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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현실에서 호러까지 한 걸음

강수미

영국의 현대미술가인 앨리슨 잭슨은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 엘리자베스 여왕, 찰스 왕세자, 엘튼 존 등 영국사회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들의 이미지를 차용한 사진작품으로 논란을 일으키며 부상한 작가다. 그는 1997년 다이애나가 연인 도디 알 파예드와 파리의 한 터널에서 파파라치에 쫓기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직후, 마치 그 불행했던 왕세자비의 숨겨진 사생활을 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 사진 중 하나에서 다이애나는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도디를 연상시키는 한 남자와 성(聖) 가족처럼 앉아있다. 물론 명백히 가짜이고 허구다. 그러나 문제의 사진은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깊었는지 엿보고 싶고,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 영국 대중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들춰냈다는 점에서는 진짜였다. 싫든 좋든 영국왕실의 통치 아래서 살아온 그들에게 무엇을 알고자하고, 보고자하고, 꿈꾸고, 생각하는 그 모든 활동 안에 그 왕실이 얼마나 깊숙이 개입해있는지를 건드린 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간과 공간을 잠시 바꿔, 7월 20일 새벽 블록버스터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되는 미국 콜로라도 주 오로라시의 한 영화관. 배트맨 시리즈의 세 번째 편인 그 영화 개봉 전부터 영화평론가들은 놀라운 시각효과와 작품성을 보여준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슈퍼 히어로의 활약상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할리우드 영화 공식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크게 놀랄 일이란 애초 별로 없었다. 진정 놀라운 일은 그 영화가 상영되는 실제 현장에서 벌어졌다. 한참 스크린 위에서 총질이 난무하고 있을 때, 검은 방독면과 방탄복으로 무장한 청년이 극장 안으로 뛰어들어 관객들에게 실제로 무차별 총기난사를 한 것이다. 마치 배트맨 시리즈의 악당처럼, 그 영화 중 가장 핫한 장면들처럼. 언론에 따르면 71명의 사상자를 내며 미국사회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이 끔찍한 사건의 범인은 제임스 홈스, 24살, 백인, 남성, 콜로라도 의대 신경과학 박사과정생, 그리고 외톨이였다 한다. 그는 체포된 이후 줄곧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런 잔학무도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질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총기난사범 홈스가 영화 속 악당 캐릭터를 모방했고, 심지어 영화의 가상세계를 자신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끔찍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사실 말이다. 범행을 시작하면서 외친 '나는 조커다'는 그 기괴한 욕망의 신호탄이었다. 누구를 향한 미움이나 무엇에 대한 구체적 분노가 아니라, 허구의 언어와 이미지에 의해 부추겨지고 실행됐으며 그 점을 과시하는 폭력성. 이것이 2012년 여름 미국의 한 영화관에서 오밤중에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 심부에 도사린 가장 무서운 점이다. 

다시 시공간을 바꿔 7월 27일 오후 9시, 제30회 하계 올림픽 개막식이 펼쳐진 영국 런던의 올림픽 스타디움. 영화 '트레인스포팅', '슬럼독 밀리어네어'로 유명한 감독 대니 보일이 연출한 개막식은 여느 국제대회들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그 또한 온갖 첨단 미디어와 연출기법을 동원해 장관을 연출하려 애썼다. 또 인류의 진보나 불굴의 의지 같은 착하지만 다소 식상한 메시지를 그 스펙터클에 끼워 넣어 대중의 감동 코드에 부응하려 했다. 그러나 그 개막식은 영국의 무상의료제도부터 평범한 가정의 일상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동화책을 읽는 어린 소녀의 순수한 즐거움부터 스포츠정신에 위배되는 부정한 방법으로 승리하는 꿈을 꾸는 희극배우의 익살까지 시종일관 땅에 발붙인 정신과 몸에서 나온 현실적인 것이었다. '영국식 인문과 예술의 상상력은 이렇게 강한 현실인식에서 온다' 싶을 정도다. 

이상 세 가지 다른 이야기는 보는 행위와 이미지, 또 대중이라는 공통 요소를 갖고 있다. 우리 대중은 끊임없이 보고, 본 것에 자극받는다. 그런데 그 활동이 총기난사범의 환각처럼 도착적이면 현실은 현실다움을 떠나 호러로 진입한다.

-한국일보 2012.8.3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02211100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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