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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파를 부숴라!

김인숙(김테레사)

입시의 계절이 돌아온 모양이다. 수능을 치른 지 며칠 지났는데도 언론에서는 입시와 관련된 기사를 멈추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에 얼마나 치중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한민국에서 입시는 국가지대사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아이를 다 키웠지만 이 계절이 편치 않다. 앞으로 펼쳐질 눈치작전과 부모들이 쏟아낼 기도가 안쓰럽다. 젊은이들은 입시배치표 속의 그 아득한 위계구조를 확인하면서 얼마나 절망할까. 순수한 영혼이 얼마나 상할까. 더욱이 예체능 계열은 실기시험에 대비해 밤 새워 연습할 것이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미술대학 입시에서는 석고상을 그리게 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얼굴 윤곽이 뚜렷한 아그리파와 줄리앙 같은 인물 석고를 그리게 함으로써 표현능력을 점검했던 것이다. 학교와 학원에서 수백 번 반복해 그리는 아그리파가 연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문제는 아그리파에 매몰된 생각이 자신을 옭죄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사람을 향해 무한히 뻗어나가야 할 상상력이 아그리파로 인해 고갈되는 경우를 젊은 미술학도에게서 많이 봤다. 한국의 피카소가 되려면, 또다른 내가 되려면 아그리파와 일찍 결별해야 한다.

내가 예전에 강단에 있을 때 이런 방법을 활용한 적이 있다. 대학에 갓 입학한 1학년생을 상대로 드로잉을 가르칠 때 움직이는 형상부터 석고 데생까지 여러 이미지 대상을 커리큘럼에 넣었다. 학생들이 형상에 대한 감각의 발전을 느끼고 콘텐츠와 미디어의 창조적인 만남을 즐기도록 유도했다.

마침내 종강 날, 나는 그동안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아그리파 석고상을 교단 위에 올려놓고 학생들에게 부수라고 했다. 학생들은 망치를 들고 자신들의 분신과도 같은 석고상을 신나게 부수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흐트러진 잔해를 조용히 감상토록 함으로써 퍼포먼스의 의미를 깨닫도록 했다.

지금도 그때 제자들을 만나면 아그리파 파괴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한다. 고정관념을 떨쳐내는 것이 창조의 첫 순간임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전통의 계승과 발전은 이처럼 긍정적인 부정의 힘에 의해 일어나고 예술은 새로운 경지를 일궈내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불후의 명저 ‘서양미술사’에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프랑스 평론가의 주장을 인용한 적이 있다. 예술은 콘텐츠와 그것을 담은 구조, 즉 미디어의 복합이라는 이야기다. 목소리 나쁜 사람이 아무리 신나게 노래를 불러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림 역시 그리지 않고 콘텐츠만 갖고 우겨대서는 안된다. 근본이 없는 전통의 파괴만으로 새로운 예술을 만들 수 없다. 전통과 혁신의 조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아그리파는 사랑으로 부숴야 한다.

-국민일보 2011.11.14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5551440&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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