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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 고유섭 탄생 100주년 기념 국제학술심포지엄_차이를 보고 근대의 '그늘'을 벗어라!

김종길

글 ㅣ 김종길·고영직

해석의 ‘차이’를 알게 되다 “창조의 고苦, 출산의 고苦는 날로 깊어간다. (…) 재료의 수집이 제1의 난관을 이루고 있고, 차술한 방법론적 고민이 제2의난관을 이루고 있으며, 다시 제3의 난관이 있으니 그것은 미술사의 (근본)배경을 이룰 토대사의 획득난이다. (…) 오히려 메피스토에게 끌려가는 파우스트의 고민상이 나의 학난學難의 일면사라고나 할까?”라며 조선 미학미술사 연구의 어려움을 토로했던 우현 고유섭. 그는 한국 근·현대 미학미술사의 근대적 연구와 학술체계를 정립해 그 뿌리가 되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인천문화재단은 <동아시아 근대 미학의 기원-한·중·일을 중심으로>(8월 12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번 심포지엄에는 장파 중국인민대학 교수(주제:중국 근대미학의 발견과 형성과정)를 비롯해 국제미학회장을 역임한 사사키 겡이치 동경대 명예교수(주제:일본 근대미학의 발견과 형성과정), 그리고 일본의 독도 양심으로 화제를 일으킨 바 있는 다카사키 소지 일본 쓰다주쿠 대학 교수(주제:아사카와 다쿠미와 야나기 무네요시가 바라본 한국의 미학)가 발제자로 나섰다. 그리고 김임수 계명대학교 교수, 이인범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수석연구원 등이 참석해 우현의 미학과 한국미에 대한 고찰에 대해 주제발표를 했다.


그동안 우현의 고향 인천에서는 그를 기려 추모비를 세우고 학술제를 기획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국제규모의 행사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또한 국내적 관점의 한계에 머물르고 있는 우현연구에서 좀 더 나아가 동아시아 미학의 근대적 유입과정의 틀에서 조망함으로써 근대기 ‘미학美學’수용과정에서 비롯된 ‘해석의 차이’에 대한 역사적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동아시아 삼국의 지속적 연구교류가 필요한 시점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인물을 기념하고 추념하는 자리에서의 지나친 의미부여가 학계에 만연된 풍토일텐데, 이번의 심포지엄은 오히려 서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미래지향적 교류의 토대를 과제로 남겨 놓은 매우 의미 있는 자리였던 셈이다.

한편, 심포지엄이 끝나고 ‘한국미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의 생애와 연구자료 展’이 개최되었는데,우현의 육필 원고와 저서들의 초판본, 사진과 동영상 자료 등으로 꾸며졌다. 특히 이번 전시에는 우현의 제자인 황수영 박사(前 동국대 총장)가 동국대 박물관에 기탁 보관해 오던 사료들이 일반인에게 최초로 공개됨에 따라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천여 점에 달하는 탑파, 건축, 공예, 회화 등의 다양한 원본 사진자료들 중에서 약 200여 점을 엄선하여전시한 이번 전시자료는 육필 원고 등과 더불어 좋은 연구자료가 될 터이다.


전국 각지를 돌며 탑파 연구를하던 시절. 그는 우리 탑파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분석한 미술사연구를 시도했다.


‘근대’라는 그늘 벗기기 1905년 인천 용리에서 태어난 우현은 근대기 최초로 미학과 미술사를 연구해 왜곡된 민족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이인범에 따르면 우현의 예술과 조선미술사를 향한 충동이 “나라 잃은 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의 자기 존재 증명에 대한 관심”에서 촉발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미술과 미술사에 있어 실증적 자세로 연구와 조사활동을 펼쳤고 정력적으로 그것들을정리했으며, 1933년 개성시립박물관 관장으로 부임한 후에는 언론매체를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과 미술문화재에 대한 글을 기고하는 등 민족문화재의 재인식을 호소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힘썼다.1944년 41세로 요절하기까지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석탑에 최초로 양식 개념을 도입한 『조선 탑파의 연구』, 회화사 연구의 길을 닦은 『조선화론집성』 등 8권의 책과 150여 편에 달하는 논문을 남긴 것이 그 증거이다.

초기에 그는 서구미학에 전념하였으나, 이후 이를 한국미술에 접목시켜서 한국미의 특질을 표현하는 미학적 언어를 정립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이 짙게 보이는 ‘무기교의 기교’, ‘비정제성’, ‘민예적인 것’, ‘구수한 큰 맛’ 등이 그것이다. 김임수 교수는 우현의 그러한 생각이 ‘한국적 미의식의 특질’로 규정된다고 말하며 “(이와) 같은 특색은 기교나 계획이 서구에 있어서와 같이 ‘독자성·자율성·과학성’을 획득하지 못했던 한국 전통미술의 제작태도적 특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와 같은 특성에 있어서 ‘조선에는 개성적 미술, 천재주의적 미술, 기교적 미술이란 것은 발달되지 아니하고 일반적 생활, 전체적 생활의 미술, 즉 민예란 것이 큰 동맥을 이루고 흘러나려왔다’는 것이며, 따라서 ‘조선의 미술은 민예적인 것이매 신앙과 생활과 미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야나기가말한 ‘민예미’와의 근친성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우현의 말이 야나기의 말과 동의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특히 ‘신앙’이라 표현한 것이 ‘종교’적 맥락에서 해석될 때 ‘민예’는 야나기의 ‘민예’와는 다른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당대 서구미학과 미술사학의 연구성과와 일제 강점기의 경성제대와 일본 학계의 상황, 그리고 당대 한국 지성사의 동향 등에서 학문적 토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미적 가치이념의 문제를 통해 구체화된, 한국미술의 미적 특색을 규명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한국미의 특색을 ‘현상적 근본’에서 찾고자 했던 우현의 미학적 시각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현은 평생을 한국미에 천착했고 ‘한국미학의 선구자’로서 한국미학과 미술사학계의 본류를 형성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인범의 논문에서 밝히듯 ‘식민사관의 영향으로 혐의를 두는 유력한기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가 현재 한국 미학미술사학의 딜레마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우현은 딜레마 해결을 위한 바로 그 지점이 되어야 한다. “불행한근대를 거치며 우리 안에 드리워진 그늘”에서 ‘그늘 벗기기’의 작업은 아직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학’이라는 역어譯語의 발명과 동아시아 근대미학


동아시아 공통어가 된‘미학’이란 개념은 서양어 Aesthetics / Esthetique / ¨Asthetik의 역어譯語이다. 동아시아에 수용된‘미’와‘미학’이라는 말은 예술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미학이라는 역어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중국과 일본에서‘미美의 철학’이라는 동아시아 관념을 반영하면서 수용되었다. 문화의 수용과정에서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화융합cultural metamorphosis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서 18세기에 정립된 미학이라는 말은‘예술철학’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장파張法 교수(중국인민대)는‘practice(실천)’의 관점에서 중국 현대미학의 형성 과정을 풀이했다.왕궈웨이王國維의 문장에서 비롯된 중국 미학은 aesthetics을 대체하는 역어로‘메이쉬어美學’라는 말을 선택한다. 그리고 근대 전환기 중국에서 미학 개념은 정치·사회적 미학론을 역설한 량치차오梁啓超 노선을 취했다.‘실천practice’우위의 미학론이라 칭할 수 있는 이러한 중국미학은 지금까지지배담론이 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50년대 후반에 러시아발發 역사적 유물론을 수용한 리저허우李澤厚의‘사회주의 미학’이 득세하고, 1980년대 이후 칸트 철학의 관점에서사회주의 미학을 변형한‘실천미학’이 주류를 형성한 이유도 거기에 연원한다. 장파 교수는“주체의 관점에서 주체의 육체로 이동했다”고 설명한다.


1980년대 이후 중국 현대[當代]미학은 이러한 인식의 중력장 안에서 네 가지 사상이 쟁투를 벌이고 있다. ①실천미학과 ②미적 사상을 중시하는‘역사적 존재론’이 전기前期 실천미학을 이룬다면, ③실존주의와 ④생의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삶의 존재론’이 후기 실천미학의 흐름을 형성한다. 중국의 경우 서양과 소련에서 흡수한 실천미학론이 지배담론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유중하 교수(연세대)가 “실사實事라는 두 글자가 중국 현대사를 받쳐온 정신적 기둥이었다”고 한대목이 이해된다. 유 교수는 중국 미학을 특징짓는‘practice’라는 말에는 실천praxis과 실용pragmatic 지향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즉“practice, praxis, pragmatic라는 세 용어란결국 근대 구성원리였지 않느냐?”는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미학은“실사구시에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상반상생으로 방향을 틀어잡아야 할 것이다”고 지적한다. 장파 교수는 일반미학이론과 독특한 미의 구축, 즉 보편성과 특수성의 동시적 모색을 통해 높은 수준의 서구미학과 보조를맞추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장파 교수는 지난 1999년에 동서양 미학이론을 집대성한 『미학개론』(1999)을 펴낸 바 있다.


사사키 겡이치(일본 동경대) 교수는 이문화로서 서양미학을 수용할 때 발생하는‘커뮤니케이션의차이’에 주목했다. 그는 프랑스 저술가 외젠느 베롱Eugene Veron의 책을 일본에 소개한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의 『유씨미학維氏美學』(1883-1884)이라는 텍스트를 그 예로 들었다.‘유씨維氏’란 베롱을 가리킨다. 초민은 베롱의 책을 번역하면서 자신의 가필(=주석)을 덧붙였으나, 거기에는 이문화에 대한오해의 흔적들이 역력하다고 보았다. 예컨대‘예술미는 예술가의 인격성=개성personnalite의 표현에 있다’고 본 베롱의 핵심 사상이 초민의 번역에 의해‘기축機軸’으로 왜곡·수용되었다는 것이다. 기축이란 고안이며 디자인을 뜻한다. 즉,‘솜씨’와‘인격성’을 분리시킨 베롱의 미학론이 나카에 초민에 의해‘천재 또는 재능’으로만 일방적으로 수용됐다는 지적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사사키 교수는 미와 미학을 뜻하는 일본적 관념은 있으나, 그 관념이 18세기 이후 형성된 서구적 미의 개념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실제로 야나부 아키라의 『번역어 성립사정』(일빛, 2003)에 따르면,“‘미’와 유사한 일본의 전통적 표현들은 (…) 훨씬 구체적이어서, 관념을 얘기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p.78)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사키 교수의논의는 과연 모어母語 본능에 반하는 모어 페시미즘이라는 일본적 전통과 무관했던 것일까.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동아시아 미학은 자신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 사사키 교수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좋은 있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미학은 독자적이고 전통적 감성을 갖고 서양 근대에맞서는‘미의 철학’이 될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미학 개념의 수용과 변천사에서 번역과 근대(성)라는 화두를 고구考究해 보는 일은 결국 우리의 숙제이다. 고유섭은 그러한 지적 여정의‘서장’을 꾸미는 질료가 될 것이다.
글 고영직

출처-기전문화예술 2005.9ㆍ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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