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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수남_“큰 박수,사진 박수님 오셨네!”

김종길

글 ㅣ 김종길

작년 11월, 김수남은 그가 만난 열한 명의 예인들에 관한 일종의 사진회고록인 『아름다움을 훔치다』(디새집)를 출간했다. 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선 1993년 20권으로 완간한 『한국의 굿』을 다시 한 권으로 엮은 『굿, 영혼을 부르는 소리』(열화당)가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지금 양평 갤러리 와瓦에선 여섯 번째 사진굿인 <한국의 굿:만신들 1978-1987>을 펼쳐 놓고 있다. 책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그의 사진굿을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이다. 전국의 주요 굿판을 담은90여 점의 작품이 갤러리 전관을 차지하고 난장을 펼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야말로 굿판이 따로 없다.

성북구청 앞 여성중앙회관 4층, 사진작가 김수남의 작업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신발장 위에 동파문자 액자가 놓여 있다. 동파문자는 중국 윈난 성의 소수민족인 여강 나시 족들이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상형문자이다. 동파는 무당의 다른 이름이며, 종족의 제사장이다. 즉, 동파는 무당이며, 무당의 언어요, 문자이다. 1997년, 여강을 방문했을 때 그곳 민족박물관에서 직접 받았다 한다. 한국의 굿에서 아시아의 굿으로 확장된 작품세계를 따라 그의 발길은 8백 년 역사의 고성까지 가 닿은것이다. 지금도 이곳은 몇 번의 비행기와 버스, 혹은 택시를 타야 갈 수 있는 깊고 오래된 도시이다. 작년 여름, 그곳을 찾아 나시 족의 문화를 체험했던 필자의 기억 때문인지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방은 넓은 둥지로 변한다. 디귿자 모양의 방인데, 입구가 디귿자의 한쪽 끝이다. 벽을 두고 맞물려 있는 다른 쪽은 서재이자 필름 자료관이다. 두 끝을 사이에 두고 방이 있는 셈이다.그 한쪽에 오죽烏竹이 서 있다.
큰 화분에 심어놓은 오죽 몇 그루가 천장을 칠 만큼 웃자라 있는 게 아닌가. 일년에 절반은 아시아 오지를 누비는 그의 빈방에서 꿋꿋이 살아 검은 살결을 빛내고 있는 오죽이 마냥 신기했다. 30년 넘게 굿판을 떠돌며 40여 권의 사진집을 엮어낸 그의 이력을 알 만하지 않은가.
지난밤, 벗들과 밤새 곡주를 들이켰다며 멋쩍어하더니, 얘기가 시작되자 눈망울만은 또렷해졌다. 그의목소리는 낮고 느리지만 우렁차다. 말에 서두름이 없어 귀가 또박또박 새겨듣는다. 또한 몸짓은 담박하고 얼굴은 구수했다.
황해도 출신의 큰 만신(‘무당’의 황해도 말) 김금화는 굿판에 김수남이 나타나면, “큰 박수(남자무당), 사진 박수님 오셨네”라며 반가워했다. 사진기 하나 들고 신들린 굿판에서 울고 웃으며 ‘사진굿’을 떠내는 그가 영락없이 무당이 아니었겠는가. 혹, 접신이라도 해보았을까?
“없어! 없어요. 안 들어 오드라구. 그런데 말야,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고 하면, 머리 위에서 다시 굿판이 벌어져. 방울 소리, 노래 소리, 울고 웃고 소리치는 그 굿판이 생생하게 펼쳐지는 거야.”
하지만 굿학회 김인회 회장 또한 김수남을 큰무당이라 치켜세운다. 단지 방울과 부채 대신에 사진기를들고, 공수를 내리는 대신에 셔터를 눌러 자기가 본 것을 형상화하는 게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그가 굿에 미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정희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전국의 굿을 미신이라며 못하게 막았어. 기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사진을 찍다가 화전민들 사는 곳과 섬을 가봤지. 전통 그대로의 굿을 간직하고 있더란 말이야. 그래서 굿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기로 결심한 거지. 문제는 무당들이 사진 찍는 걸 못하게 해. 정권이 탄압하던 시절이니, 자기들을 잡아 가두기 위한 증거자료가 아닌지 의심하는 거야. 또, 자식들한테는 부모가 무당이라는 사실이 사진을 통해 알려지는 게 싫은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마을 사람들, 무당들과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했어. 그렇게 하다 보니 굿이 단순하지가 않아. 전라도 굿, 평안도 굿, 경상도 굿, 경기도 굿이 다 달라. 책과 논문을 구해 읽으면서 굿을 공부했어. 나중에 알고 보니 굿판에서 만난 이들이 다 그 연구자요, 교수인 거라. 그러면서 어떤 신화는 어떤 무당이 잘 아는지, 더 많은 능력을 가진 무당이 누군지 알게 되었고, 그들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은 거야.”
이것이 그가 황해도 내림굿, 옹진 배연신굿, 제주도 영등굿·무혼굿·신굿, 경북 강사리 범굿, 경북 수용포 수망굿, 평안도 다리굿, 전라도 씻김굿, 충남 은산 별신굿, 황해도 지노귀굿, 경기도 양주 소놀이굿, 경기도 도당굿, 동해안 별신굿 등을 찾아 전국의 굿판을 떠돈 이유이다. 헌데, 보다 분명한 이유는 신병 아닌 신병을 앓은 뒤부터라고 해야 옳다.
“1980년, 전두환이 등장했잖아. 그해 4월에서 8월까지 병원에 있었는데, 이때 기자들 많이 짤렸어. 할 수 없이 지팡이 짚고 출근했지(당시 그는 동아일보 기자였다). 몸이 많이 안 좋았어. 그래서 기도하며 빈 거야. 3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그러면 그 동안에 다 마무리하겠다고 말이야. 1980대 초반 작품이 많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야. 죽어라 전국을 누볐지. 그런데 3년이 지나도 죽지 않더라구.”
3년이 지나자 이후의 삶은 덤으로 느껴졌다. 기자생활을 접었다. 그리고 그 동안 기록한 사진들을 정리하기로 결심한다. 이 사진들이 10여 년에 걸쳐 1993년 20권으로 완간한 『한국의 굿』 시리즈이다. 김수남 하면 굿이요, 굿 하면 김수남이게 만든 책이다.
“사표를 내고 나왔지만, 객원 편집위원으로 얼마간은 일을 했어. 그렇게 나오니 날아갈 것 같지 뭐야. 하지만 소속이 없으니까 난감해. 그래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 남는 건 시간밖에 없으니까. 우선 미륵에 관해 찍자고 결심했는데, 사회 속에서 미륵은 아주 중요하잖아. 후삼국, 궁예도 미륵을 자청했고. 물론 석가 이래의 미륵세상이 보편적 사상이지만. 근데, 시골에 가면 불상도 미륵, 장승도 미륵, 온통 미륵이라 불러. 그래, ‘미륵은 혁명 정신이야. 이걸 사진으로 담자. 동학 100주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까지 찍자.’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책으로 묶질 못했어. 광주 송기숙 선생이 이 얘길 듣고 나중에 같이 하자고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켰어.”
『한국의 굿』 시리즈를 묶어나가던 그는 점차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때가 1988년이니 아시아 담론이 활발해진 요즘 생각해 보면, 빨라도 한참 빠른 생각이다. 그의 생각에 불을 당긴 것은 일본 게이오대 노무라 신이치野村伸一 교수였다. 동갑나기인 그는, 1981년 은산 별신굿 현장에서 만나 2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오고 있다. 그 또한 한국의 굿을 보기 위해 전국을 누볐던 인물이다. 김수남은 일본을 시작으로 미얀마에 이르기까지 아시아 전역의 오지를 찾아 나섰다.
“미얀마에 가면, 내 이름이 ‘고지조’야. 고지조는 그 나라의 무속 신인데, 신이 되기 전에 고지조는 술, 여자, 노름을 좋아했어. 술을 하도 좋아해서 부인인 공주를 팽개치고 양조장집 딸하고 결혼한 거야. 취해서 쓰러져 자고 있으면 동네 여자들이 챙겼다고 그래. 화가 난 공주는 자신의 머리칼 수만큼의 남자하고 놀아났지. 나중에 ‘망외동’이란 여신이 되었어. 고지조는 후에 일확천금의 신, 바람기를 보호하는 신이 됐어. 미얀마에서 촬영하면서 워낙 술을 좋아해 많이 마시니까, 나를 고지조라 부르지 뭐야.”
하지만, 이런 환영을 받기까지는 숱한 고초도 겪어야 했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발했던 때에 그는 중국 윈난 성의 대리를 향했다. 비자 받기도 힘들었던 시기였던지라 한국인이 중국의 외딴 지역을 여행한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결국 그는 간첩혐의로 끌려가 재판을 받아야 했다.
“한 달동안 촬영한 필름을 다 빼앗겼어. 사실, 아무리 살펴봐도 간첩으로 몰릴 만한 증거가 없잖아. 헌데 말이야. 그때가 섣달 그믐날이 되어가고 있었거든. 이네들은 한국처럼 명절을 잘 지키잖아. 별 증거도 없고 설도 다가오고 하니까. 약식재판을 하고 벌금형을 때리드라구.”
그는 20년을 계획했다. 20년 동안 아시아를 찍겠다는 발상에 다들 코웃음을 쳤지만, 벌써 18년이 되었다. 중국, 인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 러시아, 스리랑카, 태국, 네팔, 미얀마의 작은 마을들이 그가 찾은 현장이었다. 그렇게 17년을 지냈고, 18년째인 올해는 몸이 좋지 않아 가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마신 보드카 때문에 꼼짝을 못하고 지낸 것이다. “ 술을 2년 전에 끊었어. 최근, 인도에 갔는데 이곳 사람들은 술을 먹지 않아. 굿의 공통점이 있다면, 술이 필요하단 거야. 이곳에서도 굿을 펼치려면 술이 필요하지. 꽃으로 만든 술을 빚어서 먹드라구. 그걸 보면서 생각했어. 내가 왜 술을 끊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서 작년에 보드카를 먹어버렸지. 그게탈이 나서 올해는 이렇게 쉬고 있잖아.”
굿판의 현장 동지인 김인회는 천대받으며 힘들게 살아온 무당들이나 예인들, 산골이나 어촌의 민초들 삶의 상황과 정서 속으로 자기가 먼저 빠져들고, 정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사진작가 김수남의 모습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그가 굿만 고집한 건 아닐 터.
“사람들은 나를 두고 ‘굿 찍는 사진작가’라그래. 굿이 사람들한테 참 강력한 인상을 주나봐. 하지만 내 사진의 주제는 전체로서의 삶이야. 통과의례, 세시풍속 등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정월 초하루에서 섣달 그믐날까지 전부 찍어. 굿을 찍지만, 파생되는 작은 주제들이 많아. 재작년, 생명문화포럼에서 사진전을 했는데, 전시주제가 ‘모두가 다 예술가’ 이런 거였어. 아시아 오지를 돌아 다녀보니 따로 예술가가 있는 게 아니야. 모두가 예술가야. 20년간 골고루 찍었지. 사진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야. 짧은 시간에 다 찍을 수가 없어. 발표를 서두르지 않으면 되는 거야.”
어떻게 찾았을까, 그 많은 아시아의 오지마을을. 아니, 그 나라에 간다고 해서 사진 찍기를 기다려주는 현장이 늘상 있단 말인가.
“일단 어느 도시든, 마을에 들어가면 시내버스 정류장을 찾아가지. 정류장을 돌면서 묻는 거야, 장례식이 어디냐고. 큰 도시는 관 만드는 곳을 찾으면 돼.”
앞으로 남은 2년은 다 채울 것이라 말했다. 그 후는 무얼 계획하고 있을까.
“내 꿈이 하나 있지. 평생 동안 당대 최고의 예인 50여 명을 찍었는데, 이들을 기리는 기념관, 아니 미술관 같은 게 있었으면해. 전시장에 이들 사진을 다 걸어두고, 그 제자들과 돌아가면서 노는 거야. 스승이 보는 앞에서 그 제자들이 펼치는 ‘예’를 보는 것이지. 진짜 난장이 펼쳐지지 않겠어. 박제가아닌 살아 있는 예술의 현장을 만드는 것, 그거야.”
그를 만나러 가기 전, 『아름다움을 훔치다』를 구해 읽었다. 10여 년 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가 좋아 CD음반을 구해 즐겨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책에 성금연편이 실려 있어 반가웠다. 책장을 넘기다 눈에 익은 사진이 들어왔다. 덧붙이는 글을 보니, “눈물이 진주라면 모아놓았다가 너희들한테 나눠줄 수가 있겠지만, 흘린 눈물은 자국도 없어지며 남길 것이 없어 가야금에 옮겨보니…, 줄 것을 가야금 소리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보아라”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성금연이 딸 지성자에게 가야금을 타며 들려준 얘기라는데, 두 모녀가 연주한 CD 중에 <눈물이 진주라면>이란 타이틀의 CD가 있었다. 촌스런 타이틀이라며 자주 듣지 않았던 CD가 그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 얘기를 하자 사진도 자신이 찍은 것이라며 그 오래된 CD를 찾아 보여주었다.
“어느 때인가, 성금연 선생과 식사를 했어. 술도 한 잔 했지. 그러다 선생께 권주가를 청한 거야. 그냥, 술김에 청한 건데, 노래를 불러주겠다는 거야. 가져간 녹음기를 꺼냈더니, 녹음기를 마이크처럼 들고 노랠 불러주었어. 아직도 생생해.”
책에 밝힐 수 없었던 개인사적인 기억과 인연을 더듬으며 들려준 한 토막이다. 아쉬운 마음에 운학 이동안 선생 만난 얘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화성 재인청 출신의 예인인 아버지 이재학의 재능을 타고난 이동안 선생은 열네 살에 재인청 뜬쇠들로부터 춤과 반주음악을 익히고, 후에 그 당시 춤의 명인으로 이름난 김인호에게 춤을, 박춘재에게 발탈을, 그리고 김관보에게 줄타기를 배운 최고의 광대였다.
“이동안 선생은 구한말에 태어나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전쟁을 겪으며 몸이 움직일 수 있는 한 끝까지 광대의 삶을 산 진정한 광대야. 춘하추동 백구두를 신고 철 따라 모자를 썼지. 키는 작달막한데, 떡 버티고 서면 큰 바위인 양 춤판이 꽉 차서 ‘춤집’이 컸던 양반이구. 참말로 한량이지.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만났어. 보는 순간, 딱 이동안이야. 그래서 셔터부터 눌렀지. 모자에서부터 두루마기, 구두까지 온통 하얀색이야. 고맙단 생각을 했어. 오래 살아 서 이렇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고맙지뭐야. 헌데, 그게 마지막이었지.”
그의 눈가에 눈물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다음 책에 대한 구상은 무엇이냐며 말길을 돌렸다.
“미륵이야. 정리하려고 했던 것을 이제야 마무리 지을까 해. ‘혁명의 신, 미륵’ 뭐 이런 제목인데,여러 전문가 필진이 글을 쓰고 미륵을 담는 거야. 금산사, 법주사, 운주사를 돌며 이미 오래 전에 다 담아놨어. 그것들을 다시 꺼내서 묶을 거야.”
김종길 | 1968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으며 월간 『미술세계』를 통해 평론활동을 시작했다. 서울시립대학교 환경조각학과, 경희대 대학원에서 문화예술경영학을 전공했다. 모란미술관 선임학예연구사를 역임했고, 「최병수의 행동주의 실천미학과 환경미술론」으로 2005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평론공모 평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본지 전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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