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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美]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6) 조속의 노수서작도

편집부

순간 포착의 예리한 시선으로 묘사 … 절제되고 가다듬어진 墨法

▲조속 作 노수서작도, 113.5×58.3㎝, 견본담채, 1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인물화보다는 나중에, 산수화보다는 앞서 발전한 화조화는 사생의 방법을 통해 사실적으로 꼼꼼히 그리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조속의 ‘노수서작도’는 구성과 기법, 묘사, 필치 등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조선 중기의 작가들이 그렇듯, 조속 역시 활발히 연구되거나 조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이 그림을 자세히 분석하여 그 뛰어난 점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마치 문틀을 통해 창밖 나무에 앉은 새를 보는 듯한 折枝翎毛 계열인 ‘老樹棲鵲圖’는 조선 영모화의 됨됨이를 대변하는 명화다. 비록 화면에 화가를 알려주는 도장이나 관지는 없으나 滄江 조속(1595~1668)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다.
大作으로 일견 수묵으로 보이나, 상세히 살피면 나뭇잎 등에 옅은 청색과 황색 등 부분적으로 담채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가지 위에는 까치와 박새(白頰鳥)가 각각 한 쌍씩 등장하여 여태껏 조속의 영모도들이 獨鳥나 雙鳥였던 것과는 다르다.
화면 네 꼭지를 연결한 교차지역 즉 화면 중앙에 위치한 까치는 머리의 방향만 반대 방향으로 돌린 점을 제외하면 一定型(화면 내에 나무에 앉은 까치를 측면으로 나타내되 머리쪽을 좌상단에, 꼬리를 우하단으로 하여 사선상에 몸통을 비롯해 일직선이 되게 포치시킨 것)에 가까운 형태다. 다른 새들과 달리 까치처럼 큰 새는 나란히 가까이 곁에서 서로 바라보며 짖는 예가 드물다.

‘노수서작도’에서 보듯 가슴과 배를 앞으로 드러낸 다른 한 마리는 자기를 향한 까치를 애써 피하려는 듯 눈의 방향과 달리 부리로 목덜미 아래 깃을 뒤지는 모습으로 나타낸 것이 자연스럽다. 이와 같이 깃을 뒤지는 동작은 까치들이 흔히 잘 취하는 동작으로 뒤에서 살피면 마치 졸고있는 새(宿鳥) 같아 보이나 이는 잘못 이해 한 것이다. 둘 다 입은 다물고 있어 눈동자만 빛나는데 서로의 따뜻하고 은근한 情이 십분 잘 나타나 있다.
까치를 바라보노라면 입을 마주 대고 있는 경우도 종종 목격할 수 있는데 그 보다는 부리를 다문 형태가 오히려 더 효과적이어서 함께 우는 여느 작은 새들의 二鳥和鳴과도 다르며, 이와 같은 모습에서 더욱 다정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역시 까치를 오래 주시한 다음 표현이 가능한 정경으로 화본 내에서 찾기 힘든 장면이다. 다만 一定型에서처럼 목을 세워 아직 울기 바로 직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까치의 장점이기도 한 소리가 없어 아쉬움으로 남는데, 이 점은 까치로 인해 이차적으로 시선이 모아지는 한 쌍의 또 다른 새로 인해 상쇄효과를 얻는다. 까치보다 작은 몸매로 좀 떨어진 가지에서 적극적인 몸동작과 부리를 벌려 和鳴하는 새와 함께 그려져 있어 차이를 보여준다. 순간의 포착은 예리한 시선으로 가능했으며, 사생에 기초해 화면구성의 妙와 사실성이 결합돼 이 같은 수작이 완성될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 새와 달리 나무의 이름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鵲圖에 있어 獨鵲은 조속 이후 梅枝에 그려짐이 일반적인데 비해, 雙鵲은 조선말기를 제외하곤 매지에 깃들게 나타낸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즉 조속 그림의 나무는 일견 미루나무나 포플러처럼 보이나 17세기에는 그러한 외래 수종은 우리 강토에 없었다. 꽃이 진 뒤 잎이 난 梅로 볼 수도 있겠으나, 확신하긴 어렵다. 몰골로 나타낸 老樹는 우측 화면밖에 본 줄기가 있어 화면 우에서 좌로 상하 고루 자연스레 퍼져 있으며, 화면에 고루 적당히 전개된 배경의 나무가지들은 화면 구성의 묘를 더한다. 또한 화면 안과 밖을 넘나들며 직각으로 꺾이고 갈라지는 가지의 선이 화면을 골고루 분할하며 채우고 있다. 용필의 능숙함은 붓을 측면으로 뉘어 빠른 속도로 찍어나가듯 나타낸 역삼각형의 잎들과 줄기의 전개에서 확연히 알 수 있다.
‘노수서작도’의 그동안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를테면 “한국지성인이 조촐한 색채감각과 그 호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본보기”(최순우)라던가 “30대 긍지에 차 있던 시기의 활력있는 그림”(최완수)이라는 평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모자이크 식으로 그려진 세모꼴의 나뭇잎 등에서 명대 임량의 영향이 느껴진다”(홍선표)라는 말에서 보듯이, 사실 ‘노수서작도’는 기본적인 화면구성과 필치 등에서 중국 명대 초기에 활동한 임량(1416경~1480)의 영향을 일부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임량 등 절강성에서 활약한 일군의 직업 화가들의 화풍상의 특징은 산수가 인물 등장을 위한 무대처럼 小景이며, 강한 흑백 대조, 거친 필치, 동적이며 어수선한 분위기 등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닮은 산수가 조선 중기화단의 문인화가들로부터 시작돼 크게 유행했는데, 조속의 영모나 묵죽의 배경처리, 그리고 식물소재의 선택 등에서 임량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속은 나름의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텐데, 단적으로 훨씬 빠른 속도감으로 묵법을 구사하는 임량에 비해 조속의 묵법은 더욱 절제되고 가다듬어져 있음을 들 수 있다. 특히 가지와 잎의 표현에서 그런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이암 作 모견도, 73.2ⅹ42.4㎝, 종이에 담채, 조선 전기, 국립중앙박물관. ©
물론 조속 외에도 조선시대에는 화조화 가운데 명화가 적지 않다. 남다른 미감과 특수성을 보여줬던 것에서 이암의 ‘母犬圖’가, 대표성에서는 김홍도의 ‘호랑이’가, 그리고 우리 산천을 배경으로 한 새 그림들에서는 장승업의 ‘豪鷲’가 돋보인다. 초기 화단의 이암(1507~1566)의 개 그림이나 중기의 김시(1524~1593)나 이경윤(1545~1611) 가문의 물소(水牛) 그림은 다른 나라의 동일한 소재의 그림과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특히 이암의 ‘모견도’는 일찍이 안휘준 교수가 “인류가 남긴 개 그림 중 가장 품위 있는 그림”이라 지칭했듯 어질고 푸근한 눈매의 어미와 마냥 천진한 강아지가 취한 자세에서 강한 모성애가 감지되는 등 ‘우리적’인 정취가 짙다.
그러나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과 작품의 됨됨이인 완벽성 등 여러 측면을 두루 살핀다면 조속의 ‘노수서작도’를 대표적인 화조화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암의 ‘모견도’는 동화적이고 따듯한 분위기의 그림이지만 餘技性이 짙고, 대담한 화면 구성과 활달한 필치, 전체적인 완숙미 등에서 ‘노수서작도’가 격조를 보여준다 할 수있다.
조속이 영모, 매, 죽, 산수에 능했다는 문헌들의 기록대로 현존하는 그의 작품은 영모화, 묵매화, 산수화 등 다양하지만 그중 영모화를 가장 많이 그려 영모화가로서의 위상이 높다. 17세기 화단에서 크게 주목받은 士人畵家인 조속은 그러나 화면에 자신의 款署 남기기를 기피하여 작가의 款印은 없으나 모두 傳稱作이 아닌 眞蹟으로 간주됨이 통설이다. 부친에 이어 묵매와 영모화에 이름을 얻은 아들 조지운(1637~1691)과 달리 낙관을 하진 않았으니 ‘滄江’의 묵서가 있는 수작들 역시 後款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조선 중기에 속한 화가들처럼 조속 역시 유작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드물게 산수화도 몇점 남겼는데, 그 가운데 물가 풍경을 담은 ‘湖村煙凝’은 북송 米이 창안한 붓을 옆으로 뉘여 가로로 쌀 모양의 점을 찍는 米點을 다른 화가들보다 일찍 사용한 점에서 돋보인다. 이는 후에 정선이 진경산수에서 우리 산천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기법으로, 조속이 진경산수의 선구자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2006 Kyosu.net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출처-교수신문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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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日 화조화와의 비교
새보다는 ‘꽃’ 중심인 중국 … 일본, 화려함의 極値
중국은 용, 우리나라는 호랑이 등 나라마다 선호하는 동물이 달라 그림도 이에 영향을 받는다. 방대한 영토에 긴 역사를 지닌 중국은 일찍부터 문화전반에 있어 두루 앞서니 그림도 마찬가지다. ‘芥子園畵傳’ 등의 畵本이나 현존하는 그림을 살필 때 동양에서 즐겨 그려진 새는 상상적인 봉황, 주작, 난조, 학, 매, 해오라기, 물총새, 메추리, 꿩, 박새, 제비, 참새, 구욕새, 까마귀, 공작 등이다.
중국에 있어 화조화는 화려한 채색으로 그린 섬세하고 장식성이 강한 직업화가의 工筆과 문인들이 수묵담채 위주로 여기로 그린 사의적인 그림 등 두 계열로 나뉜다. 그 중 전자에 속하는 작품을 살펴보면, 명대 중기의 왕유열의 ‘쌍희도’를 들 수 있다. ‘쌍희도’라는 제목의 그림은 다수가 전해지는 가운데 왕유열의 것은 화려한 채색으로 중국적 화조화의 한 특성을 나타낸다.

▲王維烈 作 雙喜圖, 지본채색, 118.7x63.1cm, 17세기, 대만 고궁박물원. ©
청대 황월에 의해 붙여진 화제 “歲朝徵吉例題圖 / 披繪心祈嘉應符/ 河復工成雙報喜 / 兆民樂業寸懷愉 / 御題王維烈雙喜圖 / 臣 黃鉞 奉勅敬書(새해 아침 길조 부르려 의례껏 그림에 시를 쓰나니 / 그림 펼쳐보며 마음으로 좋은 감응 있기를 기원하노라 / 河復이 그림 완성하여 한 쌍으로 기쁨 알리니 / 억조창생 즐거운 일로 모든 마음 즐거우리 / 왕유열의 쌍희도에 황제가 시를 짓고 / 신 황월이 칙명을 받들어 공경히 글씨를 쓴다)”를 보면 중국에서도 까치가 길조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속의 ‘노수서작도’와는 달리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眞彩로 그려진 붉은 동백과 화려한 매화이다. 즉 조속이 꽃을 배경으로 삼아, 까치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면 왕유열의 그림은 꽃이 중심이 되고 까치는 그 배경으로 비쳐질 정도다. 게다가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도 시선을 분산시키는 감이 있는데, 이는 장식이 많아 화려함을 강조하다보니 그러한 것이다.
▲狩野山樂·山雪 合作 花游禽圖,101.9x183.5cm, 금지채색, 京都 妙心寺 天球院, 후스마(西). ©
일본 역시 채색화가 발달했지만 중국과는 다른 양상이다. 특히 모모야마시대(1576~1615)에는 이전 시대와 다른 새로운 건축양식에 의해 장식화가 출현한다. 일본 도처에 거대한 성이 건립됐고, 天守閣이라 불리는 거대한 석축 위에 전각을 세웠으며, 이들 건축의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산수, 고사인물, 노송, 단풍, 모란, 화조, 초충 등을 소재로 한 障屛畵가 왕성하게 등장하며, 16~17세기에 전성기를 이뤘다.
그 중, 모모야마 양식의 끝을 장식한 카노 산라쿠(1559~1635)가 나이 70이 넘어 양아들 산세츠(1590~1651)와 함께 그린 ‘花遊禽圖’를 보자. 우선 큰 건물 내부를 구획하는 미닫이, 즉 후스마와 병풍 그림인데, 커다란 화면에 대담하고 힘찬 필치가 돋보인다. 금지에 과장된 매화나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는데, 나뭇잎이 화려한 붉은 색으로 표현돼 사실성과는 거리가 있다.
매화나무 아래 위치해 있는 푸른색의 나뭇잎 역시 화려함을 자랑한다. 화면 오른쪽에는 괴석 위에 꿩이 앉아 있는데, 일본에서는 섬나라인 까닭에 실제로 까치가 드물어 중국이나 한국처럼 까치가 그림의 소재로 택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꿩은 그 자체가 가장 화려한 색을 띠고 있는 조류라서 이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진다. 일본 화조화의 화려함 때문인지, 이들에게 중국 그림은 수묵담채로 그린 그림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 화조화를 중국이나 한국과 비교할 때 때론 경직되고 형식화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원복 (국립광주박물관장)
출처-교수신문 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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