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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전통과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

송미숙

아시아의 전통과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

송미숙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아시아: 그의 역동성은 그의 다양성으로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시아는 조용하며 병들었고 유혹적이며 악마적이고, 매력적이면서도 파괴적이고 고요하면서도 불쾌스럽고, 민주적이면서도 군주/폭군적이며, 동방적/이국적이면서도 지향성이 결여돼 있고, 등, 등. 아시아는 상당히 다양한 면을 갖고 있어서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면서 혼란스럽고 모순적이다.
아피난 포샤난다(Apinan Poshyananda), Traditions and Tensions: Contemporary Art in Asia

들어가는 말
한동안 동아시아권에 속하는 미술가들의 고민거리가 어떻게 하면 고유한 문화적 전통을 현재 진행 중인 현대미술의 문맥과 흐름 안에 흡수하고 담아내는가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서구에서 제작/생산되어 이제는 지구촌화되어버린 대중문화의 역할이 가중되고 개념적인 성향이 강하며 동시에 문화이론적 담론이 또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최근의 미술의 경향은 이제 지리적, 환경적, 문화적 거리감과 경계를 와해시켜가고 있으며 여기에 정보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은 와해의 추이과정을 더욱 가속화 시켜가고 있다. 여기에 앞 다투어 조직되고 있는 세계현대미술의 메가 페스티벌인 비엔날레의 난립은 미술문화의 엔트로피적 현상마저 초래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아시아문화권내의 미술가들의 그들의 전통을 통한 세계현대미술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은 한편으로는 시대착오적(anachronistic)인 발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in spite of it 존립의 방어적인 전략적 수단으로 그 당위성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시대착오적’이란 의미는 동서양의 대립과 구분의 설정이 이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거의 진부해진 시점에서 다름의 전통을 실행의 시나리오로 삼는 것은 이미 지나간(passé)의 행태라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다름의 담론과 전략은 세계현대미술계의 현장에서 경쟁력 제고의 존립의 전략으로서 아직도 유용한 도구며 무기라는 사실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름’의 전략은 그러나 타자, 즉 서양의 시선으로 바라본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동아시아 내부에서 전통에 대한 자기반성적 탐구와 응시를 객관화 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어야함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좁게는 한 개인의 창조물이며 크게는 그 개인이 속한 시대, 사회, 문화의 산물인 시각예술품은 필연적으로 시대적 흐름과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여왔으며 이 때문에 어떤 시기에서나 미술은 현대성과 전통이라는 두개의 때로는 비타협적이며 대립되는 개념들을 조화시켜 해석해야할 부담을 갖고 의식적이건 그렇지 않든 간에 대처해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독창적(original) 이어야한다는 미술의 성격상 빈번히 전통은 고수해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극해야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작금의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변화의 흐름, 특히 지구촌이 이제 하나의 거대한 제국으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서 이 상반되는 개념들의 충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빈번해져가며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 때로는 거의 차별의 의미가 소멸되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미술이라는 말조차 부재했던 동아시아의 문화적 전통의 프레임 안에서 현대성과 전통의 충돌의 문제는 타자인 서양의 시선에서 바라본 양상--그들이 자신의 문화에서 경험했고 인식했던 잣대로 밖에는 평가할 수 없는--이며 실제는 보다 더 다양하고 복잡하여 그 자체가 하나의 역사적 쟁점이며 내러티브 담론이다. (예를 들면 타이의 전통과 문화는 인도의 그것들과 다르며, 우리의 이웃인 일본과 중국의 그것들은 한국의 전통과 문화적 특성과 또 다르다. 물론 같은 지리적 권역에 있으며 또 거의 전부가 유럽과 미국강대국들의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어 유사함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외부적인 환경의 유사함일 뿐이다. 또한 한국은 오랜 역사에서 이웃나라 즉 중국과 일본의 직, 간접적인 지배를 받아온 경험을 안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장대한 ‘담론’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아시아의 전통과 정체성의 의제가 필자에게 주어진 30분 이내에 그리고 이 심포지엄을 통틀어서도 도저히 다룰 수도 또 해결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서다. 문맥은 다르지만 요즈음 우리네의 기마 민족적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하여 당연시 되고 있는 이른바 “빨리 빨리 문화”의 문화적 패러다임의 재고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과제인 지금 아시아의 전통을 운운한다는 것은 주제넘지 않나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이러한 의구심을 뒤로 하고 필자는 이 자리를 빌어 평소에 생각해오던 몇 가지 의문점/쟁점들 중 하나를 제안하고자 한다.

타자의 주체로서의 아시아의 전통과 정체성

아시아성/동양주의/동양성의 정체
아시아는 종종 서구중심권의 타자로 투사되어왔다. 그러나 아시아인/적인 것들을 타자로 보는 시각은 그들 자신의 정체성의 모색에서 서구인들에 의해 발명되고 해석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주지하는 바다. 서구 헤게모니의 비호 하에 타자를 연구하고 이해하며 통제하려는 욕구는 그것자체가 일종의 문화산업이 되었고 그러한 틀 안에서 학문적 연구와 비평적 담론들을 확산시켜왔다. 이러한 서구의 논쟁들은 지식과 정보의 소유가 타자를 지배하고 재배치하며 권위를 부여하는 권력을 제공하는 한 필연적으로 우월성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학문체제나 체계적인 연구 활동의 과정을 통하여 매개의 기능을 하는 언어의 권력은 이러한 지배, 재구조와 권위의 과정들을 용이케 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과정들이 그러한 과정들을 통제하고 적용하는 이들의 욕구에 따라 기능하도록 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동방’, ‘동양적‘ 그리고 ‘동양성/주의’는 서양과 동양간의 기본적인 구분들을 매기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어휘로서 여전히 효율적이다.
문학비평연구가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동양주의/동양성을 위치상의 우월성에 관한 존재론적, 인식론적 구분에 기초한 사고의 양식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통찰력은 상당수의 독자들로 하여금 문화 분석의 복합성과 권력관계에 주목하도록 일깨웠으며 동시에 상당한 논쟁을 파생시켰다. 그 하나로 ‘동양성/동양주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며 그의 적용과 의미는 이제 지중해근교의 이슬람권역에서부터 인도양과 남중국해부근의 다양한 지역들까지로 확장되었다. 두 번째 문제는 동양과 서양의 동일하지 않은 반쪽으로 양분된 세상의 개념이다. 이러한 자연화된 지리적 메타포는 타자의 이념적인 구성을 어떤 특정한 재질과 확실성--문학이론가인 호미 바바(Homi Bhabha)가 ‘고정성(fixity)’ 이라고 말하고 있는--의 근거였다. 바바에게 고정성과 고정관념화의 과정(stereotyping)은 문화적, 역사적, 인종적 차별성의 주요 기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할 것은 이러한 고정된 그리고 고정 관념화된 타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보아야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한 이주의 역사들에 뿌리내리고 있는 탈 식민적인 담론에 기초해 정체성을 구성해야할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이른바 ‘다문화주의’와 ‘복수의 정체성들’과 같은 용어들은 비서구적인 문맥에서 특수한 지점에 적용할 때에 동일한 번역과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타자들은 그들 자신을 태생의 환상들과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욕구와 집착의 대상으로 제시해야할 것인가? 그들의 확실한 태생만이 그들 자신의 전통들의 구체적인 구성요소들을 통해서 포착되며 따라서 보호의 막을 창출하고 때로는 그들의 타자성에 대응한 가장 강력한 방어적 반응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역으로 새로운 세기로 접어든 현재에서 새로운 세계질서는 단순히 서양과 비 서양의 문명을 재 맵핑하며 그에 따른 위계를 부여하는 것인가? 문화들의 갈등들을 통해 미래의 문명이 충돌할 것이라는 정치경제학자인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예견이 지구촌의 정치학을 지배할 것인가? 서구, 즉 유럽과 미국 국가들의 의도는 헌팅턴의 경고에 주의하여 그의 적들을 약하고 분리된 상태로 유지할 것인가? 가령 서방(국가들)은 유교중심의 국가들과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 차이와 갈등들을 이용함으로서 그들의 문화적 지배를 보존하려고 할 것인가?
또는 서양의 모더니즘과 동양의 사상사이의 충돌은 아시아인들 사이의 반 유럽-미국 정서들을 더욱 증강시킬 것인가? 예를 들면 최근 상당히 공공연하게 아시아의 국가원수들은 백인사회에 내재해 있는 인종적 편견을 반영하고 있는 서양의 우월감에 대해 빈번히 지적해왔다. 어떤 지도자는 이러한 백인종의 비 백인들에 대한 우월적 태도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서양인들, 특히 미국인들이 격렬하게 부정하는 반응자체가 이러한 태도의 지속성의 방증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서양인들은 아시아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지 못할 뿐 더러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으며 단순히 문화적 퇴보와 저급성의 특징이라고 단정한다고 주장하며 여기에 여러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구원받은 이들과 저주받은 사람들로 양분하는 서양의 이원적인 기독교사상은 서구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일익을 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긴급한 정치적 의문점들은 사실 서구학계의 전통과 유럽의 문화제국주의에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동양학의 구조와 아시아화 체제에 근원을 두고 있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폴튜걸과 네덜란드는 식민화시기에 동양과 아시아의 후진성에 대한 우월성을 각자 행사해왔다. 최근까지 중앙아시아, 소아시아, 동남아, 인도네시아와 중국은 유럽헤게모니의 끊임없는 수탈의 대상영역이었고 북미 인들의 아시아와 동양의 영토적 문화적 지배의 대상은 일본, 한국,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였다. 변화하는 정치적 관심들은 서구인들사이에 아시아, 동양에 대한 변화하는 해석들에서 예리한 차이점들을 포착하게 했고 특수한 역사적 맥락에 따라 새로운 관점을 파생케 했다. 따라서 동양성의 전체론적 관점이나 아시아성을 동방, 아시아, 혹은 동양을 서구 즉 유러-아메리카 (Euro-America)와 서양의 타자로서 균일하게 구성하는 단선적이고 발전론적인 담론으로 취급하는 것을 부정하게 했다. 상당수의 학자들이나 연구소들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마찬가지로 서양과 동양의 이원론적인 대립은 차이점들과 모순성들의 구체적인 단면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어 한정적이고 때로는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다양한 유형의 동양 성들이 있으며 그것은 불연속성과 분열을 예시하며 많은 점에 있어서 정체성과 차별성의 정적인 이중성을 거부케 한다. 프랑스의 식민경험은 인도차이나에게 인도, 미얀마, 말레이시아와 싱가폴에 가한 영국의 제국주의적 강점(Rule)과는 상당히 다른 흔적, 상흔과 기억들을 남겼다. 다수의 지식체계들은 고정관념들과 편견들로 점철된 아시아와 동양의 이미지들을 서구의 의식 속에 각인시키는 역할을 해왔으며 이렇게 조성된 고정된 시각은 쉽게 소멸되지 않는다. 이국화한 서구의 아시아인들의 재현들은 그들을 감각적이고 우울하며 나약하고, 똑똑치 못하고 모방적으로 자주 묘사하고 있다. 고정관념화된 일반화는 모든 인도사람들을 부하로, 모든 중국사람들은 공산당원들, 모든 모슬렘인들은 원리주의자(fundamentalists), 아랍인들은 광신도, 일본인들은 상업적인 적들로 투사한다. 서양과 동양의 상반성은 대중화되고 학계의 클리쉐 (cliché)가 되어버렸다. 동양과 아시아에 대한 지식은 서구인들이 그들의 권력을 이들 지역에서 행사했던 경험들을 통해 차이점들을 개선, 증강, 혹은 더욱 깊게 만들었다. 지정학, 지형학, 지도학은 영토적,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그리고 문화적 분리들에 대해 깨닫게 해 주었다. 편리함 때문에 원래 식민자들이 그들의 대상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발명되었을 지라도 지정학적 지역들에 대한 과거의 묘사를 우리는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지형학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해 창조된 상상적 공동체들과 복합적 지도들은 영토들과 경계들뿐 아니라 인종들과 거주민들을 절단하거나 분리 혹은 탈구시켜왔다. 선별적인 성실함이 현실을 빈번히 왜곡시켰으나 그러나 동시에 현실은 가끔 과대평가되기도 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 내에서의 아시아의 정체성
나치게 과대 선전된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는 무질서와 혼돈과 재난으로 가득차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탈냉전 이데올로기와 새로운 세계정보 질서의 베일을 통해 권력은 전무후무한 복수성/다원화와 이질성의 자유로운 유희를 허용, 분산되고 탈 중심화 되었다. 그러나 지구촌의 미디어 특히 T.V.와 정보테크놀로지는 재물/부가 아니라 정보의 접근성에 기초한 새로운 유형의 지정학적 지배의 패턴을 파생케 했다. 동시에 문화적 정보산업을 통해 성취한 강력하고 매혹적인 영향이 지방적 (local) 전통과 문화를 희생하고 세계전역을 걸쳐 서구의 가치들을 확산시켜갔다. 전자로 전달되는 이들 미디어는 경계도 유대감도 파괴해갔고 보편적인 모형에 맞는 취향, 패션과 신념들을 형성, 표준화시켜갔고 또 가고 있는 중이다. 즉각적인 정보를 통해 이 새로운 문화적 헤게모니는 과거의 스테레오타입들을 강화시볐고 탈 고정화하여 마음을 해방시키려는 힘마저 절단해버렸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체제는 과거의 이원적인 양분화, 즉 인종주의 대 보편성, 국가주의 대 제국주의, 제 3세계 대 제 1세계, 서양과 동양간의 양분화를 다시 각인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방대한 국제적인 역설 내에서 가장 섬세한 것--이것이 발전이라면 발전일 수 있겠다--은 지방적인 것과 지구촌적인 관점들 사이의 항구적인 재 문맥화 과정 (recontextualizing process)이 권력의 균형 속에서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도록 보조자들 (subsidiary players)을 끌어 모아 지역문화와 정치를 관찰하거나 조정하기 위한 전략으로 사용한 방법이다. 이론상 지구촌이 거대해갈 수록 가장 작은 역할수행자들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새로운 세계질서에 내재해 있는 위계화는 동동한 파트너로서 보다는 ‘그들 (them)'로서 요약되는 소 분파들, 혹은 잠재적인 ’적‘들 혹은 단순히 맞추기 힘든 모자잌의 잘려나간 조각같이 인식된 비교적 힘없는 지하문화 (subcultures)의 양산만 빈번히 초래했다. 타이의 고전무용가들이 체리코크를 마시며 셀폰에 재잘대는가 하면 한국의 몸짱 가수들은 콩글리쉬로 마이클 잭슨을 무색케하는 동작을 연출하며 오색으로 머리물을 들인 10대소녀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고 있다. 어지럽도록 탈 중심화 되었으나 풍요한 전통문화와 역사를 지닌 아시아의 메가도시들은 현대미술과 문화의 교류와 대화를 꾀하는 대안적 공간들로 가속도로 탈바꿈하여 가고 있다. 한편 현대미술과 문화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중심들, 가령 뉴욕, 파리, 런던들은 정치적인 정확함 (correctness)의 덫에 걸려 생명력과 활기를 잃어갔다. 이제 아시아는 미술담론이나 미술 산업을 위한 새로운 무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를 방증하는 것이 아시아 국가들에서 경쟁적으로 탄생하기 시작한 비엔날레며 광주비엔날레는 이러한 현상의 선봉장역할을 했음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미술가들에게나 미술관객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메가 전시 형태가 비록 중심은 아니지만 특정한 장소에 의한 도전이며 어떤 흥분을 창출하는 기폭제가 되었고 이를 통해 전통의 단면들과 강하게 분산된 힘들이 넘쳐 흘러나오도록 했다는 점이다. 모순, 긴장과 탈지향성들의 장소로서 광주와 같은 새로운 미술센터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무질서의 역설적인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아시아의 전통과 새로운 정체성
오늘날 아시아에서 동경, 쟈카르타, 베이징, 방콕, 봄바이, 서울과 같은 거대한 메가시티들은 그들의 진정한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서구의 급속한 경제적, 기술적인 발전을 포착하면서 동시에 경쟁해야하는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 결과로 문화의 부흥/재활을 위한 주요전략은 과거의 전통들을 향한 노스탈쟈-향수며 외부의 지배적인 힘들에 대한 대응에서 확실성을 재구축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어떤 ‘확실성/정당성’(authenticity)을 보존하기 위한 시도에서 전통을 고집하는 자들은 문화적 순수성의 표준들을 유일한 목표 혹은 구실로 삼는다. 이때에 외부의 위협들--흔히 서양의 물질주의와 대중소비문화--은 정신주의적 동양의 순수하고 결백한 마음을 부패시키는 독성적이고 타락한 쓰레기쯤으로 투영된다. 이기주의, 물질주의, 개인주의, 지성주의는 정신주의와 조화, 협력심과 세련된 예의범절등과 같은 이른바 동양적 가치기준들을 위협하는 저급한 서양풍조들이라고 특징 지워진다. 지방정부들이나 타국에서까지 불러들인 아시아전문학자나 전문가들은 ‘진정한’ 그리고 ‘원래의 (original)' 문화를 구하기 위해 구원의 미션을 전달하는 선교자의 몫을 연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전통을 재 발명(?)하기 위해 원주민의 쥬스들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 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메가시티들은 지구촌의 유행병, 산업공해, 노동력의 이주와 인구폭발에 의해 야기된 묵시록적 전조를 띄고 있다. 점증적으로 비대해져 가는 메가시티들이 치러야하는 바로 ’메가성‘의 대가는 활기와 혼돈, 건강과 질병, 기업과 부패사이의 불편한 공모/매매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이때의 균형은 어느 순간 소용돌이속으로 빠져 버릴 위험을 지닌 극히 섬약한 것이다.
역동적인 아시아의 메가도시들에서 사는 현대미술가들이 탐구하는 주요주제는 진전한 그리고 원래의 문화적 전통들의 고정성과 고정관념들내에서 작용하는 구속감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번안해 내는가에 있다. 그러나 사실 외면상 고정되고 관념화된 문화적 전통들은 실제로는 상당한 갈등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이러한 갈등구조는 매우 복합적이고 섬세해서 간과되어왔다. 탈식민적인 정체성은 하나의 자기성찰의 과정으로서 이러한 문화전통의 프레임과 재현의 공간에 대한 끈질긴 의문제기의 초점이 되어왔다. 따라서 하나의 제안/쟁점으로서 미술사, 미술 전시들이나 미술비평들에서 지금까지 간과되어왔던 응시의 어떤 대상들--특히 오늘의 주제인 아시아의 전통이나 새로운 주체성과 같은--을 가시화하는 시도가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호미 바바의 말대로 비가시성을 바라보는 시도를 실행하자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 미술가들의 작품은 타자 즉, 서양의 관객들을 위해서나 우리자신의 응시를 위해서도 우리의 시대의 문화적 변형들을 가시화할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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