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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人文學 리포트] `아름답지 않은` 현대미술 제대로 보려면

오종환

'저게 그림이냐. 우리 집 애도 저 정도는 그릴 수 있어.'

우리가 전람회에서 추상화를 볼 때 흔히 듣거나 하는 말이다. 이 대화에는 그 작품이 그림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것이 어떻게 잘 그린 그림이냐는 의문이 담겨 있다.

사실 현대예술작품 중에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것이 많다.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것인지 의아심을 들게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20세기 초반 이후에 전통적인 예술론에 반발하여 나온 소위 `아방가르드(전위예술)`라고 불리는 입체파,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다다 등등의 역사적 흐름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예술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술사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인 것이 됐다.

현대예술에 대한 위의 의문들은 결국 `예술이 무엇이냐`라는 예술의 정의문제에 귀결된다. 그림의 경우 19세기 전반까지의 예술작품들은 `봐서 아름다운 것`이라는 상식이 통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예술은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19세기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20세기 이후 작가들은 대상의 모습이 왜곡되고 변형된 화면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냈다. 더 나아가 대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추상적인 작품을 창작하게 되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더 이상 아름답다고 할 수 없는 그런 그림들이다.

한 예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상상해보자. 이러한 경향은 `그림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아름다운 것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답변에 대하여 다음처럼 반발한다. 그림은 아름다운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며,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림은 대상 자체를 재현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까지 이른 것이다.

예술은 무엇을 해도, 또 어떻게 해도 상관이 없고 예술은 예술 자체를 위해(art for art`s sake) 존재한다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이 19세기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여 성립된 이후에 `그림에 있어서 물감은 과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자의식적인 물음`이 대두되었다. 물감은 3차원적 대상을 2차원의 평면에 재현하는 수단일 필요가 없어졌기에 물감은 물감 자체를 위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림은 대상을 재현할 때 희석되는 물감 자체의 특성을 강조해야 한다. 물감 그 자체가 드러나는 그림은 이제 3차원의 환영 없이 2차원의 평면이 됐다. 이제 우리는 추상작품 앞에서 그 화면을 채운 물감들 자체와 그것들 사이의 관계밖에는 감상할 것이 없는 게 된 것이다.

예술의 자율성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예술의 사회비판적 기능을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반면에 우리가 보기만 해서는 어떤 게 좋은지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 과연 예술은 무엇이며, 과연 이러한 예술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하는 역효과도 낳았다.

그러므로 현대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술의 역사를 알아야 하며, 또 그러한 이해에서 나온 해석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우리가 해석을 하는 모든 것이 예술작품은 아니기에 예술의 정의는 여기에 어떤 조건이 더해져야 한다. 하지만 분명해진 것은 예술작품은 더 이상 눈으로 보아 즐거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술이 우리가 보아 즐거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뜻을 해석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면 `과연 예술은 어떤 해석을 요구하는 경우에 우리에게 가치가 있는 것이 되는가`라는 질문이 대두된다. 진정 예술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면 이제 현대미술은 무엇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가치 있는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매일경제 2012.4.14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227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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