인지, 진폐인지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위폐감식기는 몇 가지 원칙을 정해 놓고 그 원칙에 위배되는 지폐는 일단 위폐로 분류하는 구조이다. 하지만 미술품이란 작가에 따라 그리고 그 사람이 제작한 작품에 과학적으로 규명할 만한 절대적인 동일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폐감식기처럼 미술품 감식기를 만들 수가 없다.
세간의 관심이 되었던 “이중섭 박수근 위작사건”도 따지고 보면 이미 그 작품들은 위작 또는 방작(倣作)이라는 것이 감정전문가들의 이견 없는 의견이었고 미술동네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런 미술계의 전문가 즉 감정인들이 ‘거짓’이라고 감정했음에도 소장가는 끝까지 ‘진실’이라고 주장하면서 법정으로 끌고 가 시간을 끌었다. 여기에 미술계 한 전문가는 반짝이 물감(PEAL)이 사용된 것은 80년대부터라는 미술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을 두고도 과학적 감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성화와 법정증거주의 때문에 육안으로도 확실하게 보이는 위작의 증거인 반짝이 물감을 전자현미경까지 동원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반짝이는 것은 펄 물감이라는 이야기를 운모표면에 산화티탄을 피복하여 반사간섭색을 생기도록 하는 산화티탄피복운모라는 어렵고 생경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과학적 임을 다시 증명해 보여야 했다. 같은 것을 보았는데 눈으로 본 것은 과학적이지 않고 전자현미경으로만 보고 원소기호나 화학적 용어로 말해야만 진짜라고 믿는 데는 도리가 없었을 터이다.
과학적 감정이 모든 것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미술품이란 감성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지문이나 DNA처럼 유일하다는 전제가 참이어야 한다. 과학적 감정은 분석된 데이터를 재료로 한다. 이는 안목이나 출처감정에서 여러 가지 조건이나 자료들이 종합되어 결과를 도출하지만 감정인에 따라 그 자료를 중시하는 비중이 다른 것처럼 과학적 분석 데이터도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수많은 과학자들이 천 년 넘도록 보아왔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은 뉴턴 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어떤 입장과 태도로 사물이나 현상을 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즉 과학적 감정이란 과학적 도구를 이용한 분석결과를 이용하는 감정방식이지 과학으로 모든 것을 데이터화해서 그 결과 진위를 확정하는 감정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미술품 감정에서 사용되는 과학은 감정이 아니라 과학적 분석결과를 감정에 참고하는 여타의 자료중 하나로 크게 미술품을 분석하는 데는 특수 광선을 이용한 분석과 시료분석 그리고 연대측정 방법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런 미술품 분석방법은 미술품 감정보다는 가장 적합한 미술품 수복방법을 찾기 위해 사용한다.
특수 광선과 시료를 이용한 미술품 분석
미술품 분석에 사용되는 특수 광선은 자외선, 적외선, X-Ray가 있으며, 주로 작품을 덮고 있는 이물질을 찾거나 작품의 수복 이력을 알아보기 우한 방법이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나 박락현상을 찾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이다.
시료분석은 각 색을 구성하고 있는 화학원소에 대한 분석으로 각각의 원소가 차지하고 있는 비율에 따른 정성분석과 절대량을 측정하는 정량분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색이란 것이 시중에서 판매하는 물감이나 크레파스처럼 24색 48색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그 색을 혼합해서 수 천 만 가지의 색을 만들어 사용한다는 것이다. 같은 작가의 한 작품에그려진 나뭇잎에는 몇 가지 색이 사용되었을까. 적어도 족히 수백 가지는 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과학적 전제가 증명되어야 안료분석을 통한 미술품 감정이 가능해 진다. 예를 들어 ‘A’라는 작가의 ‘정물B’라는 작품에 있는 흰색의 경우 카드뮴(Cd), 납(Pb), 구리(Cu) 등이 어느 정도 있다라는 분석이 적은 양의 시료채취를 통해 가능하다. 그런데 A가 항상 순수 흰색(white)만을 사용하거나, 노랑, 청색, 녹색, 빨강 등을 언제 어디서나 한 치의 다름도 없이 똑 같이 항상 일정하게 혼합해서 사용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즉 작가가 사용한 수많은 그림의 수많은 색이 동일하다는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감을 채취해서 성분을 분석해보면 제작년도는 물론 어느 작가의 작품인가까지도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유화의 경우 물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에 제작된 서양의 유화 작품들은 안료를 분석해서 시대나 작가를 추정 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안료의 원료로 같은 광물질을 사용했다고 해서 꼭 특정한 작가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 활동했던 다른 작가도 그 광물질을 채취해서 물감으로 만들어 사용했을 가능성이 100% 없다고 확정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지금처럼 여행이 빈번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으로 전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라시대에 아라비아 지방에서 유리가 한반도에 전해졌던 것처럼 그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유화물감 제조회사 중 가장 오래된 회사는 1664년 설립된 올드 홀랜드(Old Holland)사이다. 따라서 기록상으로 본다면 1664년 이후에 물감을 분석한다는 것은 의미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근대기 이후 화가들이 사용하는 물감은 수공예품이 아닌 공산품이 되었고 많은 물감회사들이 자연안료가 아닌 화학안료를 사용해서 물감을 양산하게 되면서 세계 어느 곳에서도 같은 물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안료를 분석해서 작가를 확정짓는 방법은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게 진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되는 작품들의 대부분은 한국근대기 유화작품들이 절대다수를 점한다. 이들은 대개가 일제 물감을 사용했다. 패망한 일본은 난립했던 물감회사들을 정리해서 홀바인이라는 물감회사로 통폐합 했으며 따라서 일본이나 우리 작가들의 당시 작품의 안료를 분석하면 기본적으로 같은 성분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 화가들은 특정 색을 만들기 위해 언제나 동일한 분량의 물감을 배합하지 않는 다. 하나의 작품에 사용된 육안으로 같아 보이는 색도 1/n의 구조를 가진다. 경우의 수가 무한정이라는 점 때문에 무한대의 분석과 비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화학적 분석비교를 위해서는 그림에 사용된 물감을 채취해서 모든 원소들을 분석 비교를 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물감을 혼색할 때 주로 사용하는 용제에 따라 화학반응이 다르게 나타나고 물감의 변화는 각각 색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예술가이지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그때 자신의 감흥과 느낌으로 색을 만들고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도 아무리 첨단 과학으로 분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작품의 진위를 가늠하는 하나의 단서는 될지 언 정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
연대측정을 통한 미술품 분석
미술품이나 유물의 연대측정 방법으로 현재 가장 신뢰받는 것은 탄소 14의 동위원소 반감기를 이용한 방법이다. 이 방법의 오차범위는 ±50년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일반적으로 연대가 많이 올라가는 고대유물에 주로 사용된다. 그런 고로 1900년대 이후 작품의 연대측정은 사실 무의미 하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이 유물을 전시하면서 제작연도를 예를 들면 AD 3세기경이라고 표기하는 것도 속 시원 하게 제작연도를 밝혀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의 많은 소장유물들이 100년 단위로 표기되어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최근 들어 그 오차 범위가 세분화되고 있지만 10년 단위로 특정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서울대 정전가속기연구센터(SMU-AMS)의 경우 이온빔 가속기를 이용하여 시료 안에 들어있는 탄소 입자들에 전하를 띠게 해서 가속시킨 후, 가속된 탄소입자에 자기장을 걸어주어 그 휘는 정도의 차이에 의해 동위 원소를 분리하는 첨단의 방법을 사용한다.
탄소동위원소 질량비율 측정의 정밀도는 그 비율이 10-15한계까지 측정 가능하다는 보고를 내 놓고 있다. 또 오차원인을 제거하여 매우 정밀하게 측정 할 경우 ±30년까지 오차의 범위를 줄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최근 발표한 황남대총 연대측정의 경우 가장 정확한 연대측정을 한다는 권위 있는 기관에서도 ±50년의 오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설혹 있다하더라도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유물의 경우 유물에 묻은 흙 등 이물질을 가지고 연대측정이 가능하나 미술품 연대측정은 어느 정도의 충분한 량의 시료가 확보되었을 때 가능하다. 따라서 연대측정을 위해서 절대량의 시료채취가 필요하고 문제가 된 작품에서 물감을 떼어내야 한다. 작품이 손상될 것은 물론이다. 피가 나지 않도록 팔을 자르라는 판결처럼 어려운 문제이다.
또 과학적인 분석과 감정을 위해서 필요한 돈은 누가 부담할 것인가도 관건이다. 목재의 경우도 비교적 탄소동위원소 반감기를 이용한 연대측정이 용이하다고 하지만 이 경우도 10년 단위로 특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만약 10년 단위로 특정해서 연도가 결정되었다 하더라도 특정작가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당시 생산된 캔버스 틀이 하나 밖에 없다면 모르겠지만 수 많은 캔버스 틀이 보급되었고 당시 화가들은 이를 사서 사용했기 때문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캔버스 천의 경우는 거의 모두가 공장제 제품이고 때때로 작가들이 롤로 사다 놓고 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또한 정확한 제작연도를 과학적으로 밝혀낸다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적 분석결과를 무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미술품의 진위여부를 가리기 위한 많은 자료와 경험만큼 중요한 것이 과학적 분석결과이다. 과학적 분석의 발전은 미술품 수복과 감정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미술품의 제작연대를 10년 단위까지 측정하고 일년 단위까지 가려낼 수 있다면 게다가 작품에 사용된 물감을 통해 작가를 결정지을 수 있다면 이는 아메리카대륙 발견에 버금가는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하루빨리 학계에 보고하고 세계적인 과학논문지에 실려야 할 이다. 황우석을 기억하는 많은 국민들에게 한국의 과학적 위상과 체면을 다시금 세워줄 이 같은 과학적 분석방법을 하루빨리 증명하는 그날의 쾌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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