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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홍성욱]‘비디오아트의 시조’ 백남준 모델

홍성욱

《 나의 실험적 TV는
항상 흥미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항상 흥미롭지 못한 것도 아니다.
마치 자연이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게 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변하기 때문인 것처럼. 》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학


위의 시는 1963년에 백남준이 독일의 작은 도시 부퍼탈에서 자신의 첫 전시회를 연 뒤에 지은 시다. 이 전시에서 백남준은 반쯤 부서진 피아노들과 13대의 TV를 선보였는데, 이 TV의 회로들은 뒤틀린 영상 이미지들을 보여주기 위해 조작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서 백남준은 한참 동안 전자와 물리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당시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도 힘든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 유복한 가정의 자제들이 다 세계적 예술가가 된 것은 아니다. 백남준은 어렸을 때 음악을 공부하다가 일본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건너가서 당시 전위예술을 주도하던 플럭서스 그룹에 합류하면서 존 케이지와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같이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백인들이 주도하던 예술계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플럭서스의 행위 예술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백남준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사용하는 전자 설비를 보고 경탄했고, 바로 TV에 주목한 뒤에 전자공학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음악-전자공학 섞어 비디오아트 창시






TV를 이용한 전시회를 열었지만, 이것으로 그가 ‘비디오아트의 시조’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아니다. 1960년대를 통해 미국에서 활동하던 백남준은 자신의 새로운 예술을 정당화해야 했다. 이 예술에 걸맞은 예술 철학을 동시에 만들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백남준은 여러 반대와 비판을 극복해야 했는데, 여기에는 그의 작업이 예술이 아니라 그저 그런 기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고, 그의 작업이 기술을 미화하면서 TV 같은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해악을 숨긴다는 비판도 있었다. 특히 1960년대의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는 기술에 대한 비판과 비관론이 주류였다. TV와 비디오를 이용한 그의 작업이 ‘아트’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백남준은 이런 비판에 대한 대응을 비평가들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는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에서 각각 피드백과 핫 미디어라는 개념을 채용해서, 기존 TV의 문제를 극복하는 ‘참여 TV’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현재 수동적인 TV 시청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시청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TV를 만들 수 있는데, 자신의 비디오 아트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미디어 아트가 기술 낙관론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정면 대응했다. 현대 기술이 문제가 많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기술에 대한 안티(anti)가 아니라 “더 많은 기술”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자신의 비디오 작업이 “기술을 인간화시키는(humanizing technology)” 것이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당시 ‘급진적 소프트웨어’ 운동가들에 의해서 채택이 되어 기술에 대한 비관론과 낙관론을 뛰어넘는 새로운 제3의 철학적 입장이 되었다.

미술관에 전시된 한두 대의 TV 스크린에서 구현되는 비디오아트가 이런 혁명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생각해도 그러기 힘들다는 것이 분명했다. 이를 가능케 하는 한 가지 방법은 자신이 제작한 비디오아트를 마치 방송처럼 시청자에게 전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TV 방송국의 표준에 맞게 영상을 합성하고 조작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백남준은 1960년대를 통해 일본의 엔지니어 아베 슈야와 함께 방송을 목적으로 비디오 영상을 조작하는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만들었고, 1970년 8월 1일에 보스턴의 WGBH 방송국에서 자신의 ‘비디오 코뮌’이라는 4시간짜리 비디오아트를 방송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이용한 첫 방송이었다. 7개의 영상을 하나로 합치는 이 신시사이저에는 여러 음을 하나로 합쳐서 소리를 내는 피아노 음악에 대한 그의 오랜 관심과 열정이 녹아 있었다.

두루두루 섭렵하되 하나는 깊게 파야


올봄에 백남준과 오래 함께 일을 했던 아베 슈야를 인터뷰했었다. 아베는 백남준이 “예술가가 되려면 10년, 아니 20년 동안 하나만을 추구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백남준은 음악, 철학, 미디어이론, 사이버네틱스, 전자공학을 하나로 버무려서 비디오아트를 만들었고, 이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이를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그의 노력에는 두루두루 넓게 섭렵하면서, 동시에 하나를 깊게 파는 이질적인 요소가 융합되어 있었다. 이번 달에는 그의 80세 생일(20일)이 있는데, 이를 맞아 그의 창의성과 끊임없는 혁신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시각을 넓혀서 생각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 2012.7.5

http://news.donga.com/3/all/20120705/47538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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