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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작가’라는 낯설고 무거운 이름표를 지키는 일

칸트는 예술행위에 대해 자기목적성을 강조한바 있다. 즉 예술적 행동은 타자나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술 그 자체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대학에서 매 학기 강의를 시작하는 첫 시간, 설렘과 기대감으로 한껏 들떠있는 학생들에게 내가 던지는 첫 질문은 “왜 그림을 그리는가?”이다. 아직 어리면서 순수한 미술학도들은 한결같이 조심스레 “그냥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린다”고 답을 한다. 이때쯤 누군가 은근하게 되물어온다. “그럼, 선생님은 왜 그림을 그리세요?” 항상 매 학기마다 받는 이 질문에 나는 매번 난처해하며,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은 매번 똑같은 답을 해주고 만다. “나도 좋아서 시작했는데, 이제는 의무감으로 그리는 것 같네”라고.

화단에 등단한지 올해로 벌써 12년이 되었다. 그동안 어디 한눈 팔 여유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공모를 통해 만25세에 첫 개인전을 하면서 ‘작가’라는 낯설고 무거운 이름표를 달게 된 나는 그때 스스로에게 단단히 약속을 했다. 한국화단에 한 획을 긋기 위해 매달 한 번의 전시와 매해 개인전을 해야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당시는 대학의 조교 일을 하면서 대학원 수강도 해야 했기에 작품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자칫 잘못하면 바쁘다는 값싼 변명에 싸여 작업에 소홀히 할까봐 많은 전시를 마다하지 않았고, 수상보다 작품 한 점이라도 더 악착같이 하기위해 수없이 공모전을 하였다. 이렇게 스스로를 채찍하며 청춘을 담보로 작업에 매진하는 사이, 속내 모르는 사람들의 가벼운 말에 가끔씩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세월이었기에, 그림을 시작하던 그때의 즐거움을 지키고자 묵묵히 내 작업에만 몰두할 뿐이다.






최근 우리 미술계는 보기 드문 호황을 누리고 있다. 언론과 방송은 화제가 될 만한 신인스타를 만들기 위해 주례사와 같은 기사들을 쏟아내고, 이런 장단에 미술가는 작가가 아닌 연예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흐름을 틈타 노력 없는 허명(虛名)을 얻기 위해 미술시장에만 작품을 선보이기 급급한 젊은 작가들도 보인다. 물론 젊은 나이의 세계적 거장이 등장할 수 있는 것도 미술의 역사성을 역류하려는 포스트모던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건강한 정신과 다양한 실험으로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야 하는 젊은 작가들이 겨우 몇 개의 작품만으로 유명세를 타려고 안달하고, 자신이 하고 싶을 때만 작업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는 안일함은 스스로를 교묘하게 ‘자유로운 예술가’로 포장하는 비겁한 방어책에 불과하다.

며칠 전 이우환 선생님의 기사를 읽었다. “화가는 지식인이어야 하고, 그 시대 책임 못지면 쟁이일뿐”이라고 했다. 한여름의 폭포처럼 내 등을 때리는 뜨거운 울림이었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그때 나에게 했던 그 뜨거운 약속을 지키기 위해 흰 캔버스와 마주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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