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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시회 관행, 이제는 바꿔야 한다

이선영

미술 전시회 관행, 이제는 바꿔야 한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음악에서 연주회가 열리고 음반이 나오며, 문학에서 책이 출간되듯, 미술에서도 전시회가 가장 기본적인 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창작과 비평 같은 생산 체계는 교육이나 저널같은 재생산 체계보다 우선권이 있다. 그래서 당대에도 후대에도 미술에 있어 우선적인 주목 대상은 전시회이다. 당시에는 흔해 빠진 것이 전시관련 정보일지 모르지만, 불과 몇십년 전의 근대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만 해도 당시의 신문에 실린 몇 줄의 미술 전시 기사나 희미한 흑백 작품사진을 중요한 사료로 삼는다.
어렵다는 우리의 경제 사정에도 아랑곳 없이, 해마다 많은 미술전시들이 열리고 있다. 문예진흥원에서 발간한 문예연감 통계를 보면, 연 6000-7000건의 크고작은 전시회의 목록이 기록되어 있다. 개인전의 경우에는 한 개인의 역량이 총집결되는 중요한 행사이고, 기획전의 경우에도 담당 큐레이터나 미술관의 역량이 시험대에 오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개인전이든 그룹전이든 관례적인 타성에 빠지는 순간이 온다. 예술이든 뭐든 열심히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미술자체가 자명하게 존재한다는 상식적인 사고를 포기할 때, 진정 중요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현대 미술사는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미술전시는 양적으로 많기도 하거니와 지역적 편중 또한 심하다. 전체 전시의 50% 이상이 집중되어 있는 서울은 가히 문화의 수도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군데서 너무 많이 열려서 어떤 전시들은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모두들 서울에서 전시를 하고 싶어서 지방에는 문화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방에서의 전시횟수가 결코 적다는 것은 아니다. 지방의 한 개의 도 내에서도 1년에 수백건의 전시가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회들에 관행적인 전시들의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관행적인 전시의 대부분이 단체전이다. 적어도 개인전의 경우,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전시를 강행할 작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부터 전국 단위로 조직되어 있는 미술협회와 미학적,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을 표방하며 조직되기 시작한 민예총 산하의 단체들도 해마다 정기적인 전시를 연다. 그러나 구체적인 테마가 있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설사 테마가 있어도 테마에 충실하기 보다는 전시가 열릴 즈음에 각 회원들이 붙잡고 있던 작품 한점씩 내면서 이루어지는 단체전이 너무나 많다. 대개 ‘XX협회 OO지부전’이라는 이름으로 열리곤 하는 전시에는 단체와 지역 이름이 들어가고 그 앞에 횟수가 들어가곤 한다. ‘제O회 OOO정기전시’라는 타이틀 하나로 마치 꼭 열려아 할 것같은 전시회가 하나 뚝딱 열리고, 그 횟수가 거듭될 수록 그 전시회에 대한 무게와 비중이 높아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조직 또는 개인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 이상의, 진정 의미있는 전시가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그 수많은 전시회의 숫자는 삶과 예술의 일치라는 바람직한 증거일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술이라는 것은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삶 그자체는 아니다. 식물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만들어내지만, 꽃이 흙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삶과 예술 사이에는 화해와 융합 보다는 긴장감이 있기 마련이다. 일상적인 삶을 담은 작품조차도 삶과 예술 사이의 긴장은 내포되어 있다. 예술 자체가 물심 양면에서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한 생산이지, 느슨한 소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자가 예술에 관련된다면. 후자에 관련되는 것은 문화라고 해두자. 예술은 문화에 속해 있으나, 모든 문화가 예술인 것은 아니다. 생산과 소비, 예술과 문화는 관련이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문화가 일상적 삶에 편재(遍在)하는 것이라면, 예술이란 삶의 절정, 비록 순간적일지 모르지만 가장 밀도 깊은 어떤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작품은 이러한 체험을 어떤 형식으로 풀어내어 그 내밀한 개인적 체험을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 체험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 종교적 열정, 혁명적 열기에 대한 체험과 관련될 수 있다.
이러한 영감의 저수지 없이 형식적인 세련미 만을 갈고닦는 일은 예술보다는 장인의 일에 가깝다. 형식적인 완결미로 원로 대가급으로 평가받는 작가들 가운데도 자신이 한 때 창조한 형식, 그래서 그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양식을 계속 메만지고 있는 것으로 창조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꾸준히 한 길을 가는 것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 경우에는 작가보다는 장인이라는 평가가 정확하다. 예술은 불꽃놀이와도 같아서, 한순간 화려하게 폭팔하기 위해 에너지가 집중될 시간이 필요하다. 축제를 위해 축적된 에너지는 일순간 사라지지만, 그것이 쓰여지고 난 다음의 감동은 그것을 접한 모두의 마음 속에 남는다.
너무나 많은 물건들, 상품들, 유산들에 둘러싸여 있는 현대인에게 예술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방식은 물질의 형태이기 보다는 강렬한 체험의 공유 그자체가 아닐까. 그러나 주관적, 또는 객관적 한계에 의하여 대부분 소통은 잘 안되고 애물단지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는 미술작품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얼마나 많은 작가들이 고심하고 있는가. 그러한 예술의 불꽃놀이에서 작가는 불발탄이나 오발탄이 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뭔가 쌓아놓고 쌓인 것을 관리하고, 쌓인 것을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식의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 예술은 차이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예술이 삶에 개입하는 방식은 색달라야 한다.
보수주의는 물론이거니와 자못 진보와 파격의 몸짓을 취하는 것이 철저히 기존의 틀에 바탕하고, 결국은 그 양태가 뻔히 보이는 또다른 틀을 재생산하는 것에 그치는 경우도 많다. 미술계에 통용되는 틀은 상당히 많다. 가령 원로작가, 중진작가, 작고작가, 신진작가, 여류작가, 국전초대작가, 진보계열 등등의 카테고리로 나뉘어지는 작가에 대한 분류방식은 어떤가. 이러한 타이틀은 편견과 도그마에 의지한다. 자본주의가 젊음을 숭배한 이래 ‘젊은작가=진보’라는 도식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노회한 젊은 작가들도 많다. 원로나 중진작가를 숭배하는 것도 방향을 다르지만 같은 발상의 산물이다. 더구나 물신 창조에 몰두하는 사회라면 ‘작고 작가’라는 타이틀은 그자체가 작품 가격에 민감하게 반영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서양화, 동양화, 요즘은 입체, 평면 하는 식의 분류도 마찬가지이다. 군소화랑, 지방화랑일수록 상투적인 카테고리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서, ‘서양화 4인전’, ‘중진 원로작가전’ 따위의 황당한 전시 제목은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상업적인 카테고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며, 상품화의 전략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미술을 규정하는 여러가지 틀 중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틀거리로 행사되는 것은 역시 출신학교와 지역이다. 이러한 기준들은 지리적 사회적 변방의 작가들에게 불가항력의 벽으로 다가오고, 기준 안에 있는 기득권자들에게는 아늑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그러한 수많은 틀들이 예술을 지원하는 공공제도와 맞물리는 점도 없지 않다. 대개 그럴듯한 명분으로 치장되어 있고 회원들 머릿수 늘려 외형적인 덩치를 키우고, 미술대학 교수같은 명망가 내지 유력 인사들이 집행부를 맡는 식이다. 제도에 맞추어 제도가 또 생겨나고 그것들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질곡이 확대 재생산된다. 백명도 넘는 회원수를 자랑하는 단체의 전시보다 한 작가의 전시가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양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자신들의 존재 확인 이상을 넘지 못하는 말그대로 전시성 전시들이 계속 공공기금의 지원을 받고, ‘제OO회 OOO전’이란 식의 자못 필연적인 듯한 맥락을 만들어 낸다.
겉치레의 전시관행은 아마추어 예술집단에도 영향을 준다. 일요화가회 같은 아마추어 미술 집단도 호화도록이나 번듯한 전시장에서 전시를 하는 경우가 있다. 몇 년전부터는 학생들의 졸업전이나 과제전이 추가되었다. 오히려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더욱 필요할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겉치레에 치중하는 전시는 아마추어적인 발상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겉치레 행사들은 미술문화를 살찌우기 보다는 부동산 임대업자나 인쇄업자들을 부양할 뿐이다. 요즘은 전시 오픈날 전시장에서 음식냄새 풀풀 풍겨가며 한 상 차려놓는 식의 행사가 없어진 것도 바람직한 변화이다. 그러나 뒷풀이를 위해 써야 하는 돈은 여전히 전시 주최 측의 부담으로 남는다. 여유가 닿으면 뭐든 다하면 좋겠지만, 작업하는 사람에게 어느 천년에 경제적인 여유라는 것이 생길 수 있겠는가.
하기야 ‘이 정도는 되야 한다’는 식의 발상이 우리 경제를 이만큼 발전시켰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인사동의 사루비아 다방같은 몇몇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부담스런 팜플렛 대신에 A4 1-2장 정도의 검소한 전시 안내 복사물이 등장한 것도 얼마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러한 전시공간이 작가의 밑천을 빼먹는 식의 출혈 전시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작업에만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 주고 겉치레에 들어가는 돈으로 실제적인 지원을 더해주는 식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업의 질을 보장받기 위한 투자에 보다 집중하고, 그 주변을 둘러싼 미술계의 제도들은 그들의 시스템을 이용해서 교통정리만 해주면 되는 것이다. 한해에 열리는 수천건의 전시를 생각해 보면, 전시가 있으니 그것을 알린다는 식의 보도 태도나 객관성이란 명목의 실증주의적인 학문 태도가 얼마나 맹목적인지 알 수 있다.
결국 작업도 담론도 선택과 집중이 중요해진다. 선택에 따른 책임과 집중에 따른 질적이고 객관적인 성과의 문제인 것이다. 양보다 질, 형식보다 내용에 집중해야 미술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공공시스템은 예술의 질적인 면을 계측하는 방식을 개발해야만 진정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여 지원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미술이 사회에 꼭 필요하다’라는 명제는 정반대의 의미에서 옳을 수 있다. 예술은 삶의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조명할 수 있지만, 예술의 진정한 존재 의미는 관성적으로 돌아가는 일상에 딴지를 거는 것이고, 동질적인 질서가 강요되는 곳에 색다른 영토를 꾸미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생성되고 유지된다.
그러한 건강한 길항작용을 할 수 없는 예술, 즉 현실의 판박이로서의 예술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한 예술은 삶에 덧붙여지는 빛바랜 꽃무늬 장식같은 것에 불과하다. 자신의 진정한 역할을 망각하고 타성적인 질서를 내면화한 결과가 바로 이곳에서 벌어지는 미술전시 행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거품들이다. 이론이나 저널 또한 예외가 될 수 없다. 전시 주최측의 보도자료를 거의 그대로 참조해서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신문기사나, 대학에서 자리를 보전하는 용도를 넘어서지 못하고 현장에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수많은 미술 관련 학술논문들이 그 예이다. 그 전시에 그 담론, 그 밥에 그 나물로 계속 밥상은 차려진다. 그 과도한 자기지시성에 현기증이 난다.
단단해진 껍데기를 찢는 것이 아니라, 더 교묘하게 껍데기를 만들고 강화하면서 자기유지와 방어에 급급한 미술의 현존재 방식은 기만적이다. 그 껍데기는 보호막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스스로 그 안에 유폐되고 만다. 지속적인 자기혁신이 없는 껍데기 타이틀은 순응적인 질서의 각인일 뿐이고, 결국에는 보호막조차도 되지 못한다. 사실 틀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틀은 사라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예술은 내면화된 억압적 질서로서의 틀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을 보호해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주는 듯한 그 틀이 자신을 고립시키고 옥죄는 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기존의 질서는 서서히 의식을 마비시키고 뜨듯한 목욕물 안에 있는 듯한 안락감마져 주기 때문이다. 예술은 틀의 안과 밖이 아닌, 그 경계 지대에서,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의 그 불명료한 영토에서 떠돌 수 밖에 존재이다. 그 영토는 자칫 사회적 낙오와 죽음의 장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모험과 도전이 가능한 미지의 영토일 수도 있다.
예술을 짓누르는 도그마의 무게로 침몰하는가, 예술을 지속한다는 것 자체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시련을 파도삼아 서핑을 할 수 있는가는 작가의 역량이 달려있다. 그래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은 모더니즘 신화에 나오는 ‘저주받은 천재’의 문제와는 맥락이 다르다. 예술은 형식이 중요한 듯도 하지만, 형식을 만드는 것이 내용이다. 내용의 밀도와 강도를 통해 또다른 형식이 만들어지고, 또 그 만들어진 형식마져도 폐기하면서 또다른 내용으로 전화해 나간다. 미술의 역사는 이러한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에 의해 진화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작품의 틀과 제도의 틀이 작동되는 방식은 유사하다. 잔존하는 틀이 아니라, 생성되는 틀 만이 중요하다. 틀이 생성을 방해하는 순간 그것은 폐기 대상이 된다. 따라서 예술을 둘러싼 제도 역시 예술만큼이나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못 원론적인 예술의 바람직한 존재 방식을 위해 우리의 전시문화가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우선 관행적인 전시회의 수를 줄여야 한다. 그대신 전국 순회전의 기회가 좀 많았으면 한다. 지역 순회전은 역량이 집중된 질적인 전시의 향수 기회 확대라는 면에서 바람직하다. 이미 상업적인 성격을 띄는 블록버스터형 미술전시는 전국 순회전을 하고 있다. 중요 기획전은 도시들끼리 교환 전시를 할 수도 있다. 개인전의 주기는 자비를 들여서 하든 초대전이든 3년 이상은 되야 작가로서 쉽게 고갈되지 않는다. 1년에 한번씩, 심지어 두번까지도 개인전을 하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 젊은 작가도 예외가 아니어서, 비슷한 성격을 가지는 대안공간의 공모전을 돌아가며 전시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에는 전시 기획자의 안이함도 일조한다.
개인전이 그 정도니 여기저기 얼굴 마담처럼 껴서 하는 그룹전의 횟수는 말할 것도 없겠다. 작가에겐 어느덧 꼬리표가 붙고 현장을 살피지 않는 이론가나 기획자는 기존의 분류에 의거해 작가나 작품을 모으기 때문에, 바쁜 작가들만 계속 바쁘고, 관객과 작가가 만나는 소중한 기회인 전시회들은 동어반복이 되기 마련이다. 같은 작품 또는 비슷한 작품으로 1년에 3번 이상 전시하는 작가들은 반성을 해야한다. 전시 말고도 세상과 소통할 길이 많은 명망가 스타일의 ‘작가’가 아닌 바에야, 전시회라는 귀중한 기회를 낭비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적될 것은 우리의 미술 전시회에서 전시 기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대개 일주일인데, 그 일주일도 온전한 일주일이 아니다. 전시 개막일에 오픈식이 열리는 오후까지도 작품 설치로 어수선한 경우가 많고, 전시 마지막날 가보면 오후 일찍부터 철수하는 분위기이고, 아예 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관람자로서는 길지 않은 기간 내에 시간 맞춰가기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말이다. 대관 전시이다 보니까 작품 설치할 시간도 충분치 못하고 그다음 전시를 위해서 서둘러 비워줘야하는 사정이 이해 안가는 바는 아니지만, 대관전이라도 열흘정도 주기는 확보되는 방향으로 전시관행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전시회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작가에게 한달 정도 작품 설치할 시간을 주고 전시 기간도 한달 정도 되는 인사동의 사루비아 다방에서의 전시가 대부분 성공적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업이란 자신의 무의식과 꿈까지도 총동원해야 하는 일이다. 작가의 온 감각은 깨어있어야 한다. 틀이라는 것이 무디어진 감각의 방어막이 되어주고 기득권을 지키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술에 틀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뭔가 생산하기 위해 뾰족하게 갈아놓은 연필심이나 칼날 같은 도구로서의 틀일 뿐이다. 작가에게는 현상유지가 아닌 생성을 위한 임시방편의 틀, 오직 그것만이 필요할 뿐이다.


문화예술 2005.5월호 '문화현상읽기-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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