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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만나는 세계의 현대미술 ② 도널드 저드와 미니멀리즘

이규현

[문화] 한국에서 만나는 세계의 현대미술 ② 도널드 저드와 미니멀리즘

아무것도 없는 조각 그 안에 뭔가 있다
“되도록 보여주지 말자” 최소한의 미술 주창하며 1960년대 중반 출현
여의도 일신방직에 대표작 ‘무제’… 2006년 경매선 25점 220억원 빨간색 직육면체 10개가 길게 나란히 벽에 붙어 있다. 전체 높이만 2m가 넘는 이 조각은 직육면체 10개의 크기와 색깔이 아주 똑같다. “이것도 미술이야?”라는 말이 나올 법한 간단한 모양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유명한 미니멀리즘 작가 도널드 저드(Donald Judd·1928~1994)의 ‘무제(Untitled·1972년작)’다. 여의도에 있는 ‘일신방직’ 본사 11층 복도에 전시돼 있어, 이 회사를 찾아온 사람 누구에게나 공개된다.





사실 일신방직 사옥은 현대미술관 같다. 김영호 회장이 이름난 미술 컬렉터(수집가)라 사옥 전체에 국내외 유명 현대미술 작품을 들여놓았다. 김 회장은 백그라운드도 독특하다. 뉴욕 맨해튼에 있는 유명 미술학교인 프랫인스티튜트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2007년 5월에는 독일의 명품 필기구 회사인 몽블랑 문화재단이 주관하는 몽블랑 예술후원자상의 한국 수상자로 선정됐다.

도널드 저드의 ‘무제’는 그가 사옥에 들여놓은 여러 작품 중 손꼽히는 것이다. 저드는 이런 스타일의 조각을 매우 즐겨 했는데, 삼성미술관 ‘리움’, 뉴욕 근현대미술관 ‘모마(Moma)’ 같은 세계적인 현대미술관들이 일신방직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저드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또 국제 경매회사들의 경매와 미국 현대미술을 다루는 주요 갤러리들에서도 이런 모양의 도널드 저드 조각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즘 시장에서도 각광 받는 작가다. 2006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회사에서 도널드 저드의 작품 26점을 모아 특별경매를 했는데, 이 중 25점이 총 2440만달러(약 220억원)에 팔렸다.

‘미니멀리즘’은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미술경향이다. 말 그대로 미술의 재료, 색깔, 모양을 최소화한 미술이다. 복잡한 것을 보여주지 말자, 되도록 보여주지 말자고 외친 미술이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미술의 역사도 앞 세대가 한 것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이루어진다. 미니멀리즘이 싹트기 바로 전인 1950년대에 미국에서는 잭슨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을 중심으로 한 ‘액션 페인팅’이 대세였다. 잭슨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그 위에서 춤을 추듯이 붓으로 물감을 자유분방하게 떨궈 격정적인 추상화를 그렸다. 어떤 특정 사물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는다는 의미였다. 유럽의 귀족적이고 여성적인 예쁜 미술에서 벗어나 미국의 남성적 힘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 받았기에, 미국인들은 잭슨 폴록을 ‘국민화가’로 추대했다. 하지만 액션 페인팅 화가들은 작가의 주관적 감정을 너무 심하게 담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모양도 정신 없고 색깔도 정신 없다. 그래서 1960년대에는 이에 반기를 들고 ‘팝아트’와 ‘미니멀리즘’이 나온 것이다. ‘팝아트’는 대중문화 상징물을 태연하게 갖다 써서 작가가 작품에서 손을 뗀 척했고, ‘미니멀리즘’은 공업 재료를 쓰면서 모양과 색깔을 절제해서 “되도록 보여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도널드 저드 외에도 칼 앙드레, 리처드 세라, 토니 스미스, 로버트 모리스 등이 미니멀리즘 작가로 손꼽힌다. 이 중 토니 스미스(Tony Smith·1912~1980)의 ‘밤(Night·1962)’이라는 미니멀리즘 조각은 신세계백화점 본점 바깥에도 전시돼 있다. 마치 ‘ㄱ’자 모양 두 개를 붙여놓은 것 같은 검은 철제 조각이다. 크고 육중한 검은 철 덩어리가 바닥에 턱 놓여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게 뭐지?” 하고 조각의 사방을 둘러가며 보게 된다.





조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어떤 특정 모델의 모습을 재현했다면 관객들은 “음~ 예쁜 여인이구나” “아~ 귀여운 강아지구나” 하고 그 재현의 대상에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이렇게 통 보여주는 게 없는 조각에서 사람들은 그 조각의 재료, 색깔 등 물성(物性)밖에 볼 수 없다. 미니멀리즘은 이렇게 어떤 특별한 대상을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냥 작품의 재료가 가진 성질을 보여주는 데 최선을 다한다.

도널드 저드는 작가의 손맛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재료인 구리, 스테인리스스틸 등을 썼고, 똑같은 모양을 찍어내는 기계적 제작방식을 택해서 복제가 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의 미술인 ‘팝아트’와 통한다. 저드는 생전에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세상 모든 사물은 똑같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미술작품이라면 당연히 유일무이하고, 감정이 풍부하고, 표현이 풍부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는데, 미니멀리즘 작가들은 이를 완전히 무시했다. 미술이 관객에게 ‘환영(幻影)’을 심어줘서는 안 된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도널드 저드는 미니멀리즘 작가들 중에도 회화가 아닌 ‘조각’에 집중했다. 조각작품과 그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신경을 썼다. 이를 테면 일신방직에 있는 ‘무제’는 10개의 철제 직육면체가 똑같은 간격을 두고 벽에 붙어 있어서 직육면체들 사이의 간격조차 작품의 요소가 된다. 작가이면서 동시에 이론가이기도 했던 그는 1965년에 이런 글을 썼다.

“3차원은 실제 공간이다. 유럽미술에 나타나는 못마땅한 특징인 ‘환영(illusionism)’의 문제가 3차원 작품에는 없다. 3차원 작품은 본질적으로 평면 회화보다 흡인력이 있다.”

도널드 저드는 자신이 ‘3차원 공간’에 즐겨 집어넣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조각을 ‘특수한 오브제(Specific Objects)’라는 별도의 명칭으로 불렀다. 화가 이우환은 “화가는 지식인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손재주’보다 ‘머리’ 곧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미술작가들이 바로 미니멀리즘 작가들이다.

물론 도널드 저드의 작품에 누구나 박수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그는 “보여주는 것을 너무 최소화해서 감상할 게 없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래서 미니멀리즘 이후에는 다시 마음껏 색깔과 모양을 보여주는 미술이 등장한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아직도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의 미술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류희영, 김기린, 홍승혜, 장승택 등 모양과 색깔을 절제하는 우리나라 작가들을 ‘한국의 미니멀리즘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대미술은 패션이나 음식처럼 유행하는 것이고, 그 유행은 돌고 돌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다.


/ 이규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 주간조선 2008. 1.22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22/20080122011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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