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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9) 성덕대왕신종

최응천


묘한 울림 소리…힘찬 용뉴와 세련된 공양자상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 성덕대왕신종, 국보 제29호, 높이 3.66m 구경 2.27m, 통일신라 771년, 국립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은 한국의 금속공예품 가운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어떤 점에서 아름답고 뛰어난지 종의 세부형태에서부터 다양하게 새겨진 무늬,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바까지 최응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이 세밀히 짚어 보았다. /편집자주
현존하는 한국 범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상원사에 있는 통일신라 725년명 범종으로 삼국시대 범종이 한 점도 남아있지 못한 현재로선 가장 古格을 띤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상원사 종보다 불과 50여년 뒤에 만들어진 성덕대왕신종은 한국 범종 중 가장 클 뿐 아니라 가장 맑고 웅장한 소리, 아름다운 형태와 문양을 지녀 예전부터 한국의 최고 예술품으로 평가받아 왔다. 일찍이 이 범종을 찾은 ‘대지’의 작가 펄 벅은 이 범종의 뛰어난 예술성에 감탄해 이 범종 하나만으로 박물관을 세우고 남음이 있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세부 형태를 살펴보면 종신의 상부 위 龍는 한 마리 용이 목을 구부려 天板에 입을 붙이고 있으며 목 뒤로는 굵은 音筒이 부착돼 있는 통일신라 범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앞뒤의 발을 반대로 뻗어 힘차게 천판을 딛고 있는 용뉴는 앞 입술이 앞으로 들려 있으며 부릅뜬 눈과 날카로운 이빨, 정교한 비늘로 표현돼 통일신라 범종의 용뉴 중 가장 역동감 넘치면서 사실적이라 할 수 있다. 뒤에 붙은 굵은 음통은 대나무처럼 중간에 띠를 둘러 4단의 마디로 나눴다. 각 단에는 중앙에 있는 꽃문양을 중심으로 葉文을 정교하게 새긴 仰·伏蓮의 연판을 부조했고 가장 하단에는 仰蓮만을 새겼다. 음통 하단과 용뉴 양 다리 주위에는 음통의 연판과 동일한 연꽃 문양을 돌려가며 장식하고 있어 주목된다. 잘 보이지 않는 종의 천판까지 장식된 것에서 세심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천판의 용뉴 주위를 둥글게 돌아가며 주물의 접합선과 여러 군데 쇳물을 주입했던 주입구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종신의 上帶에는 아래 단에만 聯珠文이 장식됐고 대 안으로 넓은 잎의 모란당초문을 매우 유려하게 부조했다. 상대에 붙은 蓮廓帶에도 동일한 모란당초문을 새겼다. 한편 연곽 안에 표현된 연꽃봉우리(蓮)는 통일신라의 종과 달리, 연밥(蓮顆)이 장식된 둥근 子房 밖으로 이중으로 된 8잎의 연판이 납작하게 표현된 게 독특하다. 이런 형태는 후에 운쥬지종(雲樹寺鐘)이나 죠구진자종(常宮神社鐘, 833년, 일본 소장)과 같은 8~9세기 통일신라 범종에까지 계승되는 일종의 변형 양식이다.

성덕대왕신종은 이 뿐만 아니라 奏樂天人像과 鐘口의 모습이 다른 종과는 구별되는 몇 가지 독특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즉 종신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일반적인 주악천인상과 달리 손잡이 달린 병향로를 받쳐 든 공양자상이 앞뒤 면에 조각돼 있다. 이는 종의 명문에서 볼 수 있듯이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인 만큼 왕의 왕생극락을 간절히 염원하는 모습을 담기 위해 의도적으로 새겼다고 볼 수 있다. 공양자상은 연꽃으로 된 방석 위에 두 무릎을 꿇고(座) 몸을 약간 옆으로 돌린 채 두 손으로 가슴 앞에 향로 손잡이를 받쳐든 모습이다. 머리카락(寶髮)은 위로 묶은 듯 하며 벗은 상체의 겨드랑이 사이로 천의가 휘감겨 있고 배 앞으로 裙衣의 매듭이 보인다. 연화좌의 방석 아래로 이어진 모란당초문은 공양자상의 하단과 후면을 감싸며 구름무늬처럼 흩날리며 장식됐고 머리 위로는 여러 단의 천의 자락과 두 줄의 영락이 비스듬히 솟구쳐 하늘로 뻗어 있다. 공양자상이 들고 있는 향로는 받침 부분을 연판으로 만들고 잘록한 기둥 옆으로 긴 손잡이가 뻗어있으며 기둥 위로 활짝 핀 연꽃모습의 몸체로 구성됐다. 공양자상의 세련된 자세, 유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天衣와 모란당초문의 표현은 통일신라 8세기 전성기 불교 조각의 양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국내 범종 부조상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공양자상은 배치에 있어서도 독특하다. 종신의 앞뒤 면에 새겨진 양각명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2구씩, 마치 명문을 향해 간절히 염원하는 4구의 공양자상을 배치한 점 역시 다른 종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아울러 종구 부분을 8번의 유연한 굴곡을 이루도록 변화를 준 점도 다른 종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이에 따라 그 위에 장식되는 하대 부분도 8릉의 굴곡을 이루게 되고, 굴곡을 이루는 골마다 마치 撞座의 모습과 같은 원형의 연화문을 8곳에 새겼으며 그 사이를 유려한 모습의 굴곡진 연화 당초문으로 연결시켜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당좌는 주위를 원형 테두리 없이 8엽으로 구성된 寶相華文으로 장식했다. 종신 앞뒤의 가장 중요한 공간에 배치된 양각의 명문은 앞과 뒤의 내용을 구분해 구성한 1천여 자에 이르는 장문이다. 한쪽에는 산문으로 쓴 ‘序’를, 다른 한쪽에는 네 자씩 짝을 맞춰 율문을 만든 ‘銘’을 배치했는데 서의 첫 구절은 성덕대왕신종을 치는 목적과 의미를 밝히고 있다.

‘무릇 지극한 도는 형상 밖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눈으로 보아서는 그 근원을 알 수 없다. 큰 소리는 천지 사이에서 진동하여 귀로 들어서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가설을 세우는데 의지해 세 가지 진실의 오묘한 경지를 보듯이 신종을 매달아 놓아 ‘一乘의 圓音’을 깨닫는다.’. 여기서 말하는 종소리인 ‘一乘之圓音’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하나로 회통하는 부처의 설법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당시에 글을 지은 이는 翰林朗이고, 직급은 급찬이었던 金弼奧이며 종 제작에 참여한 인명이 기록돼 있는데, 鑄鍾大博士인 大奈麻 朴從鎰과 次博士 朴賓奈, 朴韓味, 朴負岳 등이다. 또한 구리 12만근이라는 엄청난 양이 소요됐으며 종의 무게는 18.9톤에 달했다.
성덕대왕신종은 종이 걸려 있던 절 이름을 따라 ‘봉덕사종’으로 불리기도 하며 우리에겐 ‘에밀레종’으로 더 친숙하다. 봉덕사는 폐사돼 그 위치가 분명치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성덕왕의 원찰로서 경주 북천 남쪽의 남천리에 있던 절로 확인된다. 성덕왕이 증조부 무열왕을 위해 창건하려다 아들 효성왕이 738년에 절을 완공했다. 효성왕의 아우인 경덕왕은 성덕왕을 위해 큰 종을 만들기로 했으나 오랜 세월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고 결국 혜공왕대인 大曆六年(771) 12월 14일에 이르러서야 완성을 보게 돼 성덕대왕신종으로 일컫게 됐다. 그러나 봉덕사종은 절이 폐사된 후 여러 번 거처를 옮기게 됐다. ‘동경잡기’ 2권에 보면 북천이 범람하여 절이 없어졌으므로 조선 세조 5년(1460년)에 영묘사로 옮겨 달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중종 원년(1506)에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당시 慶州府尹이던 芮椿年이 경주읍성 남문 밖 봉황대 아래에 종각을 짓고 옮겨 달게 됐는데, 징군 때나 경주읍성의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고 한다. 종은 한일 합방 후에도 여러 번 옮겨졌고 경주읍성이 헐리면서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가 경주 부윤의 東軒을 수리하는 등 조선시대 관아를 수리해 동부동 옛 박물관 자리에 진열관을 열게 됐다. 이때 첫 사업으로 봉황대 아래 있던 성덕대왕신종을 옮기게 됐다. 이때를 ‘고적도보해설집’에는 1916년이라 했으나 국립박물관 유물대장 등에 의하면 1915년 8월 동부동 옛 박물관으로 옮겨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다시 1975년 4월에는 동부동 박물관에서 새 박물관으로 옮기기 위해 종각을 해체하고 1975년 5월 27일에 현재의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 옮겨졌다.
한편 종에 얽힌 에밀레종 설화는 일반적으로 종을 만들 때 시주를 모으는 募緣과 달리 인신공양인 점에 주목된다. 어린아이를 넣어 종을 완성해 종소리가 어미를 부르는 듯 하다는 애절하면서도 다소 잔인한 설화내용은 한편으로 성덕대왕신종을 제작하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실패와 어려움이 따랐는가를 은유적으로 대변해 주는 자료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종을 치는 궁극적 목적이 지옥에 빠져 고통 받는 중생까지 제도하기 위한 것이며, 범종이란 불교의 대승적 자비사상의 대표적 의식 법구다. 하물며 범종을 완성하고자 살아있는 어린아이를 공양했다는 내용은 범종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과 상반되는 신빙성 없는 전설에 불과하다. 성덕대왕신종의 경우도 최근에 이뤄진 성분 분석에 의하면 상원사종과 유사한 구리와 주석 합금으로 만들어졌으며, 미량의 납과 아연, 그리고 극소수의 황, 철, 니켈 등이 함유돼 있다. 결국 세간에 떠도는 것처럼 인은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종을 주조할 때 70%가 물인 인체 성분을 쇳물에 넣었다면 종은 완성되지 못하고 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도 에밀레종의 유아희생은 전설에 불과할 뿐이다.
기록된 명문에서 보이듯 一乘의 원만한 소리인 부처의 말씀과 같은 종소리를 들음으로써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는 범종의 참 뜻을 성덕대왕신종은 가장 잘 말해주고 있다. 이제 우린 성덕대왕신종이라는 어엿한 본명 대신 에밀레종으로 부르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 범종은 비록 혜공왕대인 771년에 완성됐지만 통일신라 불교미술의 최고 황금기를 구현했던 8세기 경덕왕대에 제작되기 시작한 점을 주목해야 한다. 즉 신라의 과학과 건축, 조각이 총망라된 최고의 완성품이 바로 석굴암과 불국사인 것처럼 당시에 있어 최고의 금속공예 기술의 역량을 동원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덕대왕신종이다. 크기도 웅장할 뿐 아니라 신비의 소리와 아름다운 형태를 간직하는 한국 금속공예의 최고 걸작임에 분명하다.
/ 최응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장)
※ 필자는 일본 구주대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국립춘천박물관의 초대관장을 역임했다. ‘금속공예’ 등의 저서가 있다.

※ 출처-교수신문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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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 (19) 中·日 범종과의 비교
中, 밖으로 벌어진 형태…日, 두텁고 밋밋한 문양

우리나라의 범종은 상원사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중국이나 일본종과 다른 매우 독특한 형태와 의장을 지닌다. 특히 여운이 긴 울림소리(共鳴)가 웅장하여 동양 삼국의 종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종의 웅장한 소리와 긴 여운은 종의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종신의 외형은 마치 독(甕)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이 위가 좁고 배 부분(종복)이 불룩하다가 다시 종구 쪽으로 가면서 점차 오므라든 모습이다. 이는 종구 쪽 아래 부분이 안으로 말려있음으로 종소리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한 배려다. 또한 우리나라 종은 종각 등에 높게 걸리지 않고 지상에서 낮게 거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을 치게 되면 종 안에서 공명을 통한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 소리가 울리게 되는데 이 공명을 쉽게 빠져 나가지 못하게 종구 쪽의 안으로 오므라들도록 함으로써 이를 다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우리나라 범종은 종구 아래쪽에 전통적으로 그 지면을 움푹 파거나 이곳에 큰 독을 묻은 경우(움통)도 볼 수 있는데, 종구 쪽에서 빠져 나온 공명이 움통 안에서 메아리 현상을 이루어 그 여운이 길어지는 효과를 보게 된다.
아울러 반드시 한마리의 용으로 구성된 용뉴의 목 뒷부분에는 우리나라 종에서만 볼 수 있는 둥근 대롱형태의 ‘음통’(음관, 용통)이 솟아 있다. 이러한 음통은 대부분 그 내부가 비어있고 하부 쪽이 종신 내부에 관통되도록 구멍이 뚫려 있다. 따라서 이 음통은 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음향조절장치의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되고 있다. 즉 음관의 역할이 가격시의 격렬한 진동을 신속히 걸러내어, 충격을 신속히 제거하고 소리의 일부를 공중으로 보내는 두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견이 제시된 바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종은 크기에 관계없이 음통이 붙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 종에 볼 수 없는 가장 한국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종신에는 상대와 하대라는 문양띠를 두어 아름다운 장식문양을 새겼으며 상대에 붙여 네 방향으로 곽을 두었고, 이 안으로 9개씩 총 36개의 연꽃봉우리(蓮?)를 배치하는 게 특징이다. 중국 종은 이러한 연뢰가 없고, 일본 종은 있긴 하지만 우리 종처럼 수효가 일정치 않으면서 형태는 연꽃이 아닌 돌기형이다. 그리고 종신 여백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이나 공양상, 또는 불·보살상을 반드시 장식하는 것도 한국 범종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아울러 하대 위에는 종을 치는 자리로 별도로 마련된 당좌라는 원형 장식을 앞뒤 면 두 곳에 배치하는 특징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종은 형태상 祖型鐘과 荷葉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중 조형종은 일본 종의 기원이 되는 형식으로서, 쌍룡의 용뉴와 더불어 직선화된 종신은 십자로 구획되지만, 일본 종의 경우 윗부분 구획에 종유가 장식된다. 조형종과 하엽종은 지역적인 특징이 있어 하엽종은 양자강 북쪽인 중국 북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서양의 벨(bell)처럼 밖으로 벌어진 종의 외형과 花形으로 여러 번 굴곡을 이룬 종구, 종신 중단을 가로지른 횡대와 그 주위를 袈裟무늬 형태의 結縛文으로 장식하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일본 종은 기본적으로 중국의 조형종을 모본으로 하고 있지만 쌍룡의 중간에 솟은 화염보주, 종신의 상·하대와 이를 연결한 십자형 띠의 교차부분에 표현된 당좌, 그리고 상부 곽에 많은 수가 장식되는 종유를 그 특징으로 한다. 일본의 종도 시대가 흐르면서 金剛杵 등의 여러 가지 문양에 첨가되기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종의 두께가 두텁고 장식 문양이 미미한 단순한 모습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종의 유려한 형태와 의장은 주조기술면에서 밀납주조법을 사용했다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이와 달리, 일본 종은 밀납주조가 아닌 沙型주물법을 사용하며 중국 종 역시 사형주물법이면서 철제의 종이 많다는 점이 독특하다. / 최응천
※ 출처-교수신문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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