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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유전의 발굴 뒷이야기 (1) 최초의 '신라금관'과 금관총

조유전


'땅 속에 금 나왔다' 소문에 일본 순사가 신고
일본순사의 신고로 발굴된 최초의 신라금관, 하룻밤 사이에 끝낸 무령왕릉 발굴, 미국병사가 발견한 전곡구석기유적. 이번호부터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유적 발굴의 흥미로운 사실을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유적 발굴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조유전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장이 당시 생생한 발굴 현장의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를 전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대유물 가운데 가장 화려한 유물은 순금으로 만든 신라금관이 으뜸이다.
지금까지 출토된 순금신라금관은 금관총금관(金冠塚金冠), 금령총금관(金鈴塚金冠), 서봉총금관(瑞鳳塚金冠), 천마총금관(天馬塚金冠), 황남대총금관(皇南大塚金冠)이 있다. 이들 금관들은 세상에 들어날 때 각기 나름의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제일 먼저 출토된 금관이 금관총금관이다.

주막집 확장위해 터 고르다가 발견
일제강점기인 1921년 어느 가을날 경주읍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땅속에서 금 귀걸이 등 금제품이 나와 애들이 주워서 가지고 놀고 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경주읍내에 퍼져 당시 경주경찰서 미야케 고우조우(三宅興三) 순사의 귀에 들어와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소문의 진원지는 봉황대(鳳凰臺) 아래 경주로서동 길가에 붙어있는 주막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막을 경영하고 있던 박문환은 장사가 잘되자 주막을 확장해 손님을 더 많이 받고자 했다.
그래서 집 뒤의 언덕에 의지하고 있던 작은 뒤뜰을 확장하기 위해 터를 고르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막이 무덤을 의지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땅속에서 금붙이가 출토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되어 소문이 돌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야케 순사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고대 신라 왕족이거나 귀족의 무덤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즉시 공사를 중단시켰다. 당시 일본순사의 권한은 막강했기 때문에 박 씨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작업을 중단해야했다. 그는 이 사실을 즉시 상사인 이와미 히사미츠(岩見久光)경찰서장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긴급지시를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이와미 경찰서장은 당시 경주주재 조선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으로 나가 현장을 살펴본 뒤 곧 경찰서장 입회하에 유물을 수거하기로 하고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인 오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등과 함께 발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4일 만인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조사 사흘만에 ‘순금 황금관’ 발굴
이렇게 해서 경주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신라의 금관이 그것도 순금의 황금관이 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때 금관과 함께 출토된 수많은 유물은 그 동안 베일에 가렸던 신라문화의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소문을 듣고 수소문해서 현장을 찾아가 작업을 중지시킨 미야케 순사의 판단은 옳았고 그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가의 택지를 고르기 위해 작업하다 발견되었지만 계속해서 파 해쳐 유물들이 이사람 저사람 손으로 흩어졌으면 지금까지도 금관총 금관은 그 존재의 의미를 잊고 최초의 신라금관출토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미궁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발굴조사가 완료된 후 발굴자들은 이 무덤의 이름을 금관총으로 했다. 이유는 발굴결과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출토되지 않아 고심하다 최초의 신라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것을 학술적으로 기념하기 위해서 금관총으로 작명한 것이다. 언젠가 주인공의 이름이 밝혀지는 날이 오면 자신의 이름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런데 금관이 출토되는 등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 유물들을 정리할 장소가 없었다. 말하자면 당시만 해도 경주에 박물관이 없었을 뿐 아니라 출토유물을 정리하고 보관할 시설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 경복궁에 건립된 조선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정리와 보관을 하고자했다. 당연한 결정이었지만 이 소식을 접한 경주읍민들은 경주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유물이 경주를 떠나는 것을 반대했다. 그 대신 경주읍민들이 성금을 모아 발굴 2년 후인 1923년 금관총출토유물진열관을 만들어 조선총독부에 기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조선총독부에서는 결국 1926년 경주에 박물관분관을 신설하고 금관총유물을 임시로 마련된 유물전시관에 전시·보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주분관이 개관된 이듬해인 1927년 11월 어느 날 금관총 출토 전시유물 가운데 금관을 제외 한 순금제의 허리띠장식품, 귀걸이, 팔찌 등 중요 유물들이 싹쓸이 도둑을 맞았다. 도둑맞은 사실이 알려지자 경주는 물론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언론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도둑은 잡히지 않고 그해를 넘겼다.

도난 6개월후 경찰서장 관사서 발견
경주를 찾는 관광객유치에 차질을 빚게 된 것은 물론 범인이 이들을 녹여서 금덩어리를 만들어 팔지나 않을까 경주읍민들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경주번영회를 중심으로 도둑맞은 물건의 소재지나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한편으로는 무덤에서 출토된 순금제품은 녹여도 보통의 금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바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무덤에서 나온 물건을 집안에 갖고 있으면 식구 중 반드시 앓거나 좋지 못한 일이 생긴다고 소문을 냈다.
말하자면 도둑을 잡기위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심리전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거액의 현상금도 심리전도 소용없이 해를 넘겨도 오리무중. 도난 유물을 찾는 수사는 절망적이었다.
이제 영영 미제로 남는가 했는데 도난 6개월 후 1928년 5월 어느 날 새벽 일찍 변소를 치기 위해 다니던 한 노인이 우연히 경찰서장 관사 대문 기둥 밑에 놓인 이상한 보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범인은 바로 도난당한 금관총출토 유물을 쌓아 놓고 달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심리전이 효과를 보았던 것만은 분명하다.
금관총출토 금관은 국보 제 87호로 지정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조유전 토지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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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동아대에서 ‘신라 황룡사 가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관, 문화재연구소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완도 청해진, 나주 목암리 고분군, 장도 청해진 등 발굴조사위원을 맡아 온 유적 발굴의 권위가이다. 현재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한국선사고고학사, 발굴이야기, 고구려의 고고문물 등이 있다.
※ 출처-교수신문 2007.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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