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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사 연구의 발자취와 과제

최열

/ 최 열(미술평론가)
Ⅰ. 머리말
Ⅱ. 김원용의 미술사학 연구사
Ⅲ. 문명대와 박용숙
Ⅳ. 문명대의 세키노와 야나기 비판
Ⅴ. 김원용, 안휘준의 사학사 연구
Ⅵ. 연구사의 시대구분
Ⅰ. 머리말
미술사학만이 아니라 미술의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연구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이다. 해당 연구가 이루어 놓은 성취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를 헤아려 놓는 일은 연구의 수준을 판단하는 기초일 뿐만 아니라 연구의 방향을 가름하는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근대미술사학 분야에서 연구사가 지극히 소홀하다. 앞선 시기 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처음 발견․발굴한 사실이라고 주장하거나, 새로운 해석이라고 내세우는 경우가 없지 않다. 따라서 연구의 발자취를 살피는 일은 연구가 쌓일수록 되풀이해야 할 주요한 사학의 과제다.
한국에서 미술사학은 20세기 초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고유섭(高裕燮)이 시작했다는 게 통설이다. 이러한 가설은 미술사학 연구사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왔다. 막연히 미술사학이라고 하지만 연구자들은 그것을 ‘근대적’ 또는 ‘현대적’이라는 수식을 하고 있으므로 ‘중세적’인 것을 전제하고 하되 실제로는 중세 미술사학의 실체를 거의 부정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튼 연구자들의 견해 속에는 세키노나 고유섭에 이르러서야 오늘날 미술사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오세창(吳世昌)에 주목함으로써 그 ‘중세적’인 것의 복권을 시도하고자 하는 견해가 제출되고 있다. 그러나 단편에 그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복권의 시도를 꾀하는 확장의 관점을 적용해 19세기로 눈을 돌려보면 1840년대의 저술인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와 서유구(徐有榘)의 『예완감상(藝翫鑑賞)』에 자리잡은 「동국묵적(東國墨蹟)」과 「동국화첩(東國畵帖)」, 1860년대의 저술인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저술은 대상을 서술함에 있어 앞선 시기 문헌을 인용하는 문헌실증 방법을 취함으로써 첫째 앞선 연구자의 성과를 증험하고, 둘째 대상을 묘사하면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압축해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미술사학의 방법을 엄격히 취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을 미술사학의 성취로 평가하는 데는 지극히 인색해 왔던 것이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나 고유섭의 『조선화론집성(朝鮮畵論集成)』이 자료의 증험과 선별, 집약에 그칠 뿐 해석과 평가를 직접 드러내는 서술을 수행하지 않음으로써 19세기 방법의 일부만을 계승하는 데 그쳤다. 20세기 후반기에도 안휘준(安輝濬)의 『조선왕조실록서화사료』, 진홍섭(秦弘燮)의 『한국미술사자료집성』, 이성미(李成美)의 『조선왕조실록미술기사자료집』과 같은 성취가 유장하게 이어졌지만 사학의 성취라기보다는 사학 이전의 수고로움만으로 밀어내고 있음이 그 증거다.
이러한 평가로 말미암아 이른바 ‘중세적’인 것을 미술사학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풍조가 일반화되어 있음으로써 자료를 수집, 정리하는 노고만을 취할 뿐, 그 철저한 증험과 선택의 과정이 거둔 성취만이 아니라 엄격한 실증과 유장한 묘사와 해석조차 배제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과 태도는 19세기 이전 미술사학의 존재 여부조차 의심스럽게 여기는 풍토를 만들어 왔으니 오랫동안 거둔 성취를 단지 자료로 취급하여 그 이념과 방법의 계승과 혁신은 어디론가 사라져 가고 말았다. 그러나 관점과 태도를 달리하고 동양과 서양, 중세와 근대를 보다 확장하여 새로운 연구사의 관점을 세워나감으로써 지난 역사를 규정과 재규정해 나왔다면 그러한 풍조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구사의 중요성은 바로 이와 같다.
이 글은 미술사학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미술사를 대상으로 규정, 재규정해 온 연구사를 대상으로 삼고자 한다. 연구사의 발자취야말로 미술사학이 거둔 성과를 누적하면서 관점과 태도를 또렷하게 드러내는 흔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요약하면 ‘미술사학 연구사’일 터인데, 이러한 연구사가 독립된 때는 1960년대인 듯하다. 여기서는 바로 그 1960년대부터 미술사학 연구사를 대상으로 삼아 연구를 수행해 온 연구자들을 시대 순으로 삼아 살펴볼 생각이다.
Ⅱ. 김원용의 미술사학 연구사
1963년 한국 미술사를 대상으로 삼은 「한국미술사의 반성」1) 이란 글을 발표한 김원용(金元龍)은 두 가지를 주장했다. 첫째, 한국 미술사 저술 부재론, 둘째, 국수주의 비판론이었다. 먼저 김원용은 “아직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미술사가 출판된 것이 없다”고 단정지었다. 이미 잘 알려진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미술사』2)에 대해 ‘중요 유물의 연관성 없는, 무질서한 나열’이란 점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한국 미술사’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원용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는데 세키노의 서술을 ‘일본적 방법’으로 규정하고 오늘의 한국 미술사가 바로 그런 일본적 방법에서 출발했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인정할 수 없지만 한국 미술사는 무질서한 나열로 시작했다고 규정함으로써 미술사 서술의 실체는 인정하지만 그 가치는 부정했던 것이다.
실체와 가치 사이를 넘나드는 이런 평가 태도에 따라 세키노의 저술보다 앞선 에케르트(Andreas Eckardt)의 『조선미술사』3)와 1946년 윤희순(尹喜淳)의 『조선미술사연구』4), 1948년 김용준(金瑢俊)의 『조선미술대요』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1955년에 출간한 이여성(李如星)의 『조선미술사개요』6)도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채 배제했던 것이다.
다음, 김원용은 미술사 서술에서 ‘맹목적인 국수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첫째 조선의 미술품의 가치에 대한 과대평가 경향, 둘째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경향의 미술사 서술에 대해 비판하였다.
“아직 우리나라 미술사학이 생장의 과정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과학적인 태도는 학문의 발전상 막심한 장애가 되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 뒤에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미술사학가들이 배출되어 그러한 무견식과 오류를 점차 시정해 나갈 것으로 믿고 있다.”7)
김원용의 이 같은 맹목적 국수주의 비판은 대상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 전후 미술사학을 이끈 이들이 김재원․황수영․최순우였는데, 이들을 뜻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문학 분야 논객들의 산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무견식과 오류’라는 서술로 미루어 인문학 분야 논객들을 지칭하는 듯하다. 전후 한국 사회에서 비과학적 태도를 지닌 논객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선행 연구자들의 연구가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는 터에 이러한 부정은 지극히 강력한 것이었다.
당시까지도 여전히 한국 미술에 대한 실체 왜곡 및 가치 폄하가 극심한 때였음을 고려한다면, 김원용의 맹목적 국수주의 비판과 과학적 태도 주장은 해방 뒤 주요 과제인 식민사학 극복과 민족사학 진흥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이었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김원용은 1961년에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세상을 떠나자 다음 해인 1962년 야나기 비판이 객관적이지 못하다고 일축하면서 야나기를 다음과 같이 추모했다.
“그가 성문화한 한국미의 철학은 길이 광채를 잃지 않을 것이며, 틀림없이 하나의 진리를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8)
이런 태도는 당시 미술사학을 주도하고 있는 학자들과 그 선학들에 대한 비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논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뒤이어 김원용은 1968년에 『한국미술사』9)를 출간했고 여기서 한국미의 특질과 해외 미술교섭을 다루고 또한 시대구분론을 시도했다. 앞선 자신의 견해를 바탕삼아 견해를 보다 발전시킨 것이었다.
Ⅲ. 문명대와 박용숙
문명대(文明大)는 1971년에 「한국미술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10)을 발표했는데 이 글에서 김원용과 마찬가지로 과거 미술사학의 수준을 ‘자료의 발견 보고서나 단편적인 연구에 그친 것’이라면서 그 과거를 ‘요람기’라고 요약했다. 또 글을 발표할 1971년 무렵을 ‘모색기’라고 규정했다. 다시 말해 1970년대 이전은 미술사학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유아 수준이었다는 주장이다.
문명대는 모색기의 미술사학이 거둔 성과를 다음처럼 서술했다. 첫째 조각사 분야에서 황수영과 김원룡의 성과를 주요 대상으로 거론하면서 그 차이를 부각시켰고, 둘째 회화사 분야에서 이동주(李東洲)의 「한국회화사」11)에서 조선시대를 3기로 나눈 시대구분법에 눈길을 주었다. 특히 오세창․윤희순․김원용의 시대구분론과 차이를 지적하면서 그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뒤이어 문명대는 자신의 울산 암각화, 이은창의 고려 양전동 암각화 관련 보고서를 주목했고, 또 최순우가 발표한 「강표암」의 성취, 김영주의 조선불화 비교 검토, 그리고 최완수의 「김추사의 금석학」이 거둔 성취를 높이 평가했다. 이런 평가는 미술사학의 모색기란 단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명대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고유섭의 미술사학을 정체성(停滯性), 개조론(改造論)과 같은 성격을 지닌 식민사학의 하나라고 규정했다. 이어 김원용이 자신의 저서 『한국미술사』에서 한국 미술의 특색을 ‘자연주의’라고 규정한 데 대해 야나기와 고유섭의 식민사학에다가 빗대면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정체성 및 개조론과 같은 식민사학의 유산에 관한 깊이 있는 진전을 이뤄나가지 못한 가운데 제기한 것이었다.
이런 한계를 의식한 듯 박용숙(朴容淑)이 1972년 「식민지시대의 미학 비판」12)이란 글을 발표했다. 박용숙은 글에서 “ 우리들의 미학은 식민지시대가 개척기이며, 일본인 학자들의 업적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국 미학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면서 다시 한국의 근대미학은 고유섭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유섭이야말로 ‘한국 미학의 시조’라고 규정했다. 나아가 시조 고유섭의 미술사학이 식민지 사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근거로 독일 관념철학, 초기 빈학파 미학사상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일본인 미술사학자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례로 제시했다. 또한 고유섭이 ‘사회사적 관점’을 배제하고 있는가 하면, 정신사와 결부시키지 못했다는 점도 지적하면서 불교미학을 정립하고자 했던 미술사학자로 규정하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을 식민지사관과 연결지어 놓았다.
박용숙은 김원용의 미술사에 대해사도 ‘식민지시대의 미학이라는 하나의 영역’이라고 단정지었다. 김원용이 ‘이조시대의 미술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을 두고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의 학설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며, 이를 합리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따라서 김원용은 고대의 정통성을 의식적으로 말살하려는 식민지사관을 부채질했고 또 불교미학을 정립하고자 한 고유섭의 업적을 김원용이 밀어냄으로써 “고유섭이 고대를 망각하려고 했다면, 김원용은 다시 여대(麗代)까지도 망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박용숙은 김원용이 정신사를 배제한 세키노 다다시, 우메하라 쓰에지(梅原末治)의 토대 위에 서 있으며, 고유섭 미학으로부터 후퇴를 범했는데 “한마디로 식민지시대의 병폐라고만 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는 듯하다”고 비판을 가했다.
박용숙의 이 같은 김원용 비판은 문명대의 김원용 비판과도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아무튼 박용숙과 문명대의 김원용 비판은 김원용이 주장한 맹목적 국수주의 비판 및 민족주의 사학 비판에 대한 첫 비판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박용숙과 문명대에 의한 고유섭과 김원용 비판이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논쟁이 없었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김원용이 야나기를 평가한 1962년부터 박용숙이 김원용을 비판한 1963년까지 가장 중요한 쟁점이 첫째 미술사학의 시대구분, 둘째 야나기와 고유섭 미술사학의 성격, 셋째 식민사학과 민족사학, 국수주의 비판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먼저, 시대구분 분야에서 세키노와 고유섭을 미술사학의 비조, 시작으로, 근대미술사학의 기점으로 설정하는 태도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중세 미술사학의 부정과 서구미술사학 이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란 점에서 19세기와 20세기 역사를 단절시키는 식민사학의 전형이라고 할 것이다. 역사단절론으로 식민사학을 구성하는 핵심 이론의 하나이며 동시에 자신들이 또는 자신 이후에야 미술사학이 본 궤도에 올랐음을 과시하는 자기중심주의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이 시기 미술사학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20세기 내내 이어진 것으로 미술사학의 출발을 20세기 초로 규정하면서 20세기 중후반에야 미술사학이 ‘본격화’되었다는 인식으로 굳어버렸는데, 어느 누구 하나 의심스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식민사학, 민족사학, 국수주의의 테두리에 관해서는 더 이상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끝으로, 야나기와 고유섭 미술사학의 성격에 관해서는 나름의 논의가 지속되었다. 그런데 미술사학의 성격이라기보다는 한국 미의 정체를 어떻게 보느냐는 시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Ⅳ. 문명대의 세키노와 야나기 비판
고유섭을 식민사관의 소유자로 비판했던 문명대는 1970년대 중반 일본인들과 고유섭의 미술사학에 관한 글을 연이어 발표했다. 1975년 「한국미술사의 특수성 시론」13)에 이어 1977년 「1930년대의 미술학 진흥운동」과 「우현 고유섭의 미술사학」14)을 발표했던 것이다. 뒷날 문명대는 후자의 두 글을 「일제시대의 한국미술사학」15)으로 묶었다. 「일제시대의 한국 미술사학」은 일제 강점기 미술사학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개괄해 보여주는 것이다. 문명대는 일제가 수행한 고적조사사업으로 말미암아 미술사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15년부터 발간하기 시작한 『조선고적도보』와 그 조사보고서는 고적조사사업의 결과를 집대성한 것이었다.
그 사업의 중심에 있었던 세키노가 1923년 조선사학회에서 개설한 조선사 강좌의 미술사 강의를 맡은 사실을 두고 문명대는 ‘아마도 조선미술사를 어느 정도 체계화시킨 일제시대의 첫 시도’라고 평가했다. 세키노의 서구미술사학 이식 및 식민미술사관이 지닌 영향력을 인정하면서도 무시해 온 미술사학계가 기존의 태도를 바꾼 평가라고 할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로 1932년에 출간한 『조선미술사』에 대해 ‘반도적 성격론, 사대주의론, 정체성론’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식민사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를 잊지 않았다. 또 1943년에 『조선고대문화의 연구』16)를 출간한 사이토우(齋藤忠)에 대해서도 ‘중국 문화가 들어와 비로소 한국 문화가 발달했다’는 견해를 보였다면서 사이토우의 이론은 ‘세키노보다 한층 더 악랄한 어용학자의 망발’이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문명대는 야나기에 대하여 재비판을 꾀했다. 문명대는 먼저 야나기가 읽은 조선 연구서적 목록과 총독부 고위관료와의 인척관계 그리고 허무주의와 같은 사상 배경을 거론하면서 식민주의적 미술사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반도적 성격, 사대주의, 숙명의 비애미를 주장한 야나기야말로 세키노와 한치의 차이도 없으며, 따라서 세키노의 미술사 이론을 곧바로 채용한 세키노의 아류라고 규정짓는 가운데 심지어는 다음처럼 썼다.
“결국 야나기는 어용학자를 표방하지 않고 은근히 식민지 정책에 동조하도록 만드는 문화의 첩자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17)
그리고 문명대는 “나타나지 않는 식민주의 사관의 미술사론이 오히려 오래고 강한 해독을 끼치기 십상”이라면서 비애미론은 아직도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상기시킨 다음, “그의 한국 미술관은 하루 빨리 청산해야 될 악랄한 식민주의적 이론”이라고 비판했다.
문명대는 1977년 「우현 고유섭의 미술사학」을 발표했다. 문명대는 고유섭을 ‘한국 미술사학의 시조’라고 하면서 실증주의 사학에 토대를 둔 그의 미술사학 이론을 전, 후기로 나누어 전기인 1935년까지를 사회경제사적 미술사학, 후기인 1935년부터를 정신사적 미술사학으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덧붙여 “한국 미술사학의 이론을 정신적인 데다 너무 치우치게 한 나머지 한국 미술의 특징을 적조나 애조, 또는 무관심 같은 것으로 보는 등 일본학자들 주장의 영향을 본의 아니게 받아들였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평가는 과거 정체성, 개조론 따위 식민사관으로 비판했던 자신의 견해를 일부 수정한 것이지만 한국 미술을 보는 미학 관점의 핵심에 대한 비판은 그대로 유지한 것이다. 다만 고유섭의 미술사학이 지닌 성격을 대상으로 시대구분을 꾀했다는 점에서 미술사학사의 일보전진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이어 문명대는 1978년 「현대 한국미술사학의 방향」19)이란 글에서 미술사 이론의 정립을 시급한 과제로 설정하고 미술사학의 시조 고유섭 사후 15년 동안 미술사학이 성장할 아무런 조짐도 보이지 않았으며, 그후 1961년 『고고미술』 발간 때부터 새로운 자료의 발굴 단계를 거쳐 196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실증단계에 이르렀다고 미술사학사의 과정을 설정했다.
Ⅴ. 김원용, 안휘준의 사학사 연구
김원용은 1981년 「한국 불교조각 연구 소사」20)에서 한국 미술사의 출발이 일본의 한국 합병과 함께 시작된 학문이라고 규정하고 그후에도 근대적 미술사학을 체득하지 못함에 따라 체계와 방법에 입각한 전통을 확립하지 못했다면서 해방 뒤에도 미술사학의 미발달과 전쟁으로 부진하여 ‘실질적 연구 활동기는 1960년대에 들어서부터’라고 설정했다. 김원용은 일제시대 미술사학을 “일본미술사학의 전통과 후진성 테두리 안에 있다”면서 그 일본 전통이 1950년대까지 연구 근대화의 장애라고 지적했다. 특히 김원용은 1929년 에케르트가 출간한 『조선미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일본인과 다른 독립된 주관과 따뜻한 감정이 흐르고 있고 한국 미술을 엄연한 독립국, 독립민족의 명예스러운 미술로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21)
이어 세키노와 고유섭의 연구성과를 개괄하고 해방 뒤 20년 동안 연구의 불황기였다고 하면서 사이토우를 비롯한 일본인들의 연구성과와 한국에서의 발굴 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러 김원용․황수영의 성과를 소개하고 1970년대에 이르러 조각사 분야에서 문명대 강우방의 활약기이며 안휘준․김리나․이성미․유준영 같은 외국에서 미술사학으로 학위를 받은 소장학자들이 귀국해서 우리 미술사 학계에 새로운 힘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 때라고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다만 1970년대 전반기에 있어서 정부 주도의 민족주의적 사회풍조가 일부 국학자들에 의해 잘못 받아들여져 과학정신을 흐리고 스스로 학문의 시야를 좁혀 결과적으로 도리어 해국 행위가 되는 경향이 일어나는
......“ 22)
그리고 김원용은 1980년대를 ‘성숙기’라고 규정하고 여러 성과들을 요약했다. 특히 김원용은 해방 뒤에도 꾸준히 일본인들의 연구성과를 함께 거론함으로써 한국 미술사학을 한국을 대상으로 삼는 미술사학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김원용은 문명대와 박용숙의 비판을 어느 정도 의식했던 듯하다. 자신이 식민사관의 후계자로 비판받는 상황을 의식했던 듯, 김원용은 일제시대뿐 아니라, 해방 뒤 1950년대까지 그 ‘일본미술사학의 전통과 후진성’이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일본 전통이야말로 연구 근대화의 장애물이라고 강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원용은 여전히 맹목적 국수주의를 비판했던 20년 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족주의 사회풍조야말로 과학정신을 흐리고 있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그 장애인 일본미술사학의 성과를 집요하게 연구사의 테두리에 포함시켜 나갔던 것이다.
안휘준(安輝濬)은 1976년 「1973-1975년도 한국미술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이란 글을 발표했다. 회화사 분야에서 이동주의 『일본 속의 한화』24)와 『우리나라의 옛그림』25)이 담고 있는 새 자료와 풍부한 내용에 눈길을 주고, 이어 최순우의 「회화」26)가 다루고 있는 초상화 발달 부분, 정양모의 「이조 전기의 화론」에서 대상으로 삼은 연구 소재의 희귀성을 높이 평가했다. 안휘준․맹인재․허영환을 비롯하여 불교미술 분야에서 황수영․최완수․문명대를 거론했고, 특히 안휘준은 근대미술 분야에서 이경성․이구열의 성취를 평가했다.
그후 안휘준은 「한국 미술사의 궤적」28)이란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현대적 미술사학을 일본인들이 시작했으며 ‘부정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민족의 문화능력을 의도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중국 문화의 영향을 과장하여, 한국 미술의 본질과 업적을 왜곡 선전”했다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일제 어용학자들의 한국 미술사 연구에서 노정되는 또 하나의 문제는 그들 학문 자체의 한계성이다. 즉 그들 대부분이 현대적 미술사학의 방법론에 어두워 철저한 학문적 업적을 내기가 어려웠다. 즉 작품이 지니고 있는 양식적 특징을 파헤쳐 보고 그것의 종적 또는 횡적인 관계의 규명이나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의의 등을 밝히는 일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작품 사료를 다룸에 있어서 양식적인 특징에 관해 설명하기보다는 ‘시각적 인상에 치우친’ 감상문과 같이 기술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29)
안휘준은 그 결과, 일제 식민사학은 ‘쓸모없는’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일본인 학자로서 끈덕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학자가 야나기라고 지적하면서 야나기의 이론은 “객관적 양식 분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감상주의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안휘준은 고유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 미술사 및 미학의 효시로 일컬어지는 고유섭 선생이 고군분투하며 이룩한 업적들이다. ......중략...... 대체로 본격적인 논문보다는 에세이 식의 글들이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또 한때 야나기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미술을 ‘비애의 미술’ 또는 ‘민예적인 미술’로 보려고 했던 것이 사실이다. ......중략...... 그의 많은 글들은 대개가 한국 미술 전반적인 흐름과 특징을 일반 독자들을 위해 설명하는 형식의 것들이지만......”30)
이러한 서술은 고유섭 미술사학의 가치를 소박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안휘준이 인정한 것은 ‘현대적 미술사학에 기초해 체계적인 양식고찰 성과’를 거둔 『한국탑파의 연구』31)와 『』조선화론집성>>32)이다.
안휘준의 미술사학 연구사 관점은 앞선 김원용 이후의 연구성과를 계승․확대시킨 것으로, 첫째, 일제식민사학 무용론, 둘째 야나기와 고유섭 사학의 성격 규정이 눈길을 끌고 있다. 앞선 연구자들이 세키노를 평가하는 가운데 실증의 성과를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그 성격에 대해 비판해 왔던 것을 안휘준은 포괄하여 ‘쓸모없는 것’이라는 무용론을 내세운 것이다. 이어 고유섭 미술사학을 산문 수준으로, 야나기 미술사관을 주관적 감상 수준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누구보다도 그 가치평가를 뚜렷하게 했다. 이런 관점을 바탕삼아 안휘준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안휘준은 해방 뒤 20여 년 동안을 미술사 연구의 ‘공백기’라고 규정하고 특히, 김재원과 김원용에 대해 “외국에서 돌아와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또 1960년대는 ‘준비기간’인데 이때의 성과는 김재원이 펴낸 『버마 한국 티베트』란 저술이라고 지적했다. 이 저술은 그 이전까지 조선미술사의 서두를 장식하던 낙랑미술을 배제함으로써 성과를 거두었으며 또한 1966년 김재원․김원용이 함께 써서 뉴욕에서 출간한 『Treasures of Korean Art』에 대해 “양식분석에 의한 결론의 유도 등은 확실히 주관적 인상론에 집착하던 일본적 학문 태도를 털어 버리고 현대적 미술사학의 입장에서 한국미술사학계가 뿌리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또 이 시대를 지나 1973년에 출간한 김원용의 『한국미술사』에 대해 ‘현대적인 미술사학의 방법론을 동원하여 논리적 기술을 폈다’는 점을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했다. 다시 말해 김재원과 김원용이야말로 현대적 미술사학을 개척하고 정상 궤도에 올려놓은 이들이라는 것이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대한 서술에서도 김재원과 김원용의 활동을 앞세우고 기초자료 집성 및 방법론에 관한 인식의 고조를 들어 다양화와 전문화 추세를 특징으로 들었다.
그리고 분야별 연구사를 요약했다. 선사시대 분야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 시대라는 시대구분이 해방 뒤에 이뤄졌고, 회화사 분야에서 1970년대 이후 이동주․안휘준을 비롯해 초상화, 고분벽화, 불교회화 분야 연구 업적이 전문화되고 있다고 규정했다. 특히 안휘준은 회화사에서 1972년 일본 도쿄에서 출간된 주영헌의 저서 『고구려의 벽화고분』을 거론함으로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구성과도 포함했고, 김원용처럼 일본인 연구자의 성과도 포함시켰다. 근대회화사 분야에서 이경성․이구열의 성과를, 조각사 분야에서는 김원용의 연구와 황수영․진홍섭․정영호․문명대․김리나․강우방의 성과를 거론하고 공예사 및 건축사 분야도 언급했다.
안휘준의 연구사가 이전의 연구사와 다른 점은 이른바 ‘현대적 미술사학’과 ‘그 궤도의 정상화’를 이룩한 사학자로 김재원, 김원용을 내세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1960년대에 출간한 저술을 대상으로 가한 평가의 근거는 ‘일본미술사학의 극복과 서구 양식사학의 정립’이다. 앞선 연구들이 이러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을 기준으로 삼은 평가라고 하겠다.
앞서 서술한 대로 이 시기 미술사학계의 견해는 19세기까지 이뤄져 온 동양의 미술사학과 그 역사를 배제하고 있으며, 중세와 현대를 구분하여 동양의 미술사학을 중세, 서양 근대미술사학을 현대로 나누는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원용이 20세기 후반 일본 미술사학자들의 연구를 포섭하고, 또 안휘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연구는 물론, 이경성의 근대미술사 연구 성과를 포함하였다는 점에서 시각의 확대, 영역의 확대를 이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Ⅵ. 연구사의 시대구분
미술사학 연구사의 발자취를 단계에 따라 수행한 시대구분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김원용이 1981년에 제한된 수준에서 시도한 바 있다. 첫째 일제세대를 일본 미술사학 전통과 테두리 안에 있던 시대로, 둘째 해방 이후 20년을 불황기로, 셋째 1960년대를 실질적 활동기로, 넷째 1980년대를 성숙기로 나누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1983년 안휘준이 보충했는데 안휘준은 일제시대 때 현대미술사학이 출발했으며, 해방 이후 20년의 공백기와 1960년대 준비기를 거쳐 김재원, 김원용에 의해 현대적 미술사학이 궤도에 올랐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대구분과 달리 문명대는 1987년 「현대 한국미술사학의 새로운 모색」33)이란 글에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첫째 1930~45, 둘째 1945~70, 셋째 1970~90, 넷째 1990년 이후로 나누고 첫 단계를 근대 학문적인 방법의 도입 시기로 설정했다. 근대 한국 미술사학의 비조 고유섭의 출현과 야나기, 세키노와 같은 식민미술사학자들이 병존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국립박물관 학예원 및 전형필에 의하여 1960년에 창립한 고고미술동인회와 기관지 『고고미술』 창간 및 김원용에 의한 방법론의 시도를 열거했으며, 셋째 단계는 미술사학 이론 및 방법에 관한 관심 및 연구서 출간, 전문 학술지 창간, 대학에서의 미술사학 관련학과 창설을 증거 삼아 ‘본격적인 연구단계’에 들어섰다고 지적했다.
문명대는 1990년에 다시 「한국미술사연구 30년:총관」34)이란 글에서 1960년을 고고미술동인회 출범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한 다음, 1960년 이전을 1945년 이전과 이후로, 1960년 이후는 1968년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크게 네 시기로 설정했다. 첫째 1945년 이전은 근대적 학문방법의 도입기, 둘째 1945년 이후는 준비기간 또는 과도기, 셋째 1960년부터 1968년까지는 기초조사연구 단계, 넷째 1969년부터 1989년까지는 성숙단계로 규정했다. 특히 1980년대의 특징으로 제3세대 미술사학자군이 대거 진출했음을 지적했다.
홍선표는 1990년 「한국회화사연구 30년; 일반회화」와 1994년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동향 1990-1994」36)를 연이어 발표했는데, 이 글을 합쳐 쓴 「광복 50년의 한국회화사 연구」37)에서 크게 광복 이전과 이후로 나누고, 다시 첫째 광복 이전 둘째,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 셋째 1970년대부터 1995년까지로 세분화했다. 먼저 광복 이전에 대해서는 식민지 시기의 근대적 학문으로의 성립이 이뤄진 때로, 1945년부터 1960년대까지는 윤희순의 민족주의 회화사관 형성을 성과와 한계로 지적했고, 1970년대에 대해서는 이동주의 회화사의 체계화와 더불어 암각화 발견에 따른 회화사 서술 상한선 문제가 제기되었음을 특기했다. 신석기시대설을 주장하는 문명대, 청동기시대설을 주장하는 김원용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주요 쟁점으로 부각시켰으며, 한편 이 시기 재야 연구자들의 민화연구에 대해 ‘극우적인 국수주의 성향’을 보여준 시기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홍선표는 이 시기 근대회화 연구에 대해 ‘제3공화국의 조국근대화 시책과 연계’된 활기의 성과라고 주장하고 이경성과 오광수의 연구를 서구 근대주의 관점으로, 이구열의 연구를 소박한 전통주의와 민족주의적 근대화론의 관점으로, 김윤수의 연구에 대해서는 서양 근대미술을 반사회적․반민중적인 것으로 전제하여 이를 수용한 한국 근대서양화 비판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이들 모두의 공통점으로 “연속성과 변화성에 대한 구조적 논의, 화풍과 이론 면에서의 실증적 분석에 의한 체계화”에 이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1980년대에 대해서는 제3세대 연구자의 활동 및 간송미술관 연구자들의 학맥 형성을 지적하는 가운데 연구가 양적인 팽창, 질적인 심화가 일어났다고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새로운 시각과 문제의식에 의해 종래의 관점과 방법론을 극복코자 하는 경향을 전개시켜 나갔다. 특히 사상사와 진보적 성향의 비평적 시각 등 더욱 다양한 관점과 방법론의 적용을 통해 한국 회화사와 그 발전방향에 대한 인식을 한층 풍요롭게 했다.”38)
홍선표는 1980년대 회화사 연구의 다양한 경향을 비판적으로 소개하는 가운데 근대회화 연구에서 사회주의 미술운동까지 연구 영역이 확대되었음을 거론하면서 “민족민중미술운동과 연계된 비평관을 지닌 원동석․윤범모․최열 들에 의해 종래의 서구 모더니즘적 근대화 시각을 강하게 비판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고 지적하면서 하지만 그것이 “실증적 기반 결핍, 전체 맥락 파악의 결여와 같은 협착한 시각, 개설적 서술로 말미암아 근대회화사의 객관적․체계적 구성에는 미진한 한계를 보였다”고 비판했다. 또한 홍선표는 1990년대 전반기에 이뤄진 식민주의 사관 극복과 민족주의 사관 수립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시각을 비판하고 ‘동아시아 미술문명권 시각으로 한국회화사를 구성하는 관점’을 강조하는 홍선표와 한국미술연구소의 등장을 높이 평가했다. 39)
문명대와 홍선표의 연구사는 1960년대 이래 미술사학 연구사가 중층화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첫째, 문명대와 홍선표는 이미 앞선 연구자들의 시각이라 할 ‘근대적 학문 도입’이라는 서구미술사학 이식론을 그대로 수용했다. 둘째, 이들은 연구사의 시대구분을 보다 정교히 하는 가운데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 결성과 미술사학 방법론의 체계화 따위를 증거로 삼아 미술사학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음도 확정시켰다.
홍선표는 김원용의 맹목적 국수주의 비판 이후 다시 해방 직후 윤희순의 민족주의 사관을 거론하는 가운데 1970년대 민화연구에서 재야사학자들의 관점을 ‘극우 국수주의’라고 규정했다. 특히 1970년대 근대미술사 연구의 성과와 그 동력을 제3공화국의 정책에서 찾았고, 나아가 1980년대에 이르러 사회주의 미술운동 영역을 대상으로 삼아나가고 있음을 거론하면서 근대미술사 연구 분야에서 객관성 및 체계화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미술사학의 국가주의 성향 비판과 민족민중 성향 비판은 앞서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방식이었는데, 이는 미술사학사를 이데올로기 경향에 기초해 구성하는 연구사의 새로운 단계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단계는 1970년대 이후 미술사학의 다양화, 중층화를 반영하는 연구사의 성과였다.
여기에 덧붙여 홍선표는 스스로 1990년대에 동아시아 문명권 관점을 내세우고 있음을 미술사학사의 성취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서구 탈민족․탈식민 이론을 도입하여 김원용이 제창한 민족주의 및 국수주의 비판을 심화․확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Ⅶ. 연구사의 정착
연구사가 쌓여감에 따라 그리고 연구가 성과를 이루면서 연구사의 대상도 보다 세분화와 전문화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안휘준은 1992년 「조선왕조시대의 회화-초기의 회화를 중심으로」40)란 글에서 조선 초기 회화 연구사를, 이성미는 「삼국시대의 회화」40)란 글에서 고구려 고분벽화 및 백제․신라 회화 연구사를 다루었다. 또 같은 해인 1992년 권영필은 「안드레아스 에카르트의 미술사관」42)을 발표하여 야나기 및 고유섭에 집중되어 온 연구의 테두리를 넓혔다. 그리고 미술사 시대구분론에서도 문명대가 1994년 「한국미술사의 시대구분」43)을, 권영필이 「한국미술사 시대구분의 문제」44)를 발표했다.
1997년에는 유홍준․이태호가 「한국미술사연구 100년(상);해방이전」45)을, 이태호가 「한국미술사연구 100년(하); 해방이후」를 발표했다. 이들의 연구사가 앞선 시대의 연구자들과 다른 점은 ‘실학자들에 의한 사료 고증이 근대적 학문으로서 미술사 연구의 토대’였다는 관점이다.
이런 관점의 연장으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을 설정하고 그것을 ‘전통적인 연구방법’의 산물로 평가했다. 이어 일제 어용학자와 야나기의 식민사관을 비판했는데, 이는 앞선 연구자와 같은 관점이지만 국학 연구로서 조선미술론 논객들인 안확․박종홍을 설정한 것은 다른 점이다. 또 고유섭에 대해서도 ‘실증의 모범’이자 ‘사회경제사적 또는 민족사적 지평’을 열어 놓았다고 평가하면서 나아가 1930년대 중반 이후 양식사적․정신사적 변모를 두고서도 ‘내적인 아름다움만으로 사랑하고 극복하려 했던 점’이 한계이지만 그것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좌절과 한계’일 뿐이라고 평가하고 특히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해두었다.
“해방 후 고유섭의 제자들에 의해 남한의 미술사학계가 짜여지게 되는데, 그 제자들은 고유섭의 사회경제사적인 측면을 무시한 채 그의 후기 작업인 실증적 사료조사 내지 양식사적 연구로 편향되고 말았다.”47)
이태호는 고유섭이 ‘근대적 한국 미술사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한 다음, 해방 직후 윤희순, 김용준을 민족미술론자들이라고 지적하고,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 결성을 미술사학계 형성의 기미였으며 이 때 학계가 태동하였다고 규정했다.
Ⅷ. 맺음말
해방 직후 윤희순과 김용준에 의해 일제 관학자들의 관점과 태도를 벗어나 민족주의 미술사학이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 김원용이 맹목적 국수주의 미술사학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이러한 비판의식이 대학 미술사학계를 일관하는 태도와 관점으로 자리잡음에 따라 이전의 민족주의 미술사학이 국수주의 미술사학으로, 나아가 윤희순, 김용준의 성취가 일종의 재야미술사학으로 분류됨에 따라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따라서 대학미술사학이 주류로 형성된 미술사학은 실증주의와 양식사 관점을 확립했고 윤희순․김용준의 민족주의 미술사학, 고유섭의 사회경제사학, 정신사학 및 이동주의 문화권역 미술사학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나아가 미술사학 연구사를 담당한 이들이 실증사학과 양식사학을 기준으로 설정하고 연구사를 수행함에 따라 여타의 미술사학은 미술사학사의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특히 ‘근대적’ 또는 ‘현대적’인 수식어를 붙인 미술사학의 의미와 성격이 명쾌하지 않은데다가 그 모두가 서구 근대미술사학을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연구사 과정에서 성찰의 대상으로 설정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미술사학 연구사의 취약점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한 성격에 따라 동양, 조선의 미술사학을 배제하면서 서구미술사학 이식 이후만을 수용하는 관점이 만연해 왔던 것이다.
이미 연구사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추세에 따른 서술을 통해 미술사학의 자취를 객관화시켜 대상화의 궤도에 올려놓았지만, 실증 및 양식사 방법론이란 기준을 관철시키고 있는 탓에 형식주의 미술사학의 궤도를 벗어난 이른바 사회경제사학 및 정신사 방법론을 적용한 미술사학에 대하여 ‘체계화 및 객관성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사의 경향은 미술사학 연구사의 방법과 관점의 다양성 및 중층화를 이뤄나가는 데 한계로 작용해 온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미술사 연구에서 다양한 관점과 태도, 방법에 따른 성취가 이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양한 갈래에 대해 ‘객관성․체계화’를 문제삼기만 했던 것이다. 더욱이 대학미술사학이란 한계를 설정하고 이른바 재야 또는 동양, 조선의 오랜 전통이라고 할 예원미술사학의 갈래에 대해 부정하는 태도는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과제다.
이제 연구사의 과제는 세키노, 고유섭을 근대적 미술사학의 출발이라고 설정하는 일이 아니라 중세 이래 거둬 온 성취를 실증해 나가는 일과 그러한 성취가 20세기에 어떻게 계승․혁신되었는가, 그리고 20세기에 이식된 서구미술사학이 어떻게 굴절․정착하여 오늘의 한국미술사학이 정립되었는지를 밝혀 나가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 태도, 방법이야말로 20세기 연구사가 밟아 온 역사단절론과 서구중심주의, 형식주의 미술사관을 극복하는 전망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1) 김원용, 「한국 미술사의 반성」, 『문리대학보』11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1963).
2) 세키노 타다시, 『조선미술사』 (조선사학회, 1932).
3) 에케르트, 『조선미술사』, (독일, 1929). 권영필 옮김, 『에케르트의 조선미술사』, (열화당, 2002).
4) 윤희순, 『조선미술사연구』 (서울신문사, 1946).
5) 김용준, 『조선미술사대요』 (을유문화사, 1948).
6) 이여성, 『조선미술사개요』 (평양: 국립출판사, 1955).
7) 김원용, 「한국미술사의 반성」, 『문리대학보』11(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1963).
8) 김원용, 「일본인 유종열의 한국미관」, 『사상계』(1962.3), 『한국미의 탐구』(열화당, 1978)에 재수록
9) 김원용, 『한국미술사』(범우사, 1968).
10) 문명대, 「한국미술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1969-1972」, 『역사학보』 49-60(1971. 9) 『한국미술사학의 이론과 방법』(열화당, 1978)에 재수록.
11) 이동주, 「한국 회화사」, 『민족문화연구』4(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0).
박용숙, 「식민지시대의 미학 비판」, 『다리』(1972.5).
13) 문명대, 「한국 미술사의 특수성 시론」, 『문학과지성』(1975년 여름호), 『한국 미술사학의 이론과 방법』(열화당, 1978)에 재수록
14) 문명대, 「1930년대의 미술학 진흥운동」, 『민족문화연구』12(고려대학교, 1977.12); 문명대, 「우현 고유섭의 미술사학」, 『미술과 생활』(1977. 7).
15) 문명대, 「일제 시대의 한국 미술사학」,『한국 미술사학의 이론과 방법 』(열화당, 1978).
16) 사이토우, 『조선고대문화의 연구』(지인서관, 1943).
17) 문명대, 「일제 시대의 한국 미술사학」,『한국 미술사학의 이론과 방법 』(열화당, 1978).
18) 문명대, 「우현 고유섭의 한국 미술사학」, 『한국 미술사학의 이론과 방법 』(열화당, 1978).
19) 문명대, 「현대 한국 미술사학의 방향」, 『한국 미술사학의 이론과 방법 』(열화당, 1978).
20)-22) 김원용, 「한국 불교조각 연구 소사」,『미술자료』 28호, 1981.
23) 안휘준, 「1973-1975년도 한국 미술사 연구의 회고와 전망」, 『역사학보』 72집(1976), 『한국의 역사와 문화』(시공사, 200)에 재수록
24) 이동주, 『일본 속의 한화』(서문당, 1974)
25)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그림』(박영사, 1975)
26) 최순우, 「회화」, 『한국사』2 (국사편찬위원회, 1974)
27) 정양모, 「이조 전기의 화론」『한국 사상사대계 1』(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3).
28)-30) 안휘준, 「한국 미술사의 궤적」, 『한국학 입문』(학술원, 1983), 「한국 미술사 연구의 발자취」『한국의 미술과 문화』(시공사 2000)에 재수록.
31) 고유섭, 『한국탑파의 연구』(을유문화사, 1948).
32) 고유섭, 『조선화론집성』(고고미술동인회, 1965), 경인문화사, 1976. 재간행
33) 문명대, 「현대 한국 미술사학의 새로운 모색」, 『미술사학』1, (한국미술사교육연구회, 1987.6)
『한국 미술사 방법론』(열화당, 2000)에 재수록.
34) 문명대, 「한국 미술사 연구 30년; 총관」,『미술사학 연구』188(1990)「한국 미술사 연구 30년과 연구방법」『한국 미술사 방법론』(열화당 2000)에 재수록.
35) 홍선표, 「한국 회화사 연구 30년; 일반회화」,『미술사학연구』1888(1990)
36) 홍선표,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동향 1990~1994」,『한국시론』(국사편찬위원회, 1994)
37)-38) 홍선표, 「광복 50년의 한국 회화사 연구」,『조선시대회화사론』(문예출판사, 1999)
39) 홍선표, 「한국 미술사의 연구관점과 동아시아」, 『조선시대회화사론』(문예출판사, 1999)
40) 안휘준, 『한국 미술사의 현황』(예경, 1992)「조선 초기 회화연구의 제문제」,『한국회화사연구』(시공사, 2000)에 재수록
41) 이성미, 「삼국시대의 회화」,『한국미술사의 현황』(예경, 1992)
42) 권영필, 「안드레아스 에카르트의 미술사관」,『미술사학보』5(미술사학연구회, 1992), 『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문예출판사, 2000)에 재수록
43) 문명대, 「한국 미술사의 시대구분」,『한국학연구』(단국대, 1994),『한국 미술사 방법론』(열화당, 2000)에 재수록
44) 권영필, 「한국 미술사 시대구분의 문제」,『한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연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미적 상상력과 미술사학」(문예출판사, 2000)에 재수록
45), 47) 유홍준․이태호「한국 미술사 연구 100A년(상);해방 이전」『한국 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학고재, 1997)
46) 유홍준․이태호「한국 미술사 연구 100A년(하);해방 이후」『한국 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학고재, 1997)
※ 출처-석남 이경성 미수 기념 논총 『한국 현대미술의 단층』, (삶과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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