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시각예술의 가치와 미래

정준모

2007.2.22 심포지엄Ⅰ: 한국사회와 문화예술의 미래 발표자료
- 정준모(미술행정, 큐레이터)

1. 시작하는 말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책은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수치화하면서 성과와 실적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즉 일종의 경제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의 실체는 모호하지만 ‘시장의 자율적 기능’에 관한 이론으로 학문적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경제학의 신고전파는 오스트리아의 자유사상과 만나 ’국가의 적절한 개입‘을 최소화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라.’는 원칙을 천명하면서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기위해서는 최소한의 국가의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그들 나름의 시장경제이론의 축 하나를 스스로 부정한 셈이다.
즉 국가의 역할을 무시한 이들 태도는 전체적으로는 무정부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가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국방이나 치안과 같이 최소한의 기능이 제대로 작용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최소한의 기능중 하나는 복지와 인간적인 삶의 구현을 위해서 국가는 미성년자의 노동문제, 최저임금제의 시행, 무주택 서민들의 주거대책 등등의 정책을 펼쳐나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국가라는 시스템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적절한 개입’은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모순은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국가적 책무는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그 이후의 모든 것은 시장의 논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권리는 누리면서 의무는 부정하는 스스로의 모순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적 태도들은 최근 10년간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작동하면서 ‘돈의 정의’에 의해 모든 가치들을 재단하고 평가하였고 이는 금과옥조처럼 떠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정부의 균형발전과 양극화해소라는 정책의지는 불균형과 양극화의 심화로 나타났다. 이는 정부당국의 철학부재에서 비롯된 일로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자유경쟁이 최선이라고 믿는다면 국방이나 치안 같은 문제도 간단하게 민간의 시장경제체제에 맡겨 수행했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공무원제를 폐지하고 아웃소싱을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지난 10년 동안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모순된 이론과 논리에 몰입한 나머지 시장경제의 영역에 들지 못하는, 이윤 창출과는 거리가 있는 복지와 문화예술부문은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였고 일부 돈 되는 부문은 ‘문화산업’이라는 스스로 모순 되는 언어로 포장되어 국민들을 현혹하면서 ‘바다에 빠진 꼴’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저급한 상업주의와 자본의 논리는 문화예술을 고사 직전으로 몰아갔고 국민들은 ‘격’이 없는 세상에 노출되어 갔다. 그리고 이런 신자유주의자들의 자가당착과 문화 산업론의 허실은 이제 서서히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오늘에 이르며 특히 최근 들어 각종 기록들을 갱신하고 있는 미술시장의 동향을 살펴보면 그 허상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의 일부가 차용한 시각문화로 인해 외적으로는 호화롭게 보이지만 시각문화의 황폐화 현상은 말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시각예술이 문화의 한 축이자 국방이나 치안처럼 국가가 최소한으로 제공해야 할 기본권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시각예술의 가치와 오늘날 이런 자본 논리아래서 피폐해 질 수 밖에 없는 시각 환경권에 대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2. 시각예술의 가치
시각예술이란 전통적으로 우리의 오감 중에 시각을 통해 향유되는 예술을 의미하며 추상적인 청각예술과는 상대적인 개념을 가진다. 따라서 공간예술과 일맥상통하기도 하지만 현대에 들어오면서 그 영역은 매우 넓어져 음악이나 무용 등을 포함하는 의미로 까지 쓰인다. 즉 보통 시공간의 예술로 구분되는 무용이나 판토마임의 경우도 감각적으로 보면 시각예술에 포함되며 이외에도 퍼포먼스나 해프닝 그리고 존재매체가 시각예술과 만나면서 시공간예술의 음악적, 행동적 양태까지 포함함으로써 종래의 화인아트(Fine art)의 개념은 이제는 아트(Art)라는 확장된 개념에 포함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시각예술에서 기호의 문제가 중시되거나 재현이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시각적 의미소들은 하나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으로 분류되면서 종래의 좁은 의미를 뛰어넘고 있다.

가. 전통적인 시각예술의 가치와 의미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본성에 가까운 것이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인간의 본성에 봉사하는 것으로 인간적인 삶의 전제이자 인간의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물질적은 풍요와 만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배부른 돼지나 배고픈 소크라테스 보다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희망 할 것이다. 물론 배가 부르면 소크라테스처럼 사유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배부른 인간은 안주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창조하기 어렵다고 하지만 지만 일단 시각예술을 포함한 예술이란 장르는 인간을 끊임없이 사유하게 하고 2% 부족한 자신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많이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픔’을 느끼게 해 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특히 배부름에 만족하지만 인간의 사유체계를 끊임없이 작동시켜 그 잠시의 배부름에 만족하지 않게 해 주는 추진체가 되어 새로운 가치와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물리적, 생리적 만족과 함께 정신적인 만족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류와 함께 해 왔을 터이다.
특히 시각예술의 경우 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부터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울 때 까지 만나는 모든 것들이 시각예술의 일부이다 이는 인간이 외부와 소통하는 오감 중에서도 가장 신뢰하는 동시에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일상을 문화라 규정한다면 시각적 요소의 거개가 바로 문화 그 자체를 형성해 준다는 의미에서 시각예술의 범위는 전통적인 회화와 조소 그리고 건축과 디자인과 공예분야를 포함하는 동시에 전기와 빛 등을 포함하면서 확대되어 일상의 조건 또는 삶의 환경으로서 문화적인 삶의 전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삶의 환경으로서의 문화 즉 시각예술은 자신의 몸치장과 의복 등 외적인 표현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이러한 각각의 정체성이 하나로 이미지화 하면서 민족적, 지역적 특성으로 모아진다. 따라서 언어가 그 민족을 상징하는 기호체제이긴 하지만 소통의 한계가 있는 반면 시각예술의 경우 감각적인 소통이 가능함으로 민족이나 국가의 상징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를 바탕으로 타 민족이나 국가와의 교류도 가능하게 해 준다.
특히 소통과 교류라는 것이 상호간 주고받음을 의미한다면 시각적인 교류야 말로 그 규모에서나 상징적 의미에서 가장 두드러진 항목이 될 것이다.
또한 설혹 언어가 다르다 하더라도 지역과 종교 그리고 자연환경의해 형성되는 시각적인 외형의 유사성은 민족이나 국가를 지탱하는 고리가 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다, 이렇게 한 민족이나 국가의 시각적 문화 즉 이미지는 개인을 넘어서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는 동시에 국가 구성원에게 일체감을 제공하는 특성을 가진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타 민족이나 국가와 교류가 가능해 진다. 특히 가시적이며 직접적인 속성을 지니는 시각문화는 번역이나 통역 없이 시 지각이라는 공통적인 특성을 토대로 소통이 가능한 관계로 우선 소통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보면 국가간의 교역이전에 양국간에 서화를 교환하고 함께 완상하는 기회를 만들거나 함께 음악을 감상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다 이런 이치 때문이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아르누보 운동이 펼쳐지면서 시각예술의 영역은 단순한 시각적 영역을 벗어나 시 공간적인 영역으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산업혁명 이후 기계화되고 산업화되면서 획일화된 공예와 산업디자인을 다시 인간의 손에 의한 체온이 있는 예술로 되돌리고자 노력하면서 시각예술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서 아름다움과 실용성이 함께하는 시각예술은 당시 사람들의 세련된 조형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러한 노력과 시도는 당시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을 뿐 만 아니라 단순하게 잘 사는 것이 물질적인 풍요뿐 만 아니라 정신적인 풍요가 함께 할 때 진정한 삶의 질을 담보 해 낼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정서라는 것이 단순하게 물질의 하위개념이 아닌 등가의 개념이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와 함께 시각예술은 추상적인 개념인 감정과 느낌을 표현함에 있어서 언어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전달력이 그 만큼 높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시각예술은 어느 무엇보다도 기능성이 뛰어난 것도 특징의 하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능적인 시각예술들이 일상화하면 할수록 집단간의 이해와 소통은 원만해질뿐 만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아름다운 환경이나 조건을 조성하게 된다.
게다가 시각예술은 모든 예술들이 그렇지만 특히 다양한 사회의 면모를 반영하는 시대의 거울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시각예술은 좁게는 인간의 삶의 질을 좌우하지만 한편으로는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를 변형시키는 역할을 함으로서 역사로서의 기능을 실증적으로 반영한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전통적으로 개개인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왔고 변모해 오는 한편 시대를 관통하면서 변하지 않는 절대불변의 가치 즉 인본주의적 태도를 지켜온 셈이다.
나. 변화하는 삶을 포착하기도 하지만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의미의 시각예술은 새로운 시대를 맞으면서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해 가고 있다. 기술의 발달은 시각예술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사진매체가 포함되고 영상 그리고 영화 같은 매체들이 시각 예술에 속속 편입되면서 표현방식은 더욱 넓어졌다. 특히 시각 예술은 정보를 개발하고 이를 구체화 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구성원들의 전반적인 개성을 반영한다.
즉 시각예술을 비롯한 모든 예술은 동시대의 사회적 질서와 문화적 열망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그 시대상은 예술분야 특히 시각예술분야에서 온갖 창조적 활동에 있어서 많은 예술가들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작업하면서 동일한 사상이나 미감을 실천함으로서 움직이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이에 결국 시각예술은 그 시대의 예술정신에 바탕을 두며 이 예술정신은 결국 시대를 지배하는 셈이다.
특히 시각예술은 사회적 발전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사회에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체현자로서 구실을 하고 있다. 문명사 또는 문화사 연구에 있어서 시각예술은 많은 자료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문명사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는 시각예술은 선사이전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족적을 규명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 사회의 관습과 습성은 어떠했는가, 기술적인 진보는 어떻게 이루어 왔나. 또 당시의 종교와 지역사회는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증거 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의 의식체계를 지배하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시각예술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기록자인 동시에 주관적인 역사의 해석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대를 주도하는 역사의 서술자이기도 하다. 즉 그 자체가 역사이자 동시대인 동시에 동시대를 이끌어가는 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는 미술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자명 하게 드러나는 일이다.
인간은 부단하게 그 삶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신장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편 그 자신과 타인, 타문화와 우주에 대한 태도와 그 태도를 드러내는 문화적 의미체를 창조적인 방법으로 발신하기 위해 다면적인 인간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한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당시의 삶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과 가치를 부단하게 갱신하는 동인이 되기도 한다.
예술사를 들여다보면 예술은 지속적이며 동적인 프로세스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형식을 발전시킴으로서 변화하는 가치관을 반영하는 동시에 생성하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이중에서도 시각 예술가는 사회의 안테나가 되어 사회나 동시대의 가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동시대인들의 인간정신을 눈에 의해 소통되는 시각적 기호로 표현한다.
다. 세상을 탐구하는 한편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
그리고 이러한 시각예술은 교육을 통해서 개개인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될 뿐 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 등 각종 정보를 통합함으로서 단순하게 나열하거나 암기하는 것이 아닌 학습자 스스로가 세련된 방법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생활에서 필요한 다량의 성숙된 정보를 조직화 하는 것으로 관찰된다.
더욱이 시각 예술은 모든 인간의 의미심장한 자기표현(self-expression)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아이들은 그들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의 의사소통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의 중요한 수단을 시각예술을 통해 습득하게 된다.
또한 아동기를 거친 학생들은 그들의 경험을 확장시켜 시각 예술에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해서 지식을 적용시킨다. 따라서 보다 폭넓고 다양한 사유와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을 배양하게 되며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며 똑같이 다른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고 그들의 가치 및 신념을 존중하게 되면서 시각 예술적 요소들을 통해 특수한 사람들의 사유들을 보편적인 시각으로 연결시킨다.
그리고 보다 발전하게 되면 시각예술을 통해 각종 문제 해결능력 뿐만 아니라 그들의 창조의 성숙을 반영할 시각 예술의 더 복잡한 구조를 통찰력 있게 이용하고 때로는 창조해 나간다. 그리고 각종 시각예술 분야의 매체, 작풍, 모양 등을 구조화함으로서 그들의 창조적 행위와 새로운 문제에 대한 접근법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의 관계를 창조해 내게 된다.
그리고 교양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세와 역할을 인식하게 함으로서 인간의 일상적 생활과는 다소 유리되었다 할지라도 인간과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시각 예술은 또한 인간의 교육과 심리적, 물리적 치료에도 사용된다. 시각 예술은 발달이 지체된 아이들,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들의 교육은 물론 성인들의 사회적 병리현상을 비롯한 각종 정신적인 문제까지도 치료하는데 주로 사용되며 때로는 부수적인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시각예술의 심리적 치료효과는 일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건물 이나 공간, 지역의 벽화, 공공적인 성격의 미술 등으로 기능하면서 지역 사회의 화합과 지역민들의 소속감이나 유대를 강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개인이나 집단의 정신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라. 예술은 속임수가 아니라 깨우침에 의해 즐거움을 주는 것
시각예술의 획기적인 발전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졌다. 공기원근법과 선 원근법 그리고 해부학 등은 3차원의 세계를 평면회화로 완벽하게 재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재현으로서의 회화는 인간의 시각예술의 근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신기루이자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철저하게 시각예술의 본질에 대한 회의와 탐구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각예술의 전모는 크게 변화하였다.
20세기 말부터 현대인의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변화 속에 분화하면서 새롭게 변화하였고 이런 환경의 변모는 우리의 시각 문화 또한 변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바탕에는 어느 것이 주도적으로 변화를 이끌었다기보다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새로움을 모색하고 변화를 시도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최근 들어 어느 때보다도 빨라져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약진을 거듭하며 기존의 서양 미술이 지녔던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새롭게 변모시켰던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정체가 모호하지만 스스로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에 의해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양의 시각 예술가들도 영향권 안으로 끌어 들이면서 하나로 통합된 시각 문화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는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면에 자리한 제국주의적 경향이나 패권주의적 성향 때문이지만 한편으로는 동양의 경제적 산업적 발전과도 관련이 있다. 아무튼 이러한 변화는 놀라운 패러다임의 변화였다. 으며 그가느이 시각문화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더니즘은 이후 시각 예술의 미학적 가치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가치로서 등장한 후기모더니즘에 자리를 내 주었지만 포스터모더니즘의 바탕에는 여전히 동, 서양을 넘나든 가장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이었던 모더니즘의 도그마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과 중국에서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진화는 자국의 문화적 전통과 체질 그리고 새롭게 변모하는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독특하고 차별화 된한 시각 예술의 가치를 일구어 내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이제 시각예술은 더 이상 재현적 기능에 머무르고 있지 않으며 사회현상의 하나로 개량된 시각언어의 일종으로 수용되면서 전통적인 지고 지선한 예술, 천상의 세계로부터 내려와 일상화되고 파편화 되면서 때로는 대중문화와 구분할 수 없는 새로운 오락이나 즐길 거리로 변모하면서 가볍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사회적 요소로 까지 작용하고 있다.
마. 시각예술은 예술이자 정보이다.
시각예술의 변모는 종래의 미적인 기쁨의 주관주의의 변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예술을 수용하는 문제는 창조의 문제와 대척점에 있었지만 민주적인 시민사회로의 이행과 시각예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문화예술을 향수하는 것, 시각문화를 소비하는 것 자체가 창조적인 행위에 속하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전통적으로 시각예술을 포함한 문화예술은 주관주의적 미적 기쁨의 대상이었으나 오늘날의 시각예술은 대중화되고 파편화하면서 빠르게 소통하고 새롭게 변모하는 양태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각예술의 소비 또는 향유한다는 것은 종전처럼 감상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기준도 없이, 각자 자기 방식대로 예술을 체험하고 미적 감동은 내적인 환희로 나타나는 것에 국한 되었지만 오늘날은 이러한 환희를 서로 공유하고 서로 나눈다.
따라서 시각예술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한정되는 신념의 예술이 아니라 소통의 예술로 예술사회사적인 측면이 강조되면서 시 지각을 비롯한 청각과 후각 등 오감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그것들을 다시 재조합해서 새로운 가치를 발신하는 정보의 총체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시각예술을 소통과 교류를 통해 계속 진화하면서 자신의 참된 가치를 변화시켜가는 절대적인 것에서 상대적인 개념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시각예술이란 하나의 정보이자 그 소비와 향수를 통해 또 다른 가치를 창조해내는 자생적 개체가 되어 가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창조적 에너지의 발현을 자극하는 주체가 되고 있다.
3. 한국의 시각예술의 몰락과 그 배경
한국의 시각예술의 자생성은 오랜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도 사대부는 사대부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그들만의 시각예술을 향유하고 창조하고자 했다. 수준 높고 문기 넘치는 전통회화가 그렇고 민화라는 치기어리지만 소박한 시각예술이 또 한 그러한 전통을 입증한다.
물론 종교적인 신앙심도 시각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고려시대의 불화나 신라시대의 불상조각 등 그 실증적 사례들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사회적으로 중간계층이었던 역관이나 한의 또는 상인 계급을 중심으로 새로운 회화양식을 창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삶의 조건들은 사람들을 우선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리게 함으로서 황폐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사정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만 집중하고 있다.
기본기는 갖추지 못한 채 응용학문에만 관심을 두며 잘 산다는 의미를 물질적인 것에 국한해서 ‘보다 더 만족한 돼지’가 되고자 한다. 이는 그간 경제 성장 일변도의 정책의 부산물일 수도 있지만 문화예술에 대한 사회지도층의 인식부족과 이를 주도할 인적자원의 충원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질만능의 배금주의가 ‘소크라테스’의 사회적 역할을 도외시 한 탓이기도 하다.
가. 인프라가 없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의 문화적 인프라의 부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시각예술을 체험하고 이를 통해서 또 다른 창조적 실천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원리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나라의 시각예술의 본령이라 할 미술관의 부재이다.
인구 사천 오백 만의, 선진국 클럽이라고 하는 OECD 가입국가로서 국립미술관은 단지 한 개소에 불과하다. 이것도 국민의 발길을 외면한 채 청계산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시각예술에 인식을 그대로 반증하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우리가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매우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국립박물관은 중앙박물관을 포함해서 전국적으로 12개소에 이르는 데 반해 국립미술관은 현대를 다루는 국립현대미술관 한 곳에 불과하다. 과거의 찬란한 역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미래의 문화재이자 전통이 될 오늘의 시각예술은 철저하게 방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나마 이곳은 현대라는 시대를 전제하면서도 한국의 근대와 현대 그리고 서양의 현대미술까지를 망라하는 종합 백화점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오지에 위치한 국립미술관을 국민의 10분 일이 한 번씩 찾는다 하더라도 일년에 평균 100만이 찾는다고 가정했을 때 4년 반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이런 상황에서 시각예술의 발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화를 빌미로 지방정부가 시립 또는 도립미술관을 건립 할 것을 권장하면서 슬그머니 발을 빼려하고 있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지방의 도 시립미술관은 건물만 있지 소장품이 거의 없거나 대부분이 작가들의 기증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어 상설전시는 업무도 내지 못하고 자치단체가 위임한 공모전 장소나 대관전시장으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미술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의 타개책으로 중앙정부는 민간부문에서 미술관을 설립 운영하도록 권장하고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립 미술관들이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미술관의 기본인 소장 작품의 확보는 물론 변변한 기획전도 꾸리기 어려워 미술관의 원칙인 비영리 공공성이라는 대전제를 외면한 채 대관이나 기획전시의 출품작의 판매 등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를 낳고 있다.
또 시각예술의 다종 다기한 면모를 경험 할 수 있는 근대미술관, 조소전문미술관, 사진 미술관, 판화미술관, 공예미술관, 디자인 미술관등의 건립도 아울러 고민해야 할 때이다.
나. 전문 인력이 부재한 문화예술정책
사립미술관들이 어려운 운영난을 호소하자 경제부처에서 내 놓은 안은 기획전시에 출품된 작품의 판매를 허용하는 쪽으로 법안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유네스코산하 세계 박물관 협회가 권장하는 미술관, 박물관의 원칙을 무시하는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유네스코를 탈퇴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런 용감한 정책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 일까. 이는 우리 관료조직의 비문화적 태도와 문화예술에 대한 무지함을 반증하는 동시에 정부재정 확대 즉 국민의 세금을 아끼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문화 예술, 특히 시각예술에 대한 이해 부족은 화랑과 미술관이라는 시각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인프라의 개념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시각문화와 관련한 제도나 정책을 입안함에 있어서도 이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은 자문위원이라는 외부 전문가들을 동원해서 대신하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철저하게 행정 전문 관료로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취하고 이를 객관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대로 재단하고 자료화함으로서 자문회의는 요식행위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이해와 교육이 거의 전무한 전문행정 관료들은 문화예술 정책을 국민의 세금을 분배하는 것을 전부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인 철학이나 예술에 대한 비전과 없이 사업을 늘어놓고 국고 또는 진흥기금등 각종 기금을 지원하는 것이 문화예술행정의 본령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시각예술의 전문 인력들을 전면에 배치해서 비전과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현장의 소리를 반영하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다. 철저하게 도외시되는 시각예술교육
얼마 전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사회가 온통 큰 일이 난 것처럼 떠들 썩 했지만 그 이후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위해 실증적으로 어떤 조치들이 강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문학이 위기라면 시각예술부문은 제 살을 깎아먹으면서 마지막 숨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다. 균형발전을 이야기 하지만 지역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계층간의 소득격차도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경제 분야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실용주의 학문이 주도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은 이제 간택만을 기다리는 후궁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혹여 선택되었다 할지라도 그 시간이 필수과목 수업으로 대체 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다.
시각예술교육이 홍익인간 양성을 위해 필수과목이던 시절에도 우리에게는 미술시간이란 오직 ‘그리는’ 수업으로 일관해 왔다. 이는 교육과정의 개발에 등한시 한 미술계와 교육계의 책임도 크지만 진정한 시각예술교육이라 할 감상교육 즉 문화 소비자로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우리가 마음 놓고 좋은 미술품을 감상 할 장소와 작품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많은 이들을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시각예술에 한해서 장애인을 양산한 결과를 낳는 결과를 가져 온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진정하고 성실한 시각문화 소비자양성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이 도입되어야 할 것이다.

라. 문화예술 마케팅의 도구로 전락하다
이렇게 청소년기 학습기에 시각문화를 체험 할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최근에는 많은 기업들이 이러한 기회제공을 위해 기업이미지를 고양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물론 척박한 문화적 환경개선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조금 더 상세히 들여다보다보면 시각예술 체험이나 강좌 등이 기업 특히 금융권의 이벤트 도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앞서게 된다.
이는 기우일수 있으나 특히 시각예술에 대한 기본적인 속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은 채 기업의 마케팅에 동원됨으로서 시각예술의 본령은 사라지고 특정한 기업이익과 부합되는 측면만 강조됨으로서 시각예술의 이미가 왜곡될 수 도 있기 때문이다.
마. 시장이 인정하는 것만 존재한다.
기업의 이벤트에 시각예술이 동원될 때에는 CI등 디자인 등에 우선되거나 기업이윤의 분배를 통한 사회적 기여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나 우리의 현실은 시장에서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일차적인 요소로서만 작동한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시각예술은 이미 시장경제의 중심으로 이동한 지 오래이다. 미술관은 행정형 책임운영기관이라는 기형적인 구조로 바뀌었으며 미술시장은 30여명의 작고작가 또는 생존 작가의 작품판매 비중이 전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2005년 87.9%에서 작년에는 77.2%로 집중되는 현상이 다소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편중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문화예술기관 중 미술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국립극장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의 책임운영기관화는 국립극장이라는 공연예술중심 시설과 작품의 수집과 보존 그리고 연구라는 미술관의 기능을 무시한 채 단순하게 정부혁신 차원에서 도입되었다. 단지 문화예술기관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책임운영기관으로 전환하였으나 여전히 국고에 의존하고 기관장도 정부가 임명하는 무늬만의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시장의 논리 때문에 저자거리에 나앉은 것은 시각예술뿐 만은 아니다. 일본도 갖지 못한 오페라 좌라고 자랑하던 오페라 좌는 공연예술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뮤지컬에 자리를 내 준지 오래이다.
기초 인프라가 구축되기 전에 성급하게 실시된 교육개정에 따라 체험학습과 현장학습제도가 운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체험을 제공하거나 현장학습을 할 만한 장소나 기회는 태부족한 현실에서 이를 노린 상업 자본들은 소장품 없는 미술관을 임대해서 소위 블록버스터형 전시를 통해 학생들의 방학숙제와 체험학습장으로 제공하면서 수익을 올리기에 급급하다.
시각예술분야의 중추라 할 미술관의 부족을 메우고 지방자치 단체장의 치적을 위해 급조된 공립미술관들은 운용예산과 전문인력확보 그리고 작품의 확보에 앞서 미술관을 건립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부족한 지방재정은 미술관의 건립부터 삐걱거리면서 BTL방식이라는 희대의 방식으로 미술관을 건립하고 있다.
민간자본으로 공공시설을 건립하고 중앙정부나 지방정부가 이를 임대해서 사용하는 민간 투자방식인 이 방법은 건축비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빚을 내어 미술관을 건립하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이렇게 건설된 미술관의 앞날은 미루어 짐작하지 않아도 암담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시각예술의 발전과 기초체력 기르기는 구두선에 불과하다. 이제 저자거리의 논리와 경제논리가 횡행하는 시장경제주의는 오직 산업이라는 전제아래 존재 가능한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서구자본주의 국가가 이미 이룩한 문화적 인프라와 소프트웨어를 갖춘 후에 실시한 후기 자본주의적 제도는 그들의 경험과 양질의 문화적 토대가 전제되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치 미국 등 일부 선진국들이 개발 도상국가들이 선진국가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적인 각종 규약을 통해 선진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차버리는 것처럼 문화복지를 실현해 줄 문화적 사다리를 우리 정부가 스스로 차 내면서 필요하면 사다리를 사오라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래서 우리가 섣불리 시장으로 시각예술과 문화를 업고 달려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마. 유미주의적이며 자기만족적인 생산자들의 자세
그러나 이렇게 척박한 시각예술의 환경은 시장경제주의자들이나 신 자유자들의 태도에도 기인하고 있지만 시각예술계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의 자기만족적인 태도에도 기인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제작에만 매달리는 자족적이며 자율적이고 자기 목적적인 예술가들이 대부분이다.
사회, 정치, 종교 등 어떤 기준들에 의해서도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술에 있어서 유아독존적 존재로서 자신들을 위치시킨다. 따라서 세간의 시각예술 제도나 정책과는 무관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들에게 관심은 오직 자신의 작품뿐이다, 예술에 살고 예술에 죽을 수 있다면 그만인 낭만주의적이고 유미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이러한 우리나라 작가들의 속성은 이미 조선시대 말기 문인화가들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중요한 제도나 정책 등 시각예술의 토양의 비옥화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단지 테오필 고티가 말한 것처럼 '예술이란 그 미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더라도 미적인 것 외에 여하한 가치를 위해 전력해서는 안 된다'고 한 사실과 통하며 '진실로 아름다운 것이란 단지 무용한 것이다'.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어쩌면 시각예술의 척박한 환경을 스스로가 자초했다는 일부 지적에도 크게 반박할 이야기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4. 다시 시작하면서
질곡의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룩한 후 다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고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었다. 민주화 세력이 10여년 이상을 집권하면서 외형적인 민주화는 가시권에 들어 선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기에는 아직도 무언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 부족함의 이유는 간단하다. 문화로 부강 하는 사회, 문화가 넘쳐나는 사회야 말로 진정으로 그리고 시민들이 실감하는 민주사회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지점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의 과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도 중요하고 분배도 중요하고 소득의 재분배도 의미 있지만 문화적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서 진정한 민주화를 실현 할 때 인 것이다.
문화적 민주주의란 문화를 늘 향유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일반 시민들도 자신을 표현하고자 할 때 서투르지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와 장소와 도구를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아마투어 작가로서 여가를 재창조 할 시간으로 할용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민주주의의 완성이 요원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떤 정치지도자들도 문화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념은 분명 하게 밝히지만 누구도 정권을 잡거나 유지하는데 급급할 뿐 문화적 이념을 분명하게 표명한 적이 없다.
따라서 분배냐 성장이냐라는 경제적 아젠다처럼 문화에서도 문화의 질을 높일 것인가 아니면 폭을 넓힐 것인가에 대한 문화적 어젠다를 제시하지 않거나 못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각예술을 포함한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의 정도가 너무나도 부박해서 마치 문화예술이란 사치품이거나 기호품이라는 인식이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정치인이나 정책입안자들의 의식의 정도가 이 정도이나 제대로 된 문화민주주의의 실현은 요원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문화예술이란 국가가 국민에게 제공해야할 국방이나 치안, 사법이나 행정처럼 공공재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현대국가의 최종 목적지이기도 하다. 즉 중앙정부건 지방정부건 간에 맑은 물과 공기를 시민들에게 공급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양질의 문화를 최소한 제공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일반 국민들의 문화적 향수기회는 증대되어야 마땅한 것이지만 재정적 이유 때문에 무작정 공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이다. 따라서 최소한 문화의 기본권을 보장해주는 선에서라도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물론 이후의 문화적 향수기회는 수익자 부담원칙을 제공해도 좋을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문화를 향유하며 가꿀 줄 안다는 것이다. 야채가 소득이나 먹거리 라는 점에서 훨씬 경제적으로 유익하지만 작은 땅이나 화분에 꽃을 심는 이유를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꽃은 야채보다 아름답기 때문이며 그 아름다움은 야채의 실용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문화란 삶의 조건이자 생활습관이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집을 꾸미고 정원을 가꾸는 수고스러움과 심한 웃풍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아파트를 버리고 출퇴근에 한 두 시간을 소비하더라도 교외로 나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개념과 개성과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작은 성취감 때문이다.
때로는 인간에게는 이해 할 수 없거나 설명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다. 이것을 산술적으로 계량화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삶의 전제이자 실현을 풍요로운 삶의 실체이다. 이제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화적 복지의 제공이며 이는 삶의 때를 허허롭게 털어낼 수 있는 도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으면 한다.
끝으로 대선주자들에게 문화적 비전과 아젠다 그리고 그 실천적 방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시민단체와 문화예술단체들이 공동으로 전개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

- 상계학사 홈페이지 http://www.forumcjc.com/ (2007.2)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