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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어느 한량의 일기

김학량

날도 좋습니다. 마누라 입원하고, 경황 중에 한 이틀 사흘, 집 근처 정발산에 기대어 누운 어느 큼지막한 병원에서 이 생각 저 생각 했습니다. 날은 좋았습니다. 달포 만이라던가, 오래 찌푸드드하다 겨우 하늘 벗어지고 시퍼런 바탕에 새하얀 구름 구경이라도 했습니다. 햇살 투명한 기상을 말로 하기는 어렵고.

늦장마에 후줄근한 늦여름 끝, 철 이른 한가위엔 고향 논밭 작물이 온전한 것이 드물었습니다. 한가윗날 아버지 고추밭에 가보아도 그렇더니, 곧이어 태풍까지 들이쳐, 달은 좋이 둥글어도 어느새 농심은 많이 이지러졌습니다. 할 말을 잃었습니다.

이즈음 화두가 수해복구인데, 수해가 막 닥칠 무렵 농민운동가 이경해씨가 저 먼 남의 땅에서 자결하였습니다. 그 분의 거사에는 간단치 않은 정치경제적 맥락이 얽혀있지만, 저렇게도 과감하게, 삶과 죽음이 갈리는 교차점에서 자기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절박함 앞에서 저는 몸서리칩니다. 소름이 돋고 왈칵 눈물 쏟아지고 저를 엮고 있던 풍경이 순간 저를 놓아버리는 듯 아찔합니다. 그이의 자기표현 앞에서 말을 까먹습니다.




<오늘, 병원 뒷산을 휘돌며 바람 쐬는데 문득, 진달래꽃 한 송이, 눈에 띄었습니다. 진달래 나무가 덤불처럼 얽힌 한 가운데, 둘도 말고 꼭 한 송이가 때 아닌 가을 하늘을 이고서 바람을 쐬고 있었습니다. 예삿 표현을 넘어간 저 극단. 때 아닌 아름다움 말고, 진달래의 저 절박함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정발산을 더딘 걸음으로 이것저것 살피며 돌고 보니 절박하지 않은 것 없었습니다. 애기 손톱 만하게 영근 도토리 한 알조차 그랬습니다. 그걸 한가한 이들은 생명욕 운운하겠지만 그건 아니고, 오늘 저는 통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고서, 제가 사는 꼴을 생각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절박한 심경으로 밥을 먹고 똥을 누고 사람을 만나는가. 얼마나 절박한 마음가짐으로 마누라를 마주하는가. 얼마나 절박한 그리움 속에서 아이들과 이야기하는가. 나는 얼마나 절박하게 풍경의 속내를 헤아리는가. 얼마나 절박한 태도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전시를 기획하는가.

그렇게 묻는 꼭 그만큼,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은 간단치 않습니다. 살아있는 게 떳떳치 못하고 미안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죽음이 예삿 표현이 아닐진대, 삶은 또 얼마나 고된 것인가.

- 김학량(39세)씨는 서울대 동양화과와 홍대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 1995-99년 동아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했고 작품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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