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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현대미술이 ‘한국’ 미술사에 편입될까

안휘준

/ 안휘준(安輝濬)(서울대학교 인문대학 考古美術史學科 교수)
■ 목차
Ⅰ. 머리말
Ⅱ. ‘한국’ 미술사 현대편 편사(編史)의 기준과 원칙
1. 창의성(創義性)
2. 한국성(韓國性)
3. 대표성(代表性)
4. 시대성(時代性)
5. 기타
Ⅲ. 맺음말
Ⅰ. 머리말
우리나라 역사상 현대처럼 미술이 활발하고 다양한 양상을 띠며 발전한 때는 일찍이 없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각 분야에서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이 빛어내는 작품은 부지기수이다. 이는 참으로 마음 든든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한국’ 회화사나 ‘한국’ 미술사에 오를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작가들이 중에서 극히 소수의 작가들만이 미술사에 편입될 것이다. 또 이 극소수에 해당하는 작가들의 많은 작품들 중에서도 불과 몇 점의 대표작들만 미술사에 편입되는 행운을 맞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많은 작가들과 부지기수의 작품들 중에서 과연 어느 작가들의 어떤 작품들이 미술사에 편입되게 될 것인가, 또 미술사가들은 어떤 기준이나 원칙을 가지고 미술사에 편입시킬 작가나 작품을 선정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해서는 미술사가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필자의 졸견을 밝히고 다른 미술사가나 전문가들의 고견을 들어보는 것이 앞으로의 작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취지에서 필자가 생각하는 기준이나 원칙을 이곳에 적어보고자 한다.
혹자는 현대미술은 평론가들의 영역이며 이미 그들이 상당 부분의 이론적 작업을 해온 마당에 굳이 미술사가가 개입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러한 의문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평론이 곧 미술사는 아니며 평론가들의 글이 모두 역사적 맥락과 관점에 입각해서 쓰여진 것은 아니어서 현대미술의 편사(編史)작업은 여전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편사과정에서 평론가들의 업적은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지만 엄정성, 객관성, 공평성, 전문성 등의 잣대에 의해 그들 업적의 참고 여부와 정도가 경우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졸고가 ‘한국’ 미술사나 ‘한국’ 회화사를 위시한 분야별 통사(通史)의 한 부분으로 현대미술을 편입시키는데 있어서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임할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다함께 고민하고 논의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또한 창작에 임하는 작가들과 비평에 기여하는 평론가들에게는 창작활동을 ‘역사적 입장’에서 ‘역사적 맥락’과 연관지어 잠시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된다면 더없이 다행이겠다.
작가들 중에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숙고하지 않고 방향을 엉뚱하게 잘못 잡아서 새로운 ‘한국’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비켜가는 경우도 적지 않음을 본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방향을 잃은 배가 원하는 목적지에 제대로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창작의 항해를 하는 작가도 ‘미술사에의 편입’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원만히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선 방향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본다. 이 졸고가 그러한 방향 설정에 하나의 참고가 된다면 더없는 보람이 되겠다.
Ⅱ. ‘한국’ 미술사 현대편 편사(編史)의 기준과 원칙
역사 서술에 있어서 사료(史料)의 선정(選定)은 첫 단계의 불가피하고 필수적인 작업이다. 수많은 그리고 잡다한 사료를 모두 포함해 다룰 수 없고, 또 그것이 올바른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항상 가장 바람직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표적인 사료들을 골라내어 역사적 사실과 상황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서술하는 편이 훨씬 역사적 진실에 효율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성(事實性), 진실성, 객관성 등에 의거하여 신뢰할 수 있는 사료를 골라내는 이른바 ‘사료의 선정’이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요구된다.
특수사에 속하는 미술사의 경우에도 원칙에 있어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일반사가 문헌기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비하여 미술사에 있어서는 문헌기록과 함께 미술작품이 일차적인 사료가 된다는 점이 큰 차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미술사에서는 그 나름의 사료선정의 기준이 따로 필요하다. ‘한국’ 미술사의 경우에는 미술사의 보편적 기준과 함께 ‘한국’ 미술사에 적합한 보다 구체적인 기준도 동시에 요구된다. 따라서 그것들에 관하여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둘 수 있겠다.
1. 창의성(創義性)
2. 한국성(韓國性)
3. 대표성(代表性)
4. 시대성(時代性)
5. 기타(작고 작가/분명한 제작연대)

1. 창의성
미술을 포함한 예술 세계에 있어서 창의성의 제1의 덕목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창의성의 발현과 구체화가 없다면 예술의 존재 의미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현대미술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창의성’이라는 것은 안목 있는 눈으로 보면 한눈에 확인이 되면서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즉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뛰어난 작품성이나 조형성, 높은 격조와 예술성, 남다른 특이성과 차별성, 혹은 독자성, 새로운 발상과 기법, 실험성과 새 양식(樣式)의 창출 같은 것들이 두드러지게 어우러져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해도 좋을 듯하다. 이러한 다면적 의미를 지닌 ‘창의성’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한국’ 미술사에 편입시킴에 있어서 선별을 위한 첫 번째 기준이 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이 점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예술사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또는 적용되어야만 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성을 재는 척도(尺度)는 역시 독자성(獨自性)이고 독자성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새로운 양식(樣式)의 창출이라고 하겠다. 종래의 양식과 다른 양식, 다른 작가의 스타일과 다른 스타일의 창출이야 말로 창의성 발현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새 양식의 창출은 그냥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각고의 노력과 실험 끝에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실험성이 중요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실험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의미가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실패한 실험의 의미를 대변해 준다. 성공한 실험은 새로운 양식의 창출로 구현되므로 그 의의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처럼 창의성은 현대의 ‘한국’ 미술에 있어서도 지고(至高)의 덕목임을 부인할 수 없다.
2. 한국성(韓國性)
‘한국’미술사 편입을 위한 잣대로서 창의성과 함께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성’, 즉 한국적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미술사가 아닌 ‘한국’의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으려면 그에 걸맞는 한국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한국인의 혈통을 지니고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창작을 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작품에 창의성과 함께 ‘한국성’이 또렷하게 구현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본다.
한국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굳이 ‘한국’ 미술사에 편입시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성이 없는 작품은 세계미술사에서나 편입의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국의 미술사에도 편입되지 못하는 작품에 그런 기회가 주어질 가능성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어느 동남아 국가의 국제미술전시회에서 경험했던 것은 하나의 참고가 될 만하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참여한 국제추상회화전이었는데 수많은 그림 밑에 붙은 국가명과 작가명을 가린다면 어느 나라 누구의 작품인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오직 일본 화가들의 작품들만이 그 특이한 색채 감각 때문에 국적이 확인될 뿐이었다. 사실은 이러한 경험은 필자만이 한 것도 아니고 그 동남아 국가의 전시에서만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 추상화의 경우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국제화 시대에 미술이 국제적 교류를 빈번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경향이고, 어느 나라의 국제전에서도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사례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국의 특성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작품을 그 나라의 미술사에 편입시킬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한국의 미술은 한국성, 중국의 미술은 중국성, 일본의 미술은 일본성을 창의성 짙게 구현했을 때만 그 나라의 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비난 구상(具象)미술의 경우만이 아니라 비구상 또는 추상미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현대미술 작가들 중에는 굳이 ‘한국성’을 외면하고 이국성(異國性)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본다. 재주와 기량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방향과 목표를 잘못 잡은 결과여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한국성은 한국의 작가만이 잘 구현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작가가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음을 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한국성의 추구가 국제성의 배척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상호보완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20세기의 최고 화가들로 인정받는 박수근과 김환기의 작품들은 그 좋은 예다. 이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창의성, 한국성, 국제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그림이 담아낸 한국적 주제, 독특한 개성적 표현법, 유화(油畵)의 적극적인 수용과 활용 등은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요소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들의 예는 한국성의 구현이 국제성의 배척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오히려 국제성의 토대 위에 한국성을 구현하는 데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성과 국제성의 바람직한 관계를 이 훌륭한 작가들은 너무도 명료하게 보여준다. 국제성을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도 압도되지 않고 뚜렷하게 한국성을 구현했으며 누구보다도 창의성을 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들을 ‘한국’ 미술사에 편입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국성’이라는 것도 ‘창의성’이라는 것 못지않게 정의하기가 어렵다. 창의성의 경우처럼 보는 순간 느끼고 확인할 수는 있어도 말이나 글로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정의한다고 해도 논란의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주제, 표현방법, 색채 등에 우리나라의 생활과 문화가 배어 있거나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총칭한다고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에 언급한 박수근과 김환기의 작품들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라고 거듭 환기시킬 수 있을 것이다.
3. 대표성(代表性)
‘한국’ 미술사 편입을 전제로 한 기준들 중에 ‘대표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은 뛰어난 창의성과 뚜렷한 한국성을 갖추면 대부분의 경우 대표성도 함께 갖추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 이외에 다른 작가들이나 미술계에 미치는 예술적 영향력에 따라 획득될 수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많은 추종자들이 생겨서 자연스럽게 하나의 파(派)나 계보를 이루면서 대표성을 띠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조선 왕조 초기의 안견, 중기의 김시-이경윤-김명국, 후기의 정선, 심사정, 김홍도, 말기의 김정희, 장승업, 허련, 안중식 같은 인물들이 그 전형적인 예다. 이들은 설령 따르는 무리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의 창의성 때문에 ‘한국’ 미술사나 ‘한국’ 회화사에서 누락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교육을 통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면서 대표성을 얻는 경우도 있다. 지난 세기의 김은호, 허백련 같은 인물들이 좋은 예다. 물론 이들도 교육적 영향력이 아니라도 미술사에 편입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교육적 영향력 때문에 그 입지가 더욱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밖에 4대가라고 불리어진 수묵화단의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의 경우처럼 평단이나 세간의 평가에 따라서 대표성이 부여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대표성’도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표성은 작품성이나 예술성과 합치될 수도 있고 간혹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으나, 대개는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영향력이나 매스컴의 힘과 결부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일치한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이 대표성 문제는 자칫 엄정한 평가의 잣대를 흔들어 놓을 소지가 많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따르는 무리가 없는 외로운 작가들이 많기 때문이다. 따르는 무리의 유무나 다과(多寡)에 의거하여 대표성을 따진다면 빠지게 되는, 그러나 창의성이 뛰어나고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문인화가였던 강세황과 이인상이 그 대표적 예다. 물론 강세황에게는 안산 지역의 문인들과 최북이, 이인상에게는 친구였던 이윤영처럼 추종자 비슷한 존재로 간주될 수 있는 인물들이 있었으나 하나의 파나 계보로 단정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미술계에서 추종자들이 있었는지의 여부만을 기준으로 대표성을 따진다면 현대 유화(油畵)의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히는 박수근이나 김환기의 경우에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분명히 대표적 화가들임에도 불구하고 다른화가들에게 화풍상으로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따라서 화풍상으로는 이렇다할 별다른 추종자들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화파도 계보도 형성하지 못했다. 그들은 추종자가 거의 없는 홀로 선 ‘외로운 거장들’일 뿐이다.
이러한 경우 그들에게 추종자가 없다고 해서 대표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들은 작품의 우수성만으로 스스로 대표성을 획득한 경우에 속한다. 그들처럼 작품성이 뛰어나면서도 추종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역사상 극히 예외적인 기이한 일이라 하겠다. 아마도 그들 화풍의 개성이 너무도 뚜렷하고 특이해서 스스로 그들의 아류가 되고자 한 작가들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수근의 경우 딸만이 그의 화풍을 따른 것은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어쨌든 대표성의 문제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은 측면들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성을 포괄적으로 보기보다는 분야별로 나누어서 보는 방법도 좋을 듯하다. 예를 들어서 수묵 산수화에 노수현, 이상범, 변관식, 허백련, 채색인물화에 김은호, 박생광, 유화에 박수근, 김환기, 장욱진, 유영국 등등(생존 작가는 제외) 식으로 재질, 주제, 표현방법 등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표성의 문제는 많은 논란을 낳을 수도 있어서 특히 조심스러운 접근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밖에 대표성과 관련하여 매스컴도 일고가 요구된다. 즉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가 반드시 대표성을 지니는가 하는 문제다. 반드시 훌륭한 작가만이 매스컴을 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평가의 잣대가 될 수는 없다. 작가와 작품의 우수성만이 매스컴 보도와 관련하여 대표성을 선별할 잣대인 것이다.
4. 시대성(時代性)
‘한국’ 미술사에 편입시킬 작가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시대성’의 문제다. 작가가 무슨 작품을 하든, 어느 시대를 대상으로 하든 그것은 작가 고유의 권한이므로 누구도 탓할 수가 없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작가가 21세기를 외면하고 굳이 17, 18세기의 시대에 묶여 있다면 그것이 꼭 바람직한지, 또 그 작가를 21세기 미술사에 끼어 주어야 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것이 기록화일 경우에는 예외에 속하지만 그 경우에도 21세기를 담아낸 작품에 우선하기는 어렵다.
작가가 구태의연한 화풍으로 장미를 그릴수도 있지만 그것이 혁신적인 재해석의 결정체가 아닌 이상 21세기의 작품을 제쳐놓고 ‘한국’ 미술사 21세기의 장에 편입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자기가 사는 시대와 나라의 자연, 사회환경, 사상과 철학, 삶 등을 담아내는 것이 비록 의무는 아니어도 바람직한 것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18세기의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 등의 풍속화가 오래도록 가치를 지니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 주변에서 간취되는 생활상을 담아냄으로써 시대성을 지니게 되었고, 사실적, 예술적, 해학적인 표현을 통해 사실성과 예술성을 차원 높게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그들의 풍속화야말로 시대성의 표상인 것이다. 그들의 진실된 풍속화가 남아 있기에 우리는 18세기 우리 선조들의 삶과 문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재현하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풍속화를 재현한 20세기 화가의 작품이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다. 참고는 되어도 그들이 18세기 ‘한국’ 회화사와 미술사에 당당히 편입되듯이 그가 20세기 ‘한국’ 회화사나 미술사에 우선해서 포함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시대성의 문제인 것이다.
20세기 ‘한국’ 회화사나 미술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시대성’과 관련하여 도저히 제쳐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민중미술이라 하겠다. 비록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기 위한 저항정신을 앞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민중미술가들의 시대성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전체 민중미술가들과 그들의 모든 작품들이 시대성만을 근거로 당연히 ‘한국’미술사나 회화사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민중미술가들 중에서 ‘창의성’이 뛰어난 작가와 작품만이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의 작품들은 누구의 경우이든 최소한 ‘한국성’과 ‘시대성’을 갖추고 있어서 창의성이나 예술성만 함께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한국’ 미술사와 회화사에 편입대상으로 고려되어 마땅하다고 본다. 민중미술 작가들만치 치열한 ‘시대성’을 지닌 작가나 작품을 찾기는 쉽지 않다.
작가들이 시대성을 중시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시대성을 중시한다면 우리 주변의 변화된 자연환경은 물론 우리의 삶과 생활 양태,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의 제 양상을 관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런 것들을 주제로 한 미술작품들은 설득력과 호소력을 강하게 지니게 될 것이다. 허황한 작품들은 더 이상 발붙이기 어려워질 것이다. 어찌하여 서구 미술의 아류는 넘치면서도 현대판 한국적 풍속화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인가. 바로 작가들이 ‘시대성’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심각하게 재고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20~21세기의 ‘한국’ 미술사와 회화사의 경우에도 과거의 미술사에서처럼 시대성은 중요한 고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5. 기타
이밖에도 미술사에 편입되기 위한 조건으로 생존 작가이기 보다는 작고 작가일 것. 제작연대가 확실할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생존 작가의 경우에는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단정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생존에 따른 공평한 평가가 인간관계 때문에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작고 후에, 즉 역사적 인물이 된 경우에 미술사 편입 여부를 검토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제작연대도 절대 연대가 밝혀진 경우가 바람직하나 형편상 여의치 않을 경우 상대 연대도 가능하다. 특히 시대가 오랜 경우에는 더욱 불가피하게 상대 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어쨌든 연대를 확인하거나 단정할 수 없는 경우에는 역사에의 편입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Ⅲ. 맺음말
이상 소략하게나마 어떤 작가, 어떤 작품이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대강 살펴보았다. 첫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창의성’을 갖춰야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예술의 지상(至上)목표이기 때문이고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한국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또는 동의하기 어려운 입장에 있는 작가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한국성’을 외면했거나 경시했던 작가들로서는 더욱 동의할 입장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성’을 발현하지 않은 작가나 작품이 무슨 근거로 ‘한국’미술사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국제화된 시대의 미술이라고 해도 ‘한국’이라는 국명이 들어간 이상 한국의 미술사에 편입되려면 어떤 형태나 양태일지라도 ‘한국성’이 분명하게 구현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창의성과 한국성, 대표성과 시대성이 함께 갖추어진 작가와 작품만이 ‘한국’미술사에 편입될 티켓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보편적이고 평범한 미술, 창의성이 결여되어 있는 미술, 국적 불명의 미술, 아류(亞流)의 미술, 대표성 없는 미술, 시대성과 무관한 미술 등은 ‘한국’ 미술사에 편입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창의성, 한국성, 대표성, 시대성을 고루 갖춘 작가들이 많이 배출되어 ‘한국’ 미술사의 현대편이 두툼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 출처-석남 이경성 미수 기념 논총 『한국 현대미술의 단층』, (삶과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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