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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남준과의 가상 인터뷰비디오

김종길


故 백남준과의 가상 인터뷰비디오
_철물점 아저씨와 나눈 잡담 “예술가라면 애국자가 되지 말고 사기

글 ㅣ 김종길


간혹, 심사가 뒤틀리면 <서른 즈음에>란 노랠 부르곤 하는데, “작기 만한 내 기억 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라며 흥얼거리는 것이다. ‘서른’은 마치 청춘의 건널목 같지 않은가. 그는 서른에 무엇을 했을까. “1961년이군. 그해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있었던 일이야. 제로그룹의 오프닝에 갔는데, 눈초리가 사나운 이상한 중년남자가 ‘파이크Paik’하고 불렀지. 그 사람이 요셉 보이스야. 그리고 그해 어느 때, 마키우나스가 플럭석스를 조직한다는 편지를 보냈어.” 무명인 백남준은 그해에 ‘일생에 가장 중요한 만남’이 되는 예술가들과 조우했다. 그 자신이 회고하듯 그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희귀한 때였다. 특히 요셉 보이스는 그의 가슴을 뛰게 한 인물이었다. “그의 깊고 매서운 눈초리를 잊을 수가 없어. 그 기인에게 어떻게 나를 알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걱정이 ‘떼’로 지나가곤 했지.” 그러나 그의 모습을 본 이라면, 특히나 동양인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 젊은 사내의 행색은 너무나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키는 작고, 머리칼은 보리밭처럼 삐죽 서 있는데다 겨울에는 샌들을 신고, 눈 밑까지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뿐인가, 누구에게나 ‘할로’ ‘할로’ 하면서 인사를 건네는데, 겸손해 보이긴 해도 영어와 독일어를 일본어처럼 구사했기 때문에 거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튀는 인상이 폭넓은 교우관계를 형성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한국 속담으로 요약한다. ‘원님 덕분에 나팔 분다’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라고.“난 천부적 재능은 없어. 친구들을 잘 사귀었을 뿐이지. 플럭석스의 녀석들이 다 유명해지는 바람에나도 덩달아 유명해진 거야.”
돌궐의 제상 톤유쿡의 비문에는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요,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백남준은 비문은 남기지 않았고 1992년에 유언장을 적어 놓았다며, “첫째, 나는 당뇨가 있으니 죽기 전에 안락사가 보장되는 암스테르담으로 보내 달라. 둘째, 내가 죽고 나면 작품 값이 많이 올라 수익금이 많을 테니 그 중 50%는 국제사면위원회에 주라”는글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해에 작고한 존 케이지를 회상했다. 존 케이지 추모글을 통해, 게임에서 이긴다는 것은 그 게임의 룰에 복종해서 이길 수도 있지만, 그 룰 자체를 변경해서 이길 수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면서 추신에 “왕생…그는 삶으로 돌아갔다”고 적었다. 돌아갔다니?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언젠가 그는 마르크스 때문에 가족을 떠났다고 했다. “그건 별말 아냐. 가족을 떠났다는 건 집 버리고 여행 떠났다는 얘기가 아니야. 우리 아버지가 장사꾼인데 아주 부자였어. 그러니까 마르크스 덕분에 내 인생이 장사꾼 인생이 안 되었다는 얘기지.” 그렇다면 혹 맑시스트였나? “그때 지식인 행세하려면 마르크스 배지 안 달면 축에도 못 꼈어. 모든 지식인이나 돈 많은 집 자식들의 허영이었지.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유 이념이 내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어. 보편주의랄까. 그런 게 마르크스의 사상에는 있잖아. 내가 예술에 있어서 민족주의를 일찍 탈피한 것도 좀 관계가 있을지 몰라.” 민족주의의 탈피라니, 궁금했다. 그렇다면 ‘민족’은 중요하지 않거나 사라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것 같지는않아. 내셔널리즘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어. 당분간 역시 인류사에는 민족사적 가치가 유지될 것이라고봐. 따라서 예술도 따지고 보면 보편적이 아니지.” 그렇다면 그가 말한 ‘민족주의’는 순혈주의식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이라 봐야 할 것 같다. 어떤 이는 말했다.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사람이 왜 그렇게 한국적 모티브를 많이 쓰냐고. 그랬더니, “한국은 애국자가 많아서 망하는 나라야. 애국자가 없어서 걱정해 본 적은 없는 나라지. 될 수 있는 한 애국자가 되지 말아야 해!”라며 쏘아붙인다. 이 말은하나의 역설처럼 메아리친다. 기실 한국의 많은 애국자는 ‘위험한 상상력’ 따위를 꿈꾸지 않는 이들이다. 맹목적 국가주의에 길들여진 ‘애국’의 이름이 얼마나 많은가.
백남준은 과거로 향한 신화적 영토의 전통성에서 흥미를 유발했다. 특히 몽골을 좋아하는데, 유목민임에도 3천 년 전 문화와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에 놀라워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국제적으로 팔아먹을 수 있는 예술은 음악, 무용, 무당 등 시간 예술뿐이라 며, 이것을 캐는 것이 인류에 공헌하는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즉,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유목민이었으며, 유목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줘도 가지고 다닐 수가 없는데, 무게가 없는 예술만이 전승되고 발전할 수 있기때문이란다. 그래서그도 유목하기를 즐겼다. 마르첼라 알리슨은 “백남준은 언제나 돌아다닌다. 그는항상 다음 행선지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여행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아무리 피곤해도 우선 비행기 시간 안내서를 훑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말한다”고 회고하지 않았던가.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 영감의 비밀이 궁금했다. “그건 직업적 비밀인데 어떻게 말하나!”라는 농담을 던지면서 우리 민족은 『삼국유사』가 대변하듯 판타지가 대단한 민족이기 때문에 그런 판타지를 죽여선 안 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민화의 컬렉션이나 해석에 있어서 아직도 일본이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는 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릴 적 고향에서 공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고향에서 공부할 당시 받았던 수업이 후일 예술 경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얘기하면서 즐거워했다. 여행은 자신이 떠나 온 곳을 새롭게 반추하고 재인식하게 하듯이 백남준 또한 고향을 떠난 이후 ‘한국’에 대한 재인식이 끊임없이 맥놀이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남자가 시끄럽게 뚱땅거리며 악기나 다뤄서는 못 쓴다며, ‘상과’에 가서 경영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꾸지람했다. 누이 백영득은 동생 백남준이 아버지의 눈총도 많이 받았지만 어리광이 심했고, 지금도 그때의 어리광부리는 버릇이 남아 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랬지. 난 원래 어리광쟁이로 자라서 그저 그때하고픈 일을 그냥 해. 그러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단 말이야.” 그렇게 자라 동경대 미학·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가족 통신문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아버지는 “그 녀석이 환쟁이가 되었단 말이냐!”를 되풀이하며 앓아 누웠다.
백남준에겐 다면적 성질이 존재한다. “일본은 약지만 위대한 힘을 갖고 있지. 한국은 우직하고 세련되지 못한 반면 피같이 진해”라고 말하듯이 소년기를 보낸 한국과 청년기를 보낸 일본, 그리고 성년기를 보낸 독일을 비롯한 서구라파, 말년기의 미국 생활이 그것을 증명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발아한 문화적 이중성은 그가 “오사카 성에서 한바탕 무당춤이나 추어볼까”라고 얘기할 때 극명하게 다가온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백남준’이라는 한 예술가의 사유의 근원은 한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적 역사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유목적 사유와 삶이며, 스스로 샤먼이기를 꿈꾸었듯이 그의 예술도 음악, 미학, 미술사, 퍼포먼스, 헤프닝, 설치, 영상, 레이저를 비빔밥처럼 혼재시킨 신명의 굿판과 다를 게 없다. 프레드릭 제이미슨은 “백남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가장 징표적 인물의 하나인 동시에 가장 원초적인 무당으로서 문명 이전과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를 연결하는 통시적 예술가”로서의 기질을 읽지 않았던가. 어느 큐레이터가 “당신의 작품을 보면, 흥분하게 되고 희망에 차게 되고 황홀한 느낌에 빠진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면 좀 고독하게 느껴진다. 별로 남는 게 없다”고 했다. 그는 “가장 좋은 질문이다. 참 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앞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한국에서 신화적 인물이다.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에서는 내가 너무 과대평가 되어 기대가 컷을 뿐이야.” 하지만 1994년 독일 「캐피털」지가 선정한 세계 5위의 작가가 아닌가. “우리나라는 올림픽과 예술을 혼동하고 있을 뿐이야.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일등을 매기는 게 예술이 아냐.”
백남준 가족의 여성들인데, 앞줄 검은 갓을 쓴이가 백남준의 어머니이다. 사진을 판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작업실 풍경 사진에서 궁색한 삶의 현실이 느껴진다. 마치 주인없는 비디오 철물점처럼 을씨년스럽다. 너무나 화려하게 수식당한, ‘분식’예술가 백남준의 삶과는 맞지 않는 몰골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것이 원래의 백남준일 터이다. 왜 우리는 인간 백남준보다 너무도 멀리 와서 그를 본 것일까. 예술가 백남준도천천히 걸어왔을 뿐인데 말이다. 우리가 ‘예술’이라 부르고 있는 것에 너무도 충실했기에 그가 위대한 것이라면 한국 예술계는 다 가짜들만 판치고 있단 말인가! 그는 나지막이 들려준다. “작가란 방세하고 밥값하고 작업비만 나올 수 있으면 돼. 여태까지 내 생활은 그 수준이었어. 원래 예술이란 반이 사기야. 속이고 속는 것이지.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란 말이야.”이제 사기도 칠 수 없고, 흔적도 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사라질 것인가. “유치원 다닐 때는 굉장히 부잣집이었어. 내 방엔 그림책이 방에 가득했지. ‘고오단샤(講談社에서 출판한 그림책)’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구. 난 방바닥에 잔뜩 펼쳐놓고 보는 걸 좋아했어. 그러다 한 권을 골라 뒷산 바위로 올라갔지.누가 날 부르기 전까지 그렇게 노는 거야.” 백남준과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김종길 | 1968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으며 월간 『미술세계』를 통해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경희대 대학원에서 문화예술경영학을 전공했다. 모란미술관 선임학예연구사를 역임했고, 「최병수의 행동주의 실천미학과 환경미술론」으로 2005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평론공모 평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전문위원이다.

출처-기전문화예술 2006. 3ㆍ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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