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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작품, 보지 않기 위해 보다

손지민


Francisco de ZURBARAN, Santa Faz(detail), 1658

우리는 작품을 경험하는 데 있어 작가의 의도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전에 작품의 시지각적인 요소와 대면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품은 절대 전시공간에서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전시공간의 작품들을 각기 관찰하여 한눈에 모두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전시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일지 몰라도 시지각적 요소 너머의 무언가와 접촉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깊은 고찰을 요한다. 우리의 내성적 지각이 고조되고 긴장상태로 이끄는 작품들은 우리 안의 파토스(Pathos, 주관적 요소)와 모종의 관계를 맺는다.

개념, 이론, 역사적 레퍼런스들이 뒤섞이는 현대미술세계에서는 모순을 통한 고찰과 작가의 주관성이 자주 강조된다. 이러한상황에서 작품을 경험하는데 개입되는 미학적 관점이나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관람자의 파토스에 관한 얘기는 현대미술 해석에 있어 그리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사실, 기억을 통한 역사적 사건이나 과거에 대두되었던 정보, 지식의 소환이 가뜩이나 복잡한 현대예술을 이해하는 데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릴지 모른다. 단일적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작품을 이해하는 눈을 가지려 애쓰는 것보다, 지식의 힘을 빌려 눈으로 경험하고 기술하는 것이 더욱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에 대한 정보를 얕게나마 더욱 빨리 찾아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고, 일반 관람자들이 전시입장권과 맞바꿀 만한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느끼기를 기대하며 전시장 내부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감안해보자. 관람자들은 전시장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배워 나가려면 반드시 작품과 전시 자체의 모티브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고조·상승미학의 가장 큰 무기는 관람객의 지각을 따가 우리만큼 자극하는 비주얼이다. 시지각적인 요소는 파토스의 문을 계속 두드린다. 그것은 전시장을 떠돌며 사물의 탈을 쓴 작가의 언어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알아내기 위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재빠르게 반응하는 관람객의 정신을 계속해서 더 높은 지경으로 들어 올리려 한다. 한편, 이는 관람객의 정신이 작품·전시와 어느 정도 합치되고는 있으나, 이렇게 감정을 ‘들었다 놓는’ 경험이 반복되며 결국 작품들의 부분적인 이해만을 돕는 데 그친다.

결합이 없는 의견의 불일치인 것이다. 비주얼과 정보의 빠른 파악이 정신의 고조를 불러일으키고 이러한 경험방식이 반복되어, 관람객으로 하여금 작품과 전시가 갖는 일반적인 본질을 이해하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예술이해의 구도는 자신이 느낀 점들을 지식 또는 과거화된 정보로 짊어지며 ‘교훈’처럼 차갑게 추상화된 일시적 사유의 종결을 느낀다고 믿게 하는 듯하다. 이는 주체의 과거를 소환하여 얻어지는 반복적 운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그 끝자락에는 명확한 관심사가 없는 수동적이고 느긋한 관람객의 이미지가 있다. 작품의 사물성 너머의 의도는 가리워지고 사물로서의 작품이 그저 존치될 뿐이다.

이러한 현상이 반복되는 이유는, 꾸준한 노력과 일종의 ‘은총’없이는 개별적 작품이 갖는 이상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부족해서일 것으로 생각된다. 주체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그 한계 이상을 경험하는 일은 간단한 감정이입과 정보, 지식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한다. 작가의 이상을 그저 교훈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여과 없이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인간적, 현실적 조건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것과의 ‘시냅스(신경세포간의 연결)’가 필요하다. 맨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그림, 영화, 문학작품 속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깊은 감명을 받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지 않는가? 비주얼, 즉 시지각적인 재현성과 분위기에 의존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것을 넘어, 보이는 것을 매개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불가능한’ 눈을 갈망해야 하지 않을까.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을 발판으로 삼아 그것을 보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빛을 보았을 때 눈이 부셔 앞에 놓인 사물이 보이지 않듯, 눈물이 모든 겉모습을 가리우며 사물의 가면을 벗어젖히듯이 말이다.


- 손지민(1984- )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경제학·환경정책 학사,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 현대미술사 석사 졸업,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원 미학 박사과정 재학. 뉴욕 컬럼비아대 철학과 Alliance Scholarship 수상, 2016 조선일보 미술평론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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