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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문화재청 50년과 무형문화재 제도

성기숙

얼마 전 문화재청 50년의 발자취를 보여주는 특별기념전 '어제를 담아 내일에 전합니다'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민의 삶 속에 전파된 문화유산의 향훈이 가득 담긴 의미 있는 전시였다. 문화재청은 1961년 10월 2일 문화재관리국이 설치된 날을 생일로 삼고 있다. 문화재청의 지난 궤적은 한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민족 정체성' 찾기 50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70년대 초반 백제 무령왕릉과 경주 천마총, 황남대총의 발굴은 문화재청 50년 역사의 기념비적 성과로 꼽힌다. 무령왕릉과 천마총의 발굴로 백제의 왕족에 얽힌 수수께끼가 풀렸고, 천년 고도 신라의 찬란한 역사문화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의 국보급 문화재 대부분이 일본에 의해 강탈당했다. 당시 일본의 문화재만 국보의 지위에 올랐고, 조선 땅에선 일본역사와 부합되는 것만이 사적(事蹟)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광복이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엔 식민지배로 인한 문화적 콤플렉스가 상당기간 지속되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식민사관을 뒤엎기 위해 경주 발굴을 지시했다는 최근 증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모든 제도의 창출은 당대 절실한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다. 5⋅16 혁명을 통해 제3공화국을 개막한 박정희는 조국근대화를 화두로 산업화를 표방하는 한편, 민족 고유의 전통과 주체의식에 토대한 이른바 '문화주의'를 내세웠다. 나아가 사회통합을 위한 국가이데올로기 구현과 자주적 문화국가로서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공적 제도화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문화재 정책이 탄력을 받았고, 무형문화재 제도가 탄생됐다. 박정희를 평가하는 잣대는 이중적이다. 경제성장이라는 '공'과 정치적 독재라는 '과'로 귀결되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해 있다. 획기적인 문화재 정책을 통한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계승, 민족의 정체성 확립이야말로 되새겨야 할 업적이 아닐까.

특히 60년대 초반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보존, 계승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무형문화재 제도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훌륭한 제도로 평가 받는다.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을 대상으로 역사성과 학술성, 예술성을 엄격히 따져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온지 50년이다. 지금까지 총 126종목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됐고, 그 중 종묘제례 판소리를 비롯 무려 11종목이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전통예인들의 삶과 지위는 무형문화재 제도 생성이후 확연히 달라졌다. 무형문화재 제1세대의 경우, 대부분 재인청이나 신청, 권번 출신으로 사회적 멸시와 천대 속에 전통예술을 보존하고 계승한 진정한 의미의 '지킴이'였다.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예인들은 국가공인이라는 특별한 명예와 재정지원이 더해져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했다. 이렇듯 무형문화재 제도의 탄생은 전통예인들의 자존감을 드높이고 노마드한 삶을 청산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21세기 무형문화재는 어떤 가치로 존재하는가. 무형문화재는 본래의 보존 전승을 넘어 산업화의 원천으로 각광받고 있다. 문화콘텐츠적 가치가 증대되면서 활용범위 또한 넓어졌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본디의 모습을 지켜가는 원형보존이 아닐까 한다. 무형문화재 행정은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복잡 미묘하고 까다롭다.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행정은 과거에 비해 치밀하고 정교해졌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다변화된 문화환경 속에 행정수요는 급증했는데, 조직과 인력, 예산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형문화재 분야 행정기능의 확대가 절실히 요청된다.

-한국일보 2011.10.22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110/h20111021212755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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