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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에 있어 내러티브의 재발견

류한승


류한승
조선일보 2007 신춘문예 미술당선작
1. 내러티브와 미술

내러티브(narrative)는 이야기이다. 인과관계로 엮인 허구 혹은 실제 이야기가 내러티브이다. 내러티브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즉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가 이야기를 즐겼으며, 시대, 장소, 사회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 부류와 집단은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다. 또한 내러티브는 너무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신화, 전설, 우화, 설화, 소설, 서사시, 역사, 고백록, 비극, 희극, 무언극,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일상 대화 등에서 우리는 내러티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만큼 내러티브는 우리와 다각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미술도 그 예외는 아니다. 미술에서의 내러티브는 회화, 두루마리 그림, 부조, 스테인드글라스 등에서 발견된다. 역사적 사건, 신화, 전설, 일상적 이야기의 특정한 장면들이 이러한 매체를 통해 설명적으로 상세히 시각화되었다.

물론 미술에 있어 내러티브가 위기를 맞을 때도 있었다. 특히 모더니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내러티브를 문학적 요소로 취급하여 금기시했을 뿐만 아니라 미니멀리즘과 같은 형식주의 추상에서도 이야기는 철저히 외면당하였다. 당시에는 예술의 형식적 탐구가 주류를 이루었기에 내용적 측면은 자연히 무시되었다.
하지만 현시대에 있어 내러티브는 다시금 중요한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70년대 후반 구상미술이 재등장하고 더불어 포스트모던 경향이 만연되면서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이 상당수 출현하였다. 나아가 비디오 아트의 강세는 내러티브의 위상을 더욱더 강화시켰다. 시간성이라는 비디오 아트의 특수한 매체적 특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작품 내에서 이야기 구조가 핵심적 사항으로 떠오르고 있다.
더욱이 현재 내러티브를 눈여겨 보아야할 이유가 그뿐 아니다. 미술을 떠나 우리는 어떤 현실에서 살고 있는가? 채널이 80개나 되는 케이블 TV는 24시간 내내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는 사실상 너무도 많은 내러티브에 노출되어 있으며, 내러티브와 더불어 생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온통 이야기 속에 파묻혀 있다. 그러므로 미술에 있어 내러티브의 의미와 역할을 점검해보는 것이 시기적절한 과제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본고는 미술작품에 내재된 내러티브를 다루고자 한다. 그러나 소설, 영화 등 다른 매체에서 나타나는 내러티브를 그대로 미술에 적용시키고자 함은 아니며, 그렇다고 단순히 내러티브를 가진 작품들을 발견하고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미술이라는 장르만이 지닐 수 있는 독특한 내러티브의 특징을 찾음으로써, 작품의 이해와 분석에 있어 보다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나아가 그것을 통해 미술의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고, 미술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가를 짐작해보고자 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내러티브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문학, 영상 매체(영화, 애니메이션), 미술(특히 비디오 아트)의 비교를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검토함으로써 미술 고유의 내러티브를 탐구하고, 이어서 미술 언어로서 내러티브를 실제 작품에 적용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작품에 나타나는 일반적 내러티브’, ‘창작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러티브’,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진 내러티브’, ‘디지털 시대에 있어 내러티브’ 등 네 가지의 양상으로 나누어 논의를 진행할 것이다.


2. 내러티브란?

‘내러티브’란 무엇인가? 먼저 이 용어의 정의를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는 ‘사건, 체험 따위를 서술한 것’이다. 사건을 담고 있는 이야기 또는 담화(談話)로 칭해질 수 있다. 우리말로는 ‘서사(敍事)’로 번역되는데, ‘敍’는 ‘차례를 정하다’이며, ‘事’는 ‘일’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을 차례대로 놓는다’라는 의미로,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다음으로 ‘사건’이란? 사건은 행위자에 의해 야기되거나 경험되는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의 전이로 정의된다. 그런데 사건들은 명백한 법칙에 따라 연속되어 일어나야 한다. 앞뒤의 사건들은 시간적 선후 관계뿐만 아니라 원인과 결과에 의한 인과관계를 필수적으로 가져야 한다. 따라서 독자가 사건의 흐름을 자연스럽다고 느껴야만 비로소 사건이 의미를 획득한다. 이 관점에 의거한다면 독립된 한 가지 사실을 사건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문학 작품에 있어 서사물은 사건의 나열로 짜여진 언어적 구성물이다. 물론 지식과 정보를 단순히 늘어놓거나 논증, 설명, 묘사의 양식을 취하는 것은 내러티브가 아니다. 사건, 등장인물, 배경이라는 구성요소를 지니고,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시간적 흐름에 따라 기술해가는 양식이 내러티브이다. 하지만 막상 어떤 텍스트가 서사물인지 아닌지를 구별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왜 서사물을 좋아할까? 그것은 삶을 사는 일이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이고, 사람살이가 있는 곳에 이야기가 생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일화의 효과를 주어 주인공의 경험이 독자의 경험이 되고, 그의 깨달음이 곧 자신의 깨달음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러티브는 인간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래서 우리는 내러티브를 원하고 즐긴다.
과거에는 내러티브라고 하면 주로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만이 대상이 되었지만, 최근에는 영화, 애니메이션 등 확장된 시각언어에서도 내러티브를 논의하고 있다. 이 두 부류는 매체 자체가 확연히 다른 만큼 각각 내러티브를 이용하는 방식도 사뭇 다르다. 그렇기에 이 둘의 차이점을 잠시 점검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디오 아트 분석에서도 상당 부분 유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문학은 기본적으로 문자 언어를 사용하지만, 영화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그러나 영화는 영상뿐만 아니라 음향(인물의 대사, 배경음악, 잡소리 등)으로 구성되며, 종종 자막이라는 텍스트도 추가된다. 따라서 영화라는 매체는 매우 복합적이다. 게다가 소설은 문자 언어로 정보를 전달함으로, 독자들은 상상력에 의지하여 어떤 이미지를 추상해야 한다. 그렇지만 영상은 대상을 직접적이고 즉물적으로 보여준다. 좀더 구체적이다.
둘째, 사건 전개에 있어 인물은 중대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자연인으로서의 인간(배우 그 자신)과 극중 역할로서의 인간(배우가 분장한 인물)으로 어쩔 수 없이 나뉘어 진다. 영화의 경우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 스타로서의 상품성, 기존 작품과의 연관성 등이 인물 설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문학에서는 완전 진공상태에서 투명한 캐릭터를 만들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배우에 대한 선지식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셋째, 영화에서는 물리적인 시간이 존재한다. 문학 작품에서도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과 시간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피상적이다. 영화에는 이미지를 촬영한 시간, 내부 사건들의 스토리 시간, 영사의 시간(러닝 타임) 등 엄연히 3개의 시간이 있다. 이와 같이 구체적인 시간의 드러남은 비디오 아트에서도 해당되는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제 다음으로 영화에서의 내러티브와 미술에서의 내러티브를 비교해보자. 논의의 효율과 편의를 위해 미술에서의 내러티브는 비디오 아트만을 대상으로 하고자 한다. 비디오 아트는 근본적으로 영화에 비해 서사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미술은 이야기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미술에서 내러티브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염두 해 두고 두 매체를 살펴볼 것이다.
첫째, 앞에서 서술했듯이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보통 유명한 사람이다. 배우 자체로서의 이미지를 배제하기 힘들다. 비디오 아트는 대부분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둘째, 영화는 비교적 상영 시간이 길다. 따라서 사건이 제법 많다. 반면 비디오 아트는 적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오히려 개개의 사건을 독립적으로 초점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셋째, 비디오 아트는 영화에 비해 보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구성을 가진다. 주제, 이야기 전개, 시간 변조, 촬영 방식, 편집 등이 자유로우며, 심지어 사건의 흐름도 논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넷째, 최근 비디오 아트가 점차 대규모 예산으로 제작된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적은 예산으로 인해 영화와 같은 훌륭한 시각적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표현에 있어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이 있다. 모든 영상 작업은 내러티브를 가지는가? 이런 의구심은 시간성이라는 측면 때문에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문학에서도 묘사, 설명, 서사가 있듯이, 영상에서도 인물이 등장하지 않고, 설령 등장하더라도 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상이라고 모두 내러티브를 논할 수 없다. 한편 물리적으로 시간이 정지된 회화와 조각의 경우 무조건 내러티브를 지닐 수 없다고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감상자들은 그 안에서 사건의 흐름을 추적하여 나름대로 내러티브를 구성할 수 있다.


3. 내러티브의 여러 양상

1) 작품에 나타나는 일반적 내러티브

첫 번째 경향은 소설과 영화처럼 미술작품이 명시적으로 내러티브를 담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창조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작품을 만든 경우이다. 특히 비디오 아트가 대표적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매체의 특성인 시간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생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004년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된 전준호의 를 보자.(그림1,2) 배경은 10달러 화폐 뒤에 그려진 미국 재무성이고, 주인공(두루마리를 입은 한국사람)은 외국인에게 길을 묻지만 언어적 차이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속에 주인공이 찾아간 곳은 독립기념관 내부이다. 본래 2달러 뒷면에는 재퍼슨 대통령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재퍼슨을 대신하여 기미 독립선언문을 우렁차게 낭독한다. 이 작품은 역사적 상황을 소재로 하지만, 사실 작가가 고안해낸 허구적 내러티브이다.
또한 2004년 부산 비엔날레에 선보인 조습의 <무제5-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역시 흥미진진한 청춘 스토리를 담고 있다.(그림3) 주인공은 고등학생으로 친구들과 소풍을 가는데, 우연히 만난 여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이들은 불량배에게 여학생들을 빼앗기고 실컷 두드려 맞는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비디오 아트로 마치 단편 영화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과연 회화에는 어떤 내러티브가 있을까? 두루마리 그림 또는 여러 캔버스로 이루어진 그림에서 내러티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1개의 화폭으로 이루어진 회화에서도 내러티브는 존재하는가? 회화는 비디오 아트처럼 시간성을 물리적으로 가질 수 없으므로, 분명 다른 방법으로 내러티브가 다루어져야 한다. 지난 10월 노암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던 박민준의 그림 중 <그를 용서할 수 있는가?>를 주목해보면 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다.(그림4) 작품에는 땅에 기대어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와 똑바로 서 있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남자의 손을 잡아주려는 희미한 여성의 이미지가 동시에 그려져 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무언가 죄를 지었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여자에게 구걸하고 있다. 한편 여자는 이미 마음으로 그 남자를 용서하고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으나, 실제로는 섣불리 그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다. 여자 뒤에 그려진 성은 마음속에 의지를 가로막는 장벽을 은유한다. 그렇지만 화면 중앙의 사슴을 통해 여자의 마음이 본래는 순수한 감정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용서하고 싶지만, 최소한의 자기 방어 본능에 의해 남자의 청을 받아줄 수 없는 여성의 심적 두려움이 그림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이렇게 정지된 화면에서도 상징물, 의상, 배경, 제목 등을 통해 사건의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이야기 구조를 충분히 구성해 낼 수 있다. 그러나 감상자의 적극적인 작품 읽기와 해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감상자에 따라 그 해석한 내용이 다소 달라질 수 있다.
이상 살펴본 전준호, 조습, 박민준의 작품들은 소설과 영화처럼 사건에 따라 전개되는 하나의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박윤영의 작품에는 보다 특수한 방식으로 내러티브가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픽톤의 호수>에는 여덟 가지 이야기들이 혼재되어 있다.(그림5,6,7) 그는 ‘픽톤 농장 사건’, 발레 <백조의 호수>, 영화 <엘리펀트맨>, TV 시리즈 <트윈 픽스>,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하얀 코끼리 같은 언덕>, 팝송 , 살바도르 달리의 <코끼리를 비추는 백조> 등 기존의 내러티브를 뒤섞어 자신만의 독창적인 내러티브를 써내려 간다.
박윤영은 원전의 스토리를 재배치하여 새로운 의미망을 구축한다. 그는 예술적 상상력을 극대화하기에 어쩔 수 없이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보다는 사건의 인과관계가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그 스토리의 진행을 쉽게 예상하기가 힘들다. 즉 관객들은 작가의 의도를 100% 이해하기 어려우며,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가듯 작품의 내러티브를 추적하며 감상하게 된다. 그의 내러티브는 한편으로 작품의 의미와 해석의 여지를 보다 풍부하게 하며, 다른 한편으로 미술만의 독창적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2) 창작 과정에서 형성되는 내러티브

앞 절에서는 작품 내부에서만 내러티브를 찾았는데, 내러티브의 대상을 좀더 확장시켜 생각해 보자. 작품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작품이 형성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내러티브를 주시해보고자 한다. 최근 많은 작가들은 작품의 결과물만큼 창작 과정을 중요시하고, 그 과정을 하나의 예술적 행위로 간주하는 경우가 흔해지고 있다. 몇몇 작가들은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하여 미술과 대중의 소통을 추구하기도 하고, 나아가 일부 작품들은 제작 과정에서부터 일반인들의 참여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도 하다. 아마도 이는 예술이 어렵고 고상하다는 통념에 대한 반대이며, 누구나 예술을 향유하고 그 창작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 사례는 정연두의 <내 사랑 지니> 시리즈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는 평범한 사람에게 꿈을 질문한 후, 그 사람의 꿈을 실현시킨다. 그래서 먼저 현재 모습의 사진을 한 장 찍고, 소원이 성취된 상태로 분장하여 또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해서 두 사진을 나란히 전시한다. 지금까지 그는 서울, 베이징, 도쿄, 리버풀, 암스테르담 등에서 만난 약 20명의 꿈을 실현시켰다. 물론 진정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작업에 참여하는 모델조차도 꿈이 실현되지 않음을 뻔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델이 그의 계획에 흥미를 느끼고, 온갖 해프닝을 겪으면서 공동작업을 완성하게 된다. 비록 정연두는 남의 꿈을 성취시키지는 못하지만, 다수의 사람들과 만나 그들과 소통하며 작품을 구성한다.
그간 <내 사랑 지니> 연작을 실행하며 파생되었던 각각의 에피소드가 모두 재미있는데, 그중 암스테르담에서 협업했던 작업이 꽤 독특하다.(그림8,9) 영화관 영사실에서 근무하는 윌프레드(Willfred)에게 소원을 물었고, 그는 파일럿이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연두는 암스테르담 공군 기지를 빌려 영화 탑건의 한 장면처럼 사진을 찍고자 하였다. 그런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윌프레드에게 촬영을 제의했을 때, 그는 뜻밖에 놀란 표정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동양에서 온 사람이 설마 공군을 설득할지 몰랐으며, 그는 거짓으로 소원을 말했다는 것이다. 그의 진짜 소원은 같은 영화관 매표소에서 일하는 에스터(Hester)와 데이트하는 것이었다. 정연두는 할 수 없이 에스터에게 섭외했던 여자 모델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 오지 못했으니 대신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거짓말 하여, 윌프레드와 함께 사진을 찍게 하였다. 결국 윌프레드의 소원이 대략 실현된 셈이다. 이와 같이 예기치 않았던 여러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함으로써 작가와 모델 사이에서 내러티브가 발생한다.
이렇게 과정에 역점을 두는 작품의 경우 한 가지 난점에 봉착한다. 전시는 결과물을 보여주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과정 자체를 전시로 드러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람자들은 전시된 작품을 보고, 그 작품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정연두의 작품 역시 결과물만 전시되므로 구체적으로 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추측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그는 마치 셜록 홈즈가 사건 현장의 증거물만을 보고 그 상황을 추론하듯이, 의도적으로 사진 속에 여러 힌트를 포함시킨다. 그러한 정황증거를 정확히 찾아내는 것이 작품 읽기의 관건이다.
과정을 강조하는 소위 프로세스 아트 또는 퍼포먼스가 모두 내러티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사람들과 만나서 사건을 벌인다는 것은 내러티브가 발생할 수 있는 충분한 여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의미 있는 특별한 사건이냐, 아니면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평범한 사건이냐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미술이라는 매체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고유한 사건이 중요하고 그에 따라 어떤 의미가 생성되느냐가 핵심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연두의 <내 사랑 지니> 중 이스탄불 작업을 주목해 보자.(그림10,11) 이 때 출연했던 남자 모델은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학비가 없어 거리에서 홍차를 서빙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꿈은 수학선생이다. 당시 이 프로젝트를 후원했던 이스탄불의 한 은행은 정연두의 작업을 접하고, 그 모델이 수학선생이 될 때까지 모든 재정적 지원을 맡아주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의 삶이 변했다. 때론 미술이 한 사람의 인생까지 바꿀 수 있는 적극적인 매체가 되기도 한다.

3)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가진 내러티브

일반 극영화에서 내러티브가 나타나듯이, 다큐멘터리 영화에서도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또한 다큐멘터리의 성격을 띤 비디오 아트에서도 내러티브를 찾을 수 있다. 이 독특한 내러티브는 1절에서 다룬 일반적 내러티브와는 여러 모로 다른 특색을 가진다. 이런 까닭에 이것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의 어원은 ‘documentum’으로 문서, 증서를 뜻한다. ‘사실의 기록’을 의미하며 문학 혹은 영화에서 사용된다. 극영화가 각본에 의해 출연자들이 연기하고, 그에 맞는 인위적 배경을 설정하지만, 다큐멘터리 영화와 사진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그대로 포착한다. 따라서 극영화는 현실을 인위적으로 재구성하여 바라보지만,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실을 중성적이고 관찰자적인 시점으로 바라본다. 그런 이유로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객관적이고 신뢰성이 있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는 제작자의 목소리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실제 다큐멘터리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재현이며, 이때 그 재현에는 세계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시각이 반영된다. 겉보기에 감독의 의견은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상 감독은 자신의 주장을 펼치거나 논쟁 꺼리를 제안하는 것이다.
박주연의 은 다큐멘터리의 요소를 지닌 영상 작업으로 영국의 앤 스미스(Anne Smith)라는 한 여인을 대상으로 한다.(그림12,13) 이 사람은 집이 아닌 자동차에서 거주했는데, 작가는 그녀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영상에 담았다. 그녀는 집이 없지만, 엄밀히 말하면 홈리스(homeless)는 아니다. 단지 집이 자동차일 뿐이다. 앤 스미스는 30년간 자동차에서 살았지만 인간권리협약에 의해 폐차가 결정되면서 아파트로 이사했다. 결국 그녀는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이 작품은 한 사람의 집을 어디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게다가 자기의 고유 생활 패턴을 만들어가면서 자기의 위치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이 작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박화영의 <소리(Jaywalker)>는 떠돌이 개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싱글 채널 비디오이다.(그림14) 작가는 어느 날 동네에서 그 개를 우연히 보게 되었고, 1년 넘게 그 개를 관찰하면서 축적한 글, 드로잉, 사진, 영상 등을 하나의 비디오 작업으로 엮었다. 형식은 다큐멘터리 영화와 흡사해 집 없는 개에 대한 기록영화처럼 보인다. 박화영은 다큐멘터리의 스타일을 이용해 ‘개’와 ‘나’라는 개체 간의 상호연관성 및 유대감을 드러내었다.
미술의 다큐멘터리는 영화의 다큐멘터리와는 다르게 보다 파격적이고 유연한 구조를 가진다. 이야기가 선형적(linear)으로만 전개되지 않는다. 복수의 이야기들이 복합적으로 진행되거나 또는 이야기들이 각기 분절되어 파편화되기도 한다. 이 자유분방한 내러티브는 미술이라는 매체만이 지니는 장점이다. 미술의 다큐멘터리도 사회 현실을 다루기 때문에 영화의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작가의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의 다큐멘터리가 보다 명시적, 논리적으로 의미를 전달한다면, 미술의 다큐멘터리는 보다 암시적, 감성적으로 내용을 표현한다. 그래서 때로는 시각 이미지 혹은 청각적 음향이 두드러지게 강조됨으로써, 매우 감각적인 형태로 제시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될수록 내러티브가 약화된다는 약점도 동시에 지닌다.

4) 디지털 시대에 있어 내러티브

컴퓨터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이른바 디지털 시대가 펼쳐지면서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아날로그 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매체가 부상하면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소통양식이 급변하고 있으며, 예술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작품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의 발전으로 감상자들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고 있다. 과거 작가가 예술작품을 창작하면 감상자들은 그것을 수동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미래에는 관람자가 작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할 것이며, 때론 그 의견이 반영되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관객과 교류하며 작품을 창작할 가능성도 있다. 작가와 수용자가 쌍방 소통하는 색다른 문화가 형성되고 있으며, 점차 감상자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예술작품의 창작과 감상에 있어 새로운 내러티브가 생성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기술 발전에 의한 매체의 변동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도 근본적 변화를 함의하기 때문에 새로운 디지털 내러티브를 연구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이 내러티브의 특색을 파악하기 위해 편의상 전통적 내러티브와 디지털 내러티브로 구분하고 그 특징을 비교해보고자 한다.
과거 전통적 내러티브는 한 명의 화자가 한 명 또는 다수의 청중 앞에서 이야기를 한다. 화자는 다양한 말투, 몸짓, 표정을 이용하여 청중들의 반응과 참여를 이끌어내며 선형적으로 내러티브를 진행한다. 하지만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서는 반드시 한 명의 화자가 말할 필요가 없다. 동시적으로 여러 명의 화자가 등장할 수도 있고, 화자의 이야기에 대한 반응과 댓글, 이어말하기, 동시말하기 등 폭넓은 방식으로 화자가 참여한다. 그리하여 화자와 청자의 구분이 무의미한 채, 이야기가 말해지고 들려지게 된다. 더 이상 저자 혹은 화자가 독점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 이렇게 디지털 시대의 내러티브는 정해진 결말이 없다. 오픈 엔딩의 형식이며, 이야기의 끝은 열려 있다. 이런 특징은 다기성(多記性), 동시성, 상호성, 다중성, 비선형성, 개방성 등으로 요약된다. 그렇지만 디지털 시대의 내러티브는 쾌락과 유희에만 치우쳐 즉흥적·즉물적·표피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디지털의 미로에서 길을 잃는 불행한 사태가 생길 수 있다.
이와 같이 상호작용성을 중심으로 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미술작품이 그러한 특성을 활용하는 순간, 저절로 작가와 관람자 사이에서 내러티브가 발생한다. 웹아티스트 양아치의 <전자정부>를 보자.(그림15,16) 관람자들은 전시장에 설치된 컴퓨터에 자신의 주민등록번호, 주소, 성별, 나이, 출신학교 등을 입력한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그들의 정보가 모여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양아치는 CCTV, 몰래카메라, 전화도청, 전자지문, 전자건강카드, 인터넷 실명제 등 온갖 장치들이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감시한다고 말한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그 감시 시스템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보를 노출해야 한다.
현재 디지털 내러티브는 초기 실험단계이다. 미술계에서도 지속적으로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다채로운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허나 아직까지 그 수가 적고, 형식 실험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그 성과를 단언하기 힘들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미술작품들은 조만간 형식 실험을 끝마치고, 인간사고의 패러다임의 변화까지 촉발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이 자명하다. 그리고 그것이 미래에는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4. 내러티브와 소통

미술의 내러티브는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내러티브와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왜냐하면 미술에 있어 내러티브가 필수 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학,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 내러티브는 너무 본질적이어서 내러티브를 제외하고 거론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장르들에서 발견되는 내러티브의 속성을 그대로 미술에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술에서 가시적이건 비가시적이건 내러티브를 찾을 수 있으며, 그 내러티브가 다양한 방식으로 상당수의 미술작품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과 영화에서의 내러티브가 1차적인 튼튼한 구조물의 역할을 한다면, 미술에서의 내러티브는 비록 2차적이겠지만, 윤활유와 같이 기능을 하여, 작품의 내용과 의미를 보다 풍부하게 확대시킨다.
인류의 탄생 이후 내러티브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우리가 내러티브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삶과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공감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서로 소통된다는 뜻이다. 사실 내러티브의 진정한 의미는 이야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들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실질적인 활동,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내러티브는 우리에게 다가와 진정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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