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13)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편집부


 



유려한 곡선과 갓 맑은 유색의 조화…雲鶴과 仙界의 열망 드러내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높이 42㎝, 입지름 6.2㎝, 밑지름 17㎝, 13세기, 간송미술관. ©
※ 이미지는 첨부파일 참조

청색상감청자는 청자 중에서도 최정점에 달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국과 한국에서는 그 기법이 보이지만 일본에는 상감청자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윤용이 교수가 상감청자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고 있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아름다움을 살펴보았다. 더불어 고려상감청자 기법의 특수함을 짚어보았고, 김영미 박사가 최근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중국의 대표 상감청자를 소개한다. / 편집자주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고려상감청자를 대표하는, 독특한 매병의 곡선미를 지닌 전형적 작품이다. 각이 져 작게 세워진 구부와 거의 편평하다 할 정도로 팽창되어 있는 풍만한 동체 상부, 좁혀진 잘록한 허리, 다시 벌어져 세워진 저부에 이르는 S곡선의 흐름이 돋보이는 유려한 작품이다.
상감문양으로는 어깨부분에 백상감의 여의두문대를 돌렸으며, 저부에는 복판의 연판문대를 흑백상감으로 돌려 나타냈다. 동체 전면에는 흑백 쌍선의 同心圓을 여섯 단으로 서로 교차해서 배치하고, 원 안에는 구름 사이로 날아오르는 학을, 원 밖의 공간에는 구름과 아래쪽을 향해 나르는 학을 흑백상감으로 꽉 차게 시문했다. 이처럼 연속문으로 밀도 높게 문양을 넣은 것은 일반적으로 여백을 많이 두었던 다른 매병들과는 차이가 나는 독특함이다. 기면 전면에는 투명도가 높은 맑은 담청색 유약을 고르게 시유했으며, 미세하게 釉氷裂이 나 있다. 굽다리는 안바닥을 깎아내고 세웠으며 유약을 닦아내고, 점토가 섞인 내화토 빚음 받침의 흔적이 나 있다.
구름과 학의 운학문은 중국청자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문양으로 고려청자의 상징적인 문양이다. 운학문은 12세기 후반 음각기법과 양각기법으로 완 등에 시문되다가 13세기 전반경에는 완 뿐만 아니라 병이나 주전자 그리고 매병 등에 띄엄띄엄 여백이 있게 사실적 표현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근 1237년 희종의 왕릉인 碩陵에서 출토된 운학문매병편은 여백이 있고 회화적인 표현의 운학문이 흑백상감으로 시문되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13세기 후반경인 1260~70년대에는 이처럼 흑백의 이중원 안의 운학문이 도안화된 장신의 매병이 제작되었다.
S곡선에 운학문이 가득
원래 학은 도교에서 신선들을 태우고 仙界로 가는 새로서, 13세기 고려인들이 이규보의 ‘東國李相國集’에서 보여지듯, 근심 걱정 없는 선계에 태어나기를 갈망했다는 고려인의 마음이 운학문으로 표현된 것으로 보여진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형태와 흑백상감의 운학문을 독특하게 시문한 기법과 갓 맑고 투명한 담녹청색의 유색이 잘 조화되어 어울린 작품이다.
이와 같은 병을 흔히 梅甁이라고 부르며, 매실주나 인삼주와 같은 술을 담아 사용했다. 원래 뚜껑이 있어 덮도록 제작되었으며, 1123년의 기록인 ‘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술을 담는 酒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매병은 중국 북송대 定窯産의 백자매병이나 景德鎭窯産의 청백자매병에 시원양식이 있으며, 고려에서는 12세기 전반 비색청자를 제작하던 시기부터 출현해, 처음에는 동체가 사선으로 내려온 형태로서 딱딱한 모습이었으나, 점차 저부에서 반전을 이루어 S자곡선을 이루기 시작했고, 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 이르러서 동체가 S자곡선을 이루고, 키가 늘씬하게 커진 모습에 상체가 풍만하게 벌어지고 구부가 딱 달라붙어, S자곡선의 최절정기를 이룬 시기의 작품인 것이다. 높이는 42㎝에 달하는데, 청자 전성기인 12세기의 전형적인 매병이 30~35㎝였던 것에 비하면 훨씬 대형이다.
그러면 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 표현된 상감기법은 언제, 어떻게 청자에 표현되게 되는 것일까. 상감청자의 시작은 1157년 청자기와가 제작되던 시기 전후로 추정된다. ‘고려사’ 世家 의종 11년(1157) 8월조에 “양이정을 청자기와로 얹었다(養怡亭 蓋以靑瓷)”는 기록이 있다. 1157년의 청자기와에 대한 기록과 부합되는 유물이 1927년 개성 만월대 고려궁터에서 수습된 약간의 청자기와편들과 1964년, 1965년 국립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수백의 다양한 청자기와편들로 뒷받침 되고 있다.
이들 청자기와편들은 청자양각모란문수막새, 청자양각당초문암막새를 비롯해 청자음각모란당초문이 꽉 차게 시문된 청자기와편들로서 약간의 상감기법이 시문된 청자편들이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고려사’의 기록과 개성 만월대 고려궁터 그리고 강진 사당리 가마터의 제작지와 부합되는 1157년을 전후로 하는 가장 기준이 되는 자료들이다. 청자기와의 문양은 굵은 음각선으로 넓게 시문하여 마치 양각처럼 보이는 모란당초문을 꽉 차게 시문했으며 양각모란문의 경우도 잎맥까지 표현될 정도로 정교하다. 유색도 담록색이 짙어져 가고 있다.
상감청자 발생, 의종 년간으로 수정돼야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문양의 청자에 약간의 흑백상감의 기법이 시문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청자음각모란당초문상감당초문완, 청자음각연당초문상감당초문발 등이 그러한데, 이처럼 ‘고려사’의 기록과 출토지, 제작지가 부합되는 가장 기준이 되는 청자기와편 속에 특이한 음각·양각의 청자와 상감청자편이 함께 발견된다는 것은 상감기법의 시작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다.
기존에는 상감청자의 발생이 12세기 전반인 인종(1123~1146)년간으로 추정되며 청자상감보상당초문완을 그 예로 들었으나, 1146년 인종 장릉 출토의 청자참외형화병 등과 비교했을 때 유색이나 문양이 너무 급격히 변해 맞지 않으며 오히려 1255년의 명종 지릉 출토의 청자상감여지문대접과 유색, 문양이 보다 더 가깝다.
지릉에서 출토된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의 경우 안으로 오므라진 넓은 구부와 둥근 동체, 한층 밝고 맑아진 투명한 청자유, 문양의 경우 안팎으로 꽉 차게 포치된 보상당초문, 그리고 굽다리에 규석받침이 이 시기 전후로 추정되는 전 문공유묘 출토로 전하는 청자상감보상강초문완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역상감된 문양의 내외면의 포치, 밝고 투명한 청자유, 굽다리와 규석받침의 흔적이 동일하다.
고려 상감청자의 발생은 청자기와가 만들어지던 1157년 전후의 의종년간(1147~1170)에 만들어 졌음이 보다 확실하며 상감청자의 비밀이 청자기와와 함께 출토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러한 고려 상감청자는 13세기에는 상감청자의 전성시기를 이끌었으며, 현존하는 수많은 상감청자의 뛰어난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유려한 곡선과 갓 맑은 유색 그리고 운학문의 흑백상감이 어울리는 절정기의 작품으로서 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윤용이 (명지대ㆍ미술사)

※ 필자는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 문화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저서로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등이 있다.
※ 출처-교수신문 7.17

▒▒▒▒▒▒▒▒▒▒▒▒▒▒▒▒▒▒▒▒▒▒▒▒▒▒▒▒▒▒▒▒▒▒▒▒▒▒▒▒▒▒▒▒▒▒▒▒▒
고려상감청자 기법과 제작
금속에 쓰인 入絲기법에서 유래 추정…물레성형법 성행
상감이란 금속기, 도자기 등의 겉면에다 여러 가지 무늬를 파고 그 속에 같은 모양의 다른 재료, 안료를 박아 넣는 기법으로 영어로는 ‘inlay’ 한자로는 象嵌 또는 入絲라고 한다.
이 상감기법은 고려·조선시대의 공예품에 널리 사용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독특한 기법으로 특히 象嵌靑瓷는 우리 민족만의 창의적인 공예기술로서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상감청자 기법의 직접적인 창안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상감청자에 앞서 발달했던 靑銅 등의 금속에 쓰여진 입사기법에서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며, 이것이 상감청자를 발생하게 하는 계기로서 작용했고 이와 같은 상호연관 속에서 마침내 고려시대의 독특한 상감청자기법이 발생하고 성행했다고 여겨지고 있다.
상감청자는 상감 재료에 따라 백토를 감입하여 구운 白象嵌과 ?土를 감입하여 구운 黑象嵌, 그리고 백토와 자토를 감입하여 구운 흑백상감의 예가 있다. 또한 상감된 무늬가 선으로 되어 있는 線象嵌과 넓은 면으로 되어 있는 面象嵌이 있으며, 문양을 그대로 두고 문양의 배경을 상감한 逆象嵌으로 구분 지을 수 있다.
상감청자의 제작방법에 관한 문헌자료는 없으나 남아 있는 작품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
상감청자의 태토는 일반적으로 순청자와 같은 태토를 사용하는 데 기본적으로 可塑性이 우수해야 하며, 고온에서 燔造하여도 지속될 수 있도록 내구성이 높아야 하고 유약에는 發色이 뒷받침에 되는 철(Fe2O3)성분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청자의 태토는 일반적인 粘性陶土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고 자토와 보조재료 등을 혼합하고 발색을 돕는 철을 포함한 물질을 함유하는 것이라야 한다.
최근 각 대학 연구기관에서 강진지역의 점토산지를 조사한 결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 등지에서 산출되는 점토는 철분이 2.24~5.58% 이고 白色度는 낮은 편이며 耐火度는 SK 14~16였다.
청자의 제작은 초기부터 물레성형법이 주가 되어 고려 전 기간을 통해 계승되었다. 물레로 성형한 器物을 반만 건조시켜 굽을 다듬은 다음에 표면장식을 위한 상감을 하는데 상감기법은 나타내고자 하는 무늬를 그릇 표면에 음각하고 상감토를 붓으로 발라 메우고 깎음칼로 깎아 내어 무늬를 나타내는 기법이다.
이러한 표면장식을 굽 다듬기가 끝난 다음 기술이 반건조된 상태에서 하는 것은 너무 덜 마른 기물을 음각하면 선명한 선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건조 상태가 지나치면 음각하기 힘이 들 뿐만 아니라 감입되는 상감토나 기물의 수축률이 맞지 않아 서로 분리되며 다양한 선을 상감하기 어렵다.
감입 순서는 흑백상감일 경우 主紋樣은 백상감하고 주문양을 돋우기 위해 백상감한 위에 다시 음각한 다음 자토를 발라 건조시킨 후 깎아 버리고 흑상감무늬를 표현하는 것이다. 운학문의 경우 학의 몸을 먼저 백상감으로 하고 다리와 입은 흑상감으로 하여 전체를 표현한다.
/ 윤용이 (명지대ㆍ미술사)
▒▒▒▒▒▒▒▒▒▒▒▒▒▒▒▒▒▒▒▒▒▒▒▒▒▒▒▒▒▒▒▒▒▒▒▒▒▒▒▒▒▒▒▒▒▒▒▒▒

중국 상감청자와의 비교 고려에 영향 준 塡彩 … “부드럽고 소박한 느낌”
상감기법은 철 등의 소지에 금·은 등의 금속을 박아 넣는 기법으로 중국에서는 東周시대(기원전 771∼256년)에 이미 청동기에 금·은을 상감하는 기법이 성행했다. 秦漢시기의 錯金銀 공예와 東漢시기의 入絲 공예는 남북조를 거쳐 唐代에 이르면 더욱 발전해 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자기에 상감기법을 응용한 것으로는 고려청자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물론 중국의 도자기 제작법은 고려 청자 상감기법과는 효과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제작기법이 보여 주목된다.
사진은 遼代의 묘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靑瓷三魚紋大盤’이다. 북경의 개인 소장품으로 구경이 33cm이며 유색은 누른빛이 도는 청색이다. 內底에는 菊瓣紋이, 그리고 둘레에는 水波紋이 펼쳐지고 있으며 세 마리 물고기가 삼각을 이루어 劃花塡白彩(象嵌)로 장식되어 있다. 물고기는 중국에서 예로부터 ‘餘’와 음이 같아 ‘풍성함’을 상징하며 도자기를 비롯한 공예품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 大盤은 크기로 보아 음식을 담는 그릇으로 가족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하거나 연회 등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7년 渾源窯 발굴에서 이와 비슷한 靑瓷片이 발견되었는데 시기는 遼 말기에서 金 전기(12세기 전반 경)로 알려져 있다.
그림(劃), 새김(刻), 찍음(印), 박지(剔) 등의 방법으로 오려낸 문양의 오목한 부분에 채색을 넣는 것을 중국에서는 ‘塡彩’라고 부른다. 중국 도자기에 보이는 상감기법은 주로 송·요·금 시기 河南, 河北, 山西 일대의 북방 도자기에서 많이 발견된다.
靑瓷劃花塡白彩裝飾은 북송 초기에 시작되어 중기에 성숙한 단계로 발전한 白釉劃花塡白彩裝飾에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백유획화전백채장식은 土不件에 문양을 새긴 후 전체에 화장토를 입히고 화장토를 긁어내면 문양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 위에 투명유를 입혀 소성하게 된다. 河南 일대에서 시작된 이 장식 기법은 耀州窯에 전해져 청자획화전백채장식이 생겨나고 다시 山西지역으로 전파되어 사진의 ‘靑瓷三魚紋大盤’이 탄생한 것이다. 요주요의 상감기법으로 蘆雁銜枝紋이 장식된 자기는 북송 11세기에서 12세기 전반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중국 도자기에 여러 상감기법이 있다. 珍珠地劃花裝飾은 枕, 香爐, 甁 등의 바탕에 珍珠圈을 찍은 후 갈흑색 혹은 흑색의 彩料를 塡彩한 것이다. 珍珠地劃花裝飾의 上限 시기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전반 경까지 올라가며 당대부터 송 초까지 유행한 金銀器의 魚子紋 장식에서 유래한다. 白釉剔花塡黑彩裝飾이란 것도 있는데 화장토를 입힌 기물 위에 화문을 그리고 납작한 공구로 문양 윤곽을 제외한 부분의 백색 화장토를 긁어내면 진한 胎色이 드러나고 마지막으로 透明釉를 입혀 소성한다. 胎色과 化粧土의 대비가 부드러우면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중국이나 고려의 도자기에 보이는 상감기법의 탄생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金銀器 장식의 모방에서 시작된다. 중국의 상감기법은 10세기에 이미 등장하는데, 한·중 도자기술교류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분명 고려는 중국의 상감기법인 ‘塡彩’를 배웠다고 할 수 있다. 단지 고려의 상감청자는 중국의 다양한 상감기법의 정수만을 모아 발전시킨 ‘靑出於藍’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塡彩’가 호방하고 대범하다면 고려의 ‘象嵌’은 예민하며 섬세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 김영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 필자는 북경대에서 ‘월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안선과 도자기 길’ 등을 저술했다.

※ 출처-교수신문 7.17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