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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상상 19] 프랙털의 미학

진중권


'예술은 자연의 모방' 옛 이론 프랙털 아트로 되살아나다
현대 추상미술도 조화·카오스 등 우주의 원리 모방
프랙털 아트, 컴퓨터 이용한 일종의 '디지털 추상'
무한복제와 확산… 프랙털의 아름다운 놀이 즐겨보라

어린 시절 누구나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의 결정에 매료된 경험이 있을 게다. 같은 모양이 무한히 반복되면서 만들어내는 패턴의 아름다움. 이와 비슷한 아름다움은 자연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산의 요철, 해안선의 굴곡, 혈관의 전개, 잎사귀의 배열, 은하계의 성단 구조 등. 이를 흔히 ‘프랙털’이라 부른다.
눈의 결정을 만들어 볼까? 먼저 정삼각형을 취하라. 두 개의 정삼각형을 위아래로 겹쳐놓는다. 이 ‘다비드의 별’ 모양의 여섯 개 뿔의 끝에 다시 같은 크기의 삼각형을 겹쳐 놓기를 반복해 나간다. 그러면 우리에게 익숙한 눈의 결정이 얻어진다. 이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라 ‘폰 코흐의 눈꽃’이라 부른다.
이미 오래 전에 발견된 이런 현상들에 ‘프랙털’이라는 이름을 주고, 이를 하나의 기하학 체계로까지 발전시킨 것이 프랑스계 미국의 수학자인 베누아 망델브로트(83)였다. 그는 이 추상적인 기하학의 패턴이 동시에 구체적인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데에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국어사전은 프랙털을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도형’이라고 정의한다. 가령 눈송이를 보면, 조그만 육각형이 모여 더 큰 형태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의 형태가 다시 육각형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분과 전체 사이의 이 닮음을 흔히 ‘자기유사성’(self-similarity)이라 부른다.
하지만 부분과 전체의 모습이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프랙털에는 부분의 모습이 전체 속에 그대로 반복되는 ‘엄밀한 자기유사성’이 있는가 하면, 부분과 전체가 매우 흡사하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은 ‘유사 자기유사성’도 있고, 전체가 부분을 별로 닮지 않은 ‘통계적 자기유사성’도 있다.
프랙털 속에서 수학은 곧 자연이 된다. 도대체 자연 사물의 형태가 어떤 원리로 만들어지는지 보자. 브로콜리의 모양, 나뭇잎의 배열, 은하의 성단 등 도처에서 프랙털이 발견된다면, 적어도 자연의 어떤 현상들은 그 형태가 기하학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아닌가.
자연현상의 바탕에 기하학의 원리가 깔려 있다면, 또한 그 원리를 수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그 형태를 인공적으로 시뮬레이션하는 것도 가능하다. 프랙털에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인공적으로 생성할 때, 프랙털 기하학은 이른바 ‘프랙털 아트’가 된다.
옛 사람들은 예술을 ‘자연의 모방’이라 불렀다. 미의 본질이 수적 비례관계에 있다는 믿음은 미학사에서 가장 오래된 관념에 속한다. 컴퓨터와 더불어 한동안 잊혀졌던 이 고대의 이론이 오늘날에 다시 살아난 느낌이다. 프랙털 속에서 수학=자연=예술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예술은 자연의 모방이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자연을 닮지 않은 현대의 추상미술도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자연의 모방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몬드리안의 추상미술에도 여전히 ‘조화’(cosmos)는 존재한다. 그것은 현실의 사물을 닮지 않은 그의 미술이 여전히 우주의 원리인 조화를 모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럼 화폭에 물감을 뿌려대는 잭슨 폴록의 그림은 어떤가? 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자연의 모방이라 할 수 있다. 굳이 현대 물리학의 성과를 들지 않아도, 카오스 역시 자연의 원리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예술과 현대예술 모두 여전히 자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랙털 아트는 재현과 추상의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브로콜리의 속살, 나뭇잎의 배열, 폭포수의 물방울 등이 프랙털 구조를 갖는다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자연현상들을 시뮬레이션하는 데에 프랙털을 적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마디로 프랙털은 영화용 컴퓨터그래픽의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
다른 한편, 프랙털 아트는 ‘이미’ 존재하는 자연현상을 시뮬레이션하는 게 아니라, 형태를 만드는 추상적 원리로써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잠재적 형태를 생성시키는 일종의 디지털 추상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프랙털 아트는 바로 여기에 속한다.
프랙털 아트에는 컴퓨터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물론 간단한 프랙털은 수작업으로 그릴 수도 있겠지만, 저 복잡한 구조물을 인간이 매 단계마다 길이를 계산해가며 일일이 손으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같은 연산을 무한히 반복하는 능력에서 컴퓨터는 인간을 능가한다.
같은 연산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컴퓨터의 능력 덕분에, 프랙털은 무한 줌인과 무한 줌아웃이 가능하다. 적어도 이 점에서는 인간이 컴퓨터를 따라갈 수가 없다. 프랙털은 그저 정지화면에 그치는 게 아니다. 무한히 줌인이나 줌아웃하는 것을 또한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는 프랙털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전시한 웹 갤러리들이 널려 있다. 과거에는 프랙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아포피지스’(Apophysis) 등의 소프트웨어로 누구나 매뉴얼에 따라 변수를 바꿔가며 자신만의 프랙털 이미지를 생성해 낼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프리웨어를 다운로드받아 프랙털의 놀이를 즐겨 보라. 인간은 변수를 조작하여 컴퓨터의 움직임을 통제하나, 컴퓨터가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낼지 예측하기란 힘들다. 생성된 이미지 앞에서 갖게 되는 놀라움은 컴퓨터가 인간에게 선사하는 선물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능력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컴퓨터가 생성해낸 이미지들 모두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기계가 만들어낸 수많은 프랙털 이미지들 중에서 미적으로 흥미로운 것, 즉 보기에 좋은 것을 골라내는 미적 결정은 어차피 인간의 몫으로 돌아간다.
프랙털 아트는 기하학의 특정 분야를 예술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수학에 기하학만 있는 게 아니고, 기하학에 프랙털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아가 수학의 모든 이론을 시각화하는 놀이를 생각해 볼 수 있잖은가. 그런 놀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의 유리알 유희가 아닐까?
■ 프랙털(fractal)-[명]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의 형태와 닮은 도형. 컴퓨터 그래픽 분야에 널리 응용되고 있으며 구름 모양이나 해안선 등에서 볼 수 있다.
폴록, 프랙털 이론이 발표되기 전 아날로그로 프랙털 표현
컴퓨터가 아닌 아날로그 매체로 프랙털을 표현한 작가들이 있다. 가령 대전엑스포를 기념하여 <프랙털 거북선>(1993)를 제작한 백남준을 생각해 보라.
굳이 이 작품이 아니더라도 작은 모니터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거대한 형상을 만들어내는 그의 작업 자체가 어딘지 프랙털을 닮은 데가 있다.
백남준은 프랙털의 이론을 이미 접한 상태였지만, 그 이론이 나오기 전에 이미 프랙털 원리를 창작에 적용한 사람이 있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잭슨 폴록이다.
그는 바닥에 눕힌 캔버스 위에 물감을 찍은 붓이나 막대로 물감을 떨어뜨리는 '드리핑' 기법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은 당연히 온통 카오스 상태를 보여주게 된다.
최근 미국의 어느 물리학자가 폴록의 작품을 수학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폴록의 카오스 그림 속에 놀랍게도 프랙털 구조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긴, 프랙털 기하학은 종종 카오스 이론과 연결되곤 한다. 복잡계라는 것도 결국 단순한 요소의 반복으로 생성되는 게 아니던가.
그는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위에서 왼쪽 사진은 비(非) 카오스 프랙털로 생성한 이미지이고, 가운데 사진은 카오스 프랙털로 생성한 이미지다. 그리고 오른쪽 끝의 사진은 폴록이 그린 작품의 한 부분이다. 폴록의 그림이 카오스 프랙털로 생성한 이미지와 놀랍도록 유사하지 않은가?
뿌려대는 물감이 어디에 떨어질지는 화가의 의지나 의도의 바깥에 속한다. 우주의 생성도 인간의 의지나 의도에 따라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도를 접고, 제 자신을 온전히 우주의 리듬에 맡긴 채 춤을 추듯이 그림을 그린 폴록의 작품에 우주의 원리가 각인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복잡한 프랙털 이미지도 간단한 기하학적 도형의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카오스 프랙털로 생성해낸 가운데 사진의 이미지도 처음에는 아주 간단한 형태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질서 잡힌 몬드리안의 차가운 추상. 무질서한 폴록의 뜨거운 추상. 우주는 어쩌면 코스모스와 카오스가 하나로 결합된 카오스모스일지도 모른다.

- 한국일보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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